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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경희 Nov 20. 2018

우리 시대의 풍속화

가위와 보자기

중학교 다닐 때, 엄한 가정선생님이 한 분 계셨다. 정기적으로 머리 검사를 하던 날, 그분이 검사를 하러 들어오시면 우리는 그대로 얼음이 되곤 했다.

귀밑 2cm,  당시 대부분의 중학교 여학생들의 머리 규정!(나는 80년대에 중고등학교를 다녔다.)

예나 지금이나 두발, 복장 규정을 두고 학생들과 교사들의 신경전은 대단했는데, 눈곱만큼이라도 길어보려는 우리들이었지만, 그 분이 두발 검사를 하러 교실에 들어온다는 소문이 나면 바로 보자기와 가위를 준비해야 했다. 왜냐하면, 그 분은 머리 끝을 잔인하리만큼 잡아당겨서 자로 길이를 쟀기 때문에. 그 분의 기준을 통과하려면 귓불과 똑같은 길이로 머리를 잘라야만 했다.


솜씨가 좋았던 나는 머리 자르는 솜씨 역시 좋았는데, 두발 검사를 깜박 잊고 등교한 친구들을 위해 하루짜리 미용사가 되어 아이들 머리를 잘라주곤 했다. 누군가가 보자기를 꺼내 놓으면 누군가는 잘 드는 가위를 꺼내왔다. 교실 뒤는 곧 잘린 머리카락으로 지저분해졌다. 지금 생각해보면, 있을 수 없는 풍경이지만, 그때는 그랬었다.

2005년 미장원 풍경(P선생님의 풍속화 수업 중에서)
서울시교육청과 두발 자율화

교사가 되어보니 용의 검사야 말로 정말 하고싶지 않은 업무 중 하나다. 학창 시절에야 반은 재미로 친구들의 머리를 잘라주곤 했지만, 교사와 아이들 사이 가장 많은 갈등이 일어나는 장면 중 하나가 바로 용의 검사가 아니던가.


복장 검사가 있는 날, 전 교사는 해당 학급의 명렬표를 들고 교실로 들어간다.

교복을 줄였는지, 치마 길이는 적당한지, 손톱은 잘랐는지, 머리 염색을 했는지, 머리카락 길이는 규정에 맞는지, 스타킹은 검은색인지(최근에는 살색도 허용한다고 들었다.), 속옷은 흰색을 입었는지, 겨울철 코트는 어두운 색인지, 코트 안에 교복 쟈켓은 입었는지, 화장을 했는지, 립스틱을 바르지는 않았는지, 실내화를 잘 신었는지... 요즘은 색조 들은 선크림도 선별해내야 한다.

복장 단속을 사명감을 가지고 하는 교사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왜 이렇게 해야 하느냐고 하소연하는 분들도 적지 않다. 위에 적은 내용만으로도 학생 인권조례를 위반할만한 사안이 수두룩 하지만, 현장에서는 여전히 용의 검사로 인한 크고 작은 갈등들이 있다. 특히 관리자(교장, 교감)들이나 일부 학부모들은 학습에 열의가 없는 학생들이 복장 규정이 느슨한 학교를 선호한다고 믿고 있기 때문에 학습 분위기가 좋은 학교를 만들기 위해 엄격한 복장 규정을 고수한다.

두발검사하는 날 학교 풍경. 교탁에 놓인 자와 가위가 섬뜩하다.
교사도 힘들다. 용의 검사가 즐거운 교사가 몇 명이나 될까. (우리시대의 풍속화 P선생님의 수업 중에서)

최근, 서울시 교육청에서 염색까지 허용하는, 거의 완전한 두발 자율화를 선언했다. 학교의 자율적인 결정에 의한다고는 하지만, 교육청이 발표까지 한 마당에 예전처럼 엄격한 규정을 고수하는 학교는 그다지 많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런데, 기사에 대한 댓글들이 참 흥미롭다. 교사 입장에서는 학생들과의 불필요한 소모전을 줄일 수 있으니 환영이지만, 관리자들과 학부모들은 걱정이 많다.

