좀 과장이긴 해도 아무튼 신비 그 자체
“제주도는 뻔하잖아요.”
울릉도로 신혼여행을 다녀온 사람을 수소문해 취재했을 때 들은 말이다. 뻔한 제주도조차 못 가본, 혹은 갈 수 없는 이들이 부지기수인데 그 큰 섬이 식상하다는 사람도 있다. 코로나 시대, 울릉도가 허니문 명소로 떴단다. 왜일까. 어차피 외국은 못 가니 국내서 가장 이국적이면서도 번잡하지 않은 곳을 찾다 보니 울릉도가 걸린 거다. 동양의 나폴리(통영), 한국의 발리(신안), 한국의 갈라파고스(울릉도, 굴업도)... 굳이 이런 식으로 외국에 빗대며 이국적인 무언가에 열광하는 분위기를 마뜩지 않게 여겼다. 한데 난들 예외가 아니었다. 7년만에 찾은 울릉도에서 허구한 날 “여기 OO 같아”를 외치고 다녔다. 그냥 인정하는 게 편하겠다. 울릉도는 그런 곳이다.
지난 글에 크루즈 타고 가는 뱃길부터 그리스 아테네에서 크레타 섬으로 가던 느낌이라고 끄적였다. 시작부터 이렇게 이국적인 흥취에 빠졌으니 도리가 없었다. 배에서 내려 렌터카를 기다리는 순간도 그랬다. 동이 터오고 사위가 밝아오는데 덩치 큰 동네 개들이 어슬렁어슬렁 하선한 승객에게 접근했다. 아양을 떨며 먹거리를 구걸하는 게 아니라 ‘뭐, 좀 줄 거 없슈?’ 하는 표정이었다. 간식을 던져줘도 꼬리 치며 고마워하지 않고 느릿느릿 집어 먹었다. 이 날은 '무려' 울릉군수님이 항구에 행차하셨는데 개들은 이 섬의 '대빵'을 본 척도 안 했다. 아무 데나 드러누워서 자는 한량 같은 개들이 득시글했던 크레타가 떠오르는 건 당연했다.
섬에서 주어진 시간은 딱 하루. 시계 반대 방향으로 바쁘게 차를 몰았다. 그렇다. 울릉도에서는 렌터카를 몰아야 한다. 몇 년 새 울릉도가 상전벽해, 천지개벽했으니 순환도로가 개통한 까닭이었다. 2019년 도로가 완공되기 전까지 섬 1시에서 3시 방향은 도로가 끊겨 있었다. 3시 방향 저동에서 1시 방향 삼목 쪽으로 가려면 시계 방향으로 한참을 빙 돌아야 했다. 해안 지형이 험해 길을 낼 수 없었던 거다. 주민들은 50년 이상을 그러려니 하고 살았다.
주민들께 죄송한 말씀이나 이기적인 여행자 입장에서 섬의 매력은 ‘불편’에 있다고 생각한다. 배를 타고 한참을 가야 하고, 길도 험하고, 숙소나 편의시설도 넉넉지 않아야 섬이 섬답게 느껴진다. 몇 년 뒤 울릉도에 공항까지 생겨서 삽시간에 날아오게 된다면 고유한 매력이 얼마나 남아 있을지 모르겠다. 수년 전, 한겨울 눈천지 울릉도를 찾았을 때 놀라운 풍경이 있었다. 문을 걸어 잠근 가게 중 이런 안내문을 내건 집이 많았다. “겨울엔 휴무, 봄에 돌아오겠습니다.” 울릉도의 풍토를 그대로 보여주는 ‘귀여운’ 문구였다. 이제 비행기가 뜨고 사철 관광객의 발길이 이어지면 저런 안내문을 못 볼지도 모를 일이다.
섬 1시 방향의 부속 섬 관음도는 순환도로 개통과 함께 필수 코스로 떠올랐다. 지도로 보면 점만 한데 현수교 건너 섬으로 들어가면 결코 작지 않은 세상이 펼쳐진다. 억새가 나풀거리는 산책로를 걸으며 울릉도 본섬의 드라마틱한 지형, 지중해 뺨치는 쪽빛 바다를 번갈아 보니 가슴이 벅차올랐다. 섬 한편에는 여남은 명의 다이버가 보였다. 울릉도에는 국내서도 내로라하는 다이빙 사이트가 많다는 말을 들었는데 여기가 거기였다니!! 취재고 뭐고, 다 관두고 뛰어들고 싶었다.
