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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경희 Jan 24. 2022

주의7_4. 늘 새롭게 시작하지는 않는다

4. 늘 새롭게 시작하지는 않는다

인간은 일을 할 때마다 늘 새롭게 시작하지는 않는다. 우리의 주의 자원은 한정되어 있어서 행동이나 말을 장기간 반복하게 되면 자동화(습관화)라는 변화를 겪는다. 어떤 강렬한 감각이라 할지라도 반복해서 경험하게 되면 처음에 느꼈던 것과 동일한 감각을 느끼지 못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자동화란 인간이 경험을 통해 얻은 지식을 스스로의 의식적인 노력이 없이도 행할 수 있는 것들을 말한다. 걸을 때마다 모든 운동 기능을 의식해야 한다면 우리는 한 걸음도 걷지 못하고 쓰러질 것이고, 말할 때마다 입 모양, 혀, 목구멍의 모양, 폐로부터 나오는 호흡 등을 인식하고 문장을 의식하다가는 친구들과 말 한마디도 못한 채 평생 혼자 살아야 할 것이다. 한번 자동화가 이루어지면 다시 그 기능을 사용하지 않는 것이 더 힘들다. 걷기, 달리기 등의 신체 기능이나 말하기, 운전, 자전거 타기 등의 기능은 오랜 시간이 지나도 저절로 할 수 있는 대표적인 자동화 사례다. 자동화는 습관과도 연관이 있다.*18)  매일 동일한 패턴의 행동을 하게 되면 무의식적으로 그 행동을 반복하게 된다.  


자동화가 이루어지면 일어나는 곤란한 일들도 있다. 나는 퇴근 후 집에 돌아오면 늘 같은 장소에 자동차 열쇠를 두곤 한다. 그런데 어떤 날은 매일 두었던 곳이 아닌 다른 곳에 열쇠를 둔 적이 있었다. 다음날 자동차 열쇠를 어디에 두었는지 기억해내지 못한 나는 온 집안을 뒤져 힘겹게 열쇠를 찾아내야 했다. 열쇠는 싱겁게도 너무나도 눈에 잘 띄는 곳에 있었다. 

이런 경험은 누구나 한 번씩 겪었을 것이다. 어디 열쇠뿐이랴. 안경을 벗어두고 어디에 있는지 찾지 못하고, 지갑을 내려놓은 곳이 어딘지 몰라 외출을 못했던 적도 있었다. 이 모든 일은 뇌의 자동화 처리 때문이다. 우리의 의식이 습관화되어 있을 때, 우리는 거기에서 벗어난 행동은 잘 기억하지 못한다. 우리의 뇌가 습관화된 행동에 대해서는 자신의 자원을 따로 분배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습관화된 행동에서 벗어나려면 어떤 강렬한 자극이나 습관화되지 않은 다른 행동을 하면서 그 습관에서 벗어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해야 한다. 


예술은 어떨까? 어쩐지 예술은 자동화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는가? 하지만, 예술가에게도 자동화가 필요하다. 예를 들어, 피아노의 건반을 두드리는 손가락 운동은 자동화와 관계가 깊다. 인지심리학자들은 바이올린을 처음 켜는 사람과 전문적인 바이올린 연주자의 뇌 활성화 상태를 fmri로 측정한 실험을 보고하였다. 이때 처음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의 뇌에서는 활성화되었던 부분이 전문 연주자의 뇌에는 활성화되지 않았다. 이 연구가 의미하는 바는 전문 연주자는 악기를 연주할 때 필요한 손가락의 움직임이나 연주법의 자동화가 이미 이루어졌기 때문에 뇌의 자원을 사용할 필요가 없었다는 것을 시사한다. 자동화 덕분에 전문 연주자는 손가락의 움직임을 의식하지 않고 악보의 표현과 같은 예술적인 부분에 더 많은 신경을 쓸 수 있다. *19 

미술과 학습에서도 유사한 사례를 찾아볼 수 있을까? 연주법의 자동화 사례에서 보았듯 자동화는 의도하지 않아도 일어나야 하고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벌어져야 하며 주의 자원을 사용하지 않아야 한다는 세 가지 조건을 충족했을 때 자동화로 분류된다. 나는 재료와 도구 사용의 학습이 음악가의 손가락 움직임이나 연주법에서의 자동화와 유사하다고 생각했다. 물감의 혼합을 예로 들면, 예술가들은 물감을 사용할 때 ‘빨간색과 파란색을 섞어서 보라색을 만들고, 여기에 흰색을 조금 더 섞어야지,’처럼 혼색의 과정을 일일이 의식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과정은 특별히 의식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며 형언하기 어려운 이미지의 색이 떠올랐을 때만 깊은 고민에 빠진다.