공부에 전념해야 하는데 파마, 염색에 신경 쓰느라 공부를 안 하게 된다, 염색 값, 파마 값을 어떻게 하느냐, 학부모 등골이 휘게 된다. 교복 자율화와 같은 부작용이 생긴다, 파마 염색하고 나가면 학생인지, 사회인인지 구분이 어렵다 등, 내가 중고등학교 다닐 때의 논리가 어김없이 등장한다.

나도 한 때는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을 때가 있었고, 용의 검사를 엄격하게 할 때도 있었다. 아니, 설사 생각이 다르다 할지라도 교사로서는 누구나 학교의 방침이 정해지면 함께 규정을 지키려고 노력을 한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그런데, 요즘 생각은 다르다. 나는 학생들의 교육은 일차적으로 가정의 몫이라고 생각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만일 파마와 염색이 학생의 건강과 관련해서 문제가 된다고 생각하면 가정에서 엄격하게 단속해야 할 일이다. 가정에서도 학생과의 갈등 때문에 말리지 못하는 것을 왜 학교가 해주기를 바라는가. 더구나 동일한 문제로 학생과 갈등이 생기면 아무도 교사를 보호해주지 않는다. 학부모는 과도한 학교의 통제를, 관리자들은 현명하게 지도하지 못한 교사를 탓한다. 교사들은 고스란히 태풍을 맨 몸으로 맞아야 한다. 더구나, 내가 부모가 되어보니 부모의 입장에서 나도 말리지 못하는 내 자식의 머리 사랑을 학교에서 해결해달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무리한 기대인지 알게 되었다고나 할까. (다만, 학교에 이처럼 많은 역할을 요구하는 것은 사회구조적 문제가 있지 않나생각된다.)

귀 밑 2CM에서 염색까지

귀 밑 2cm 머리 길이만으로도 단속되던 시대가 있었는데 불과 3-40여 년 만에 파마, 염색까지 허용되는 시대가 되다니, 놀랍지 않은가? 심지어 내가 학교 다니던 시절에는 앞머리 조차 허용되지 않았다!


이 짧은 시간 동안 한국 사회의 변화는 머리 길이의 변화와는 비교도 안될 만큼 달라졌다. 사회가 복잡해지고, 시대의 요구가 많아지면서, 예전에는 수업과 생활지도 정도가 학교의 주된 업무였다면 지금은 온갖 잡다한 것이 모두 학교의 업무가 되었다. 예전부터 늘 해오던 업무에 더해서 진로가 중요해서 진로교육이 강화되었고, 학교폭력과 흉악범죄가 늘자 인성교육이 강화되었다. 그뿐인가. 상담이 강화되었고, 4차 산업혁명을 위한 과학, 정보화 교육도 해야 한다. 틈틈이 사회적으로 소외된 계층들을 위한 온갖 사업들도 함께 해야 한다. 통일교육도, 환경교육도, 봉사교육도 소홀히 할 수 없다. 이 많은 시대적 과제를 수행한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일까  궁금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이슈가 될만한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학교는 무얼 했느냐는 질책에 학교의 과제는 이 순간에도 하나씩 늘어나고 있다!


그런데, 이런 업무 폭탄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교사, 학부모, 학생들 간의 가치관의 차이가 점점 커지고 있다는 것이다. 교사들은 군사부일체와 같은 전근대적인 교사관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다. 반면 학생들은 개인주의적인 사고로 급격하게 전환하고 있고, 사회적 가치보다 개인의 욕망과 행복에 집중하는 경향을 보인다. 학부모는 이 둘 사이에서 스스로에게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영리하게 움직인다. 가치를 재발견하거나 재해석하면서 과거에는 가능했던 많은 훈육이 지금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사생활에 대한 간섭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나는 학교와 교사가 빠르게 시대 변화를 읽고 스스로의 위치와 문화를 재정립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교실에 설치된 벨을 누르면 수업을 방해하는 학생들을 데려가서 다른 학생들의 수업권을 보장해준다는 미국의 엄격한 수업 시스템을 받아들이지는 않더라도 학교가 교육이라는 기본에 충실하기 위해서 무엇을 허용하고 무엇을 허용하지 말아야 할지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해봤으면 좋겠다.     

과거에 가능했던 이런 장난도 지금의 시점에서 보면 명백히 성추행에 해당된다.(2007년, 우리시대의 풍속화 J선생님 수업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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