빡빡한 일정이 원망스러웠지만 출장을 왔으니 해야 할 일을 해야 한다. 다음 코스로 이동했다. 울릉도에는 멋진 숲도, 근사한 걷기 길도 많다. 봉래폭포는 장년층이 주고객인 패키지여행에도 꼭 들어가는 코스인데 폭포 자체보다 어귀의 삼나무 숲이 멋졌다. 잠깐 삼나무라니. 제주도나 남도 끄트머리에나 가야 볼 수 있는 삼나무가 서울과 같은 위도인 울릉도에 있다니. 여하튼 나는 또 뻔한 클리세를 내뱉었다. 울릉도에서 제주도를 만날 줄이야!!
관음도 인근에는 바다를 끼고 걷기 좋은 길도 있다. 3.8km 길이의 내수전 옛길. 과거 파도가 심할 때 북면 주민이 울릉읍으로 넘어다니던 길이다. 울릉도 자생식물인 ‘너도밤나무’ 우거진 원시림이 청량했고, 수시로 비치는 쪽빛 바다가 눈부셨다. 석포전망대에서는 독도가 희미한 점처럼 보였다. 죽기 전에 독도를 꼭 가보고 싶다는 사람이 많은데, 나는 딱히 관심이 없다. 이렇게 본 걸로 만족하련다.
울릉도 천지개벽의 또 다른 주인공인 숙소도 구경했다. 힐링스테이 코스모스. 코오롱 그룹이 만든 럭셔리 숙소다. 낡은 리조트와 허름한 모텔이 대부분인 울릉도에 이 숙소가 들어선 건 하나의 사건이었다. 2018년 섬 북쪽 송곳봉 자락에 개장했다. 숙박비가 꽤 비싼데 연중 빈방이 없을 정도로 인기다. 특히 신혼부부 비율이 높단다. 2박 3일에 2000만원인 초호화 빌라 건물도 있다. 의자부터 오디오까지 온통 고가 브랜드 제품으로 가득 채웠다. 그러나 진짜 입이 떡 벌어지는 장면은 따로 있었다. 낙조와 함께 보랏빛으로 물든 하늘과 불그스름한 바다 빛깔이었다. 아무리 호화시설도 자연이 빚은 고아한 색 앞에 초라할 뿐이었다.
섬을 떠나기 전, 또 한 번 울릉도가 품은 이국의 풍경을 만났다. 예림원이라는 수목원을 들렀는데 서울에선 이미 흔적을 감춘 여름꽃이 흐드러져 있었다. 육지에서는 진작 족적을 감춘 수국과 배롱나무꽃이 9월 말에도 생생히 피어있다니. 알고 보니 울릉도는 육지보다 가을 기온이 3~4도 높단다. 예림원을 나와서 현포항을 지나다가 차를 세우고 뒤를 돌아봤다. 아니, 여기 왜 하와이가 있지? 금방 화산이 터지고 마그마가 흘러내린 것 같은 지형이 화산섬 하와이와 놀랍도록 비슷했다. 꼭 하와이를 호명하지 않더라도 내륙 어디서도 볼 수 없는 풍광인 것만은 틀림없었다.
승선시간에 임박해서 크루즈에 올라탔다. 갑판에 올라가 멀어져 가는 섬을 한참 바라봤다. 그리스와 제주와 하와이가 이 작은 섬 안에 다 있다니. 그러니 결코 작은 섬이라고 할 수 없었다. 단풍이 온 섬을 물들이는 가을이든, 다이빙을 할 수 있는 여름이든, 홋카이도 뺨치는 설국을 만날 수 있는 겨울이든 언제고 다시 와야겠다 생각했다. 다시 울릉도를 찾으면 어디랑 닮았다고 호들갑 떨지 말고 섬 자체를 즐길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