우리는 보통 중학생쯤 되면 물감의 혼합 정도는 잘 알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초등학교에서 미술을 배웠으니 물감을 다뤄봤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제로 수업을 해보면 그런 학생들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지역에 따라 다를 수는 있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채색화 수업을 부담스러워한다. 일단, 물감, 팔레트, 붓, 물통 등 도구가 많이 필요하니 귀찮기도 하고 각각의 도구를 모두 사려니 비용도 만만치 않다.(요즘에는 미술실에 기본 도구를 모두 구비해놓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학생들은 무엇보다 물감을 다루는 일이 까다롭고 어렵다고 생각했다.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물감 다뤄본 경험도 많지 않았고, 당연히 팔레트 사용법도 모르는 경우가 많았다. 교사의 지시에 따라 팔레트에 물감을 짜 놓기는 했지만 왜 팔레트가 필요한지를 깨닫지 못하고 짜 놓은 물감을 그대로 사용하곤 했다. 당연히 혼색을 하거나 농담을 표현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심지어 튜브 뚜껑을 열자마자 팔레트에 물감을 짜지 않고 바로 붓에 짜서 쓰거나 물을 적시지 않은 마른 붓으로 물감을 칠하는 바람에 두껍고 거친 붓 자국을 만들어 당황하고 짜증 내는 학생들도 있었다. 이런 학생들에게 다양한 색을 칠하라거나 물의 양을 조절해서 농담 변화를 주라는 교사의 지도는 학생들을 더 혼란스럽게 할 뿐이다. 아마도 ‘아, 귀찮아. 아무 색이나 바르고 빨리 끝내고 말래.’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기본적인 도구와 재료 사용 방법을 모르니 수업 과정도, 결과도 만족스러웠을 리 없다. 학생들은 의무감으로 뭔가를 그리고는 있으나 아마도 고통의 시간이었을 것이다. 


만일 물감의 혼합이 자동화와 관련이 있다면, 물감의 혼합을 먼저 공부한 후 채색화 수업을 하는 학생들의 학습과 그렇지 않은 학생들의 학습은 어떤 차이를 보일까? 


다시 필자가 2014년 중학교 2학년 학생들과 수업했던 당시로 돌아가 보자. 이 학생들은 중학교 입학 후 미술을 처음 배우는 학생들이었고, 위에서 이야기한 학생들처럼 물감의 혼합 학습 경험이 없는 상태였다. 이에 대한 해결 방안으로 그 해의 교육과정을 기초학습과 예술적 활용 학습으로 재구성해보았다. 1학기는 색에 대한 학습을, 2학기는 다양한 매체 활용 학습을 하는 것으로 교육과정의 큰 틀을 정하고 이를 다시 기초학습과 활용 학습으로 세분화했다. 기초학습 시간에는 물감의 혼합과 같은 도구와 재료 사용 방법, 여러 가지 개념과 용어를 학습했다. 활용 학습은 ‘물감의 혼합의 예술적 활용’이란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일반적인 미술수업에서 해왔던 내용의 학습이다. 활용 학습은 수행평가로 활용했다.     

*20 이 표는 위에서 제시한 수업사례인 ‘빛과 색’ 단원의 교수학습 과정안 중 일부로, 해당 학년의 1학기 교육과정에 해당한다.

학생들은 기초학습의 <삼원색으로 다양한 색 만들기> 수업을 통해 빨강과 노랑을 섞으면 다홍, 주황, 귤색과 같은 다양한 난색 계열의 색을, 노랑과 파랑을 섞으면 연두, 초록, 녹색과 같은 중간색 계열의 색을, 파랑과 빨강을 섞으면 남보라, 보라, 남색 등 다양한 색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뿐 아니다. 빨강과 노랑을 섞어서 만든 주황색에 파랑을 섞거나 검정을 섞어 밤색 계열의 색도 만들게 되었다. 빨강, 노랑, 파랑의 삼원색에 하양, 검정의 두 색을 더하면 만들 수 있는 색은 더 많아진다. 학생들은 물감의 혼합을 배우면서 팔레트 사용법과 물의 양 조절법도 자연스럽게 익히게 되었다. 


물감의 혼합 학습은 학생들에게 결코 즐거운 과정은 아니었다. 이 수업에 흥미 있게 참여한 학생들도 없지는 않았지만 대부분의 학생들은 세 시간에 걸쳐 진행된 이 수업을 따분하게 여겼다. 되는대로 사용하던 붓 사용법을 새로 익히고 물감과 물의 양을 조정하는 등 절제하면서 채색하는 법을 배워야 했다. 게다가 수업 자체가 특별한 주의를 끌만한 요소도 없으니 얼마나 지루했겠는가. 하지만 기초학습이 끝낸 학생들은 전문 화가만큼 익숙하게는 아니지만 비교적 큰 고민 없이 원하는 색을 만들었고, 간혹 어려움을 겪더라도 교사가 조금만 힌트를 주면 스스로 길을 찾았다. 예를 들어 많은 학생들은 갈색 종류의 색을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 묻곤 했다. 그럴 때면 나는 ‘지난주 색 만들 때, 밤색과 가장 비슷했던 색이 뭐였니?’라고 되물었다. 학생들은 잠시 생각하다가 ‘주황색이요.’라고 대답한다. ‘그럼 주황색에 검은색이나 파란색을 조금 넣어볼래?’(학생의 시도를 지켜본다.) ‘아, 나왔어요.’ ‘파란색이나 검은색 양에 따라서 밤색이 조금씩 달라질 거야. 필요하다면 흰색도 조금 넣어봐.’ 색의 혼합 기초학습을 끝낸 학생들은 이어지는 활용 수업에서 몇 개의 제한된 색만으로도 풍부한 색감의 그림을 완성했다. 활용 학습을 끝낸 학생들은 ‘물감을 몇 가지만 썼는데 이렇게 많은 색을 만들 수 있다니 신기하다,’는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2학기 과제에서도 학생들은 물감을 사용했는데, 1학기의 수업 덕분에 큰 어려움 없이 물감을 사용할 수 있었다.

그림 4.  물감의 삼원색을 혼합한 학생 활동사진
그림 5.  물감의 삼원색과 흰색, 검정의 다섯 가지 색을 섞어서 색칠한 한국화
그림 6.  2학기의 수업 <우리 동네 신문 만들기> 학생작품. 사진과 물감을 사용했다.

물감을 섞어본 경험과 그로부터 얻어진 혼색에 대한 지식은 학생들에게 자동화(자동화 처리)된 능력으로 남는다. 이때의 경험이 갖는 중요성은 다음과 같다. 물감을 자유롭게 혼합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는 자기 인식은 채색을 활용한 다른 수업을 하게 될 경우 물감을 통제할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작용한다. 성공적으로 채색화 학습을 완료한 경험은 또 다른 채색화에 도전할 가능성을 높이고, 다양한 색을 만들어본 경험은 거꾸로 대상에서 풍부한 색을 찾아낼 가능성을 높인다.  


반면 물감의 혼합을 학습하지 않았던 해에 만났던 학생들은 물감 세트에 있는 색 이외의 색을 만드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이 학생들은 물감 세트에 있는 색만을 사용했고 물감을 섞어서 다른 색을 만드는 것에 대해 거의 생각하지 않았다. 학생들에게 다양한 색감을 표현하라고 요구하면 더 이상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하곤 했다. 학생들이 수채화는 어렵다거나 미술은 재미없는 과목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원인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이와 같은 실패의 경험도 그중 하나가 아니었을까. 


자동화에는 긍정적 측면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같은 주제, 같은 수준의 것을 반복하게 되면 그 주제에 대해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 이미 자동화가 이루어진 학습 과제에서는 새로운 수준의 주의를 끌 수 없기 때문이다. 자동화는 주의 자원을 절약하는 긍정적인 측면을 갖지만 이미 자신이 알고 있는 내용에 대해서는 주의 자원을 분배하지 않는다. 만일 어쩔 수 없이 유사한 수업을 반복해야 한다면 수업 주제와 학습 방법에 변화를 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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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인간의 기억을 분류할 때 일화적 기억, 범주적 기억, 절차적 기억으로 나누기도 한다. 일화적 기억은 특정 사건과 자신과의 연관성에 대한 기억으로, 한 차례의 강한 자극만으로도 그 기억이 오래 남기도 한다. 범주적 기억은 특정 단어, 특히 추상적인 단어에 대한 기억이다. 오랫동안 그 단어에 대한 반복된 경험을 통해 그 단어와 관련된 추상적인 이미지를 갖게 된다. 절차적 기억은 주로 운전이나 수영하는 법에 대한 기억이다. 이 글에서 물감의 혼합에 대한 기억은 절차적 기억과 관련 있다. 물감의 혼합의 반복된 학습은 우리 뇌 속 장기 기억에 저장된다.  

*19  자동화는 절차적 기억과도 관련이 있다. 절차적 기억은 대부분 오랜 기간 반복 학습을 통해 습득된다.

*20 이 표는 위에서 제시한 수업사례인 ‘빛과 색’ 단원의 교수학습 과정안 중 일부로, 해당 학년의 1학기 교육과정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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