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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경희 Jan 24. 2022

주의 8_ 5. 새로운 학습으로 이끈다

5. 새로운 학습으로 이끈다

학습이 끝난 경험은 학습자의 내면에 선행 지식으로 자리 잡게 된다. 학습자의 주의를 다시 끌기 위해서는 현재 그가 알고 있는 수준보다 조금 더 높은 수준을 제시해야 한다. 왜냐하면 학습자의 현재 수준보다 지나치게 높은 수준의 학습 과제를 제시하면 이내 피로해져서 학습의 포기로 이어지고, 너무 쉬우면 흥미를 잃어 학습에 참여하지 않기 때문이다. 칙센트미하이는 인간이 가장 큰 성취감을 느끼는 도전과제는 자신이 알고 있는 것보다 조금 더 높은 수준의 과제를 성취했을 때이며, 이때 가장 몰입하고 행복감을 느끼게 된다고 하였다. 윌리엄 제임스는 ‘이제 우리는 습득하는 것이 많을수록, 그리고 정신이 신선하고 독창적일수록 지속적 주의가 더 쉬워지는 이유를 알게 되었다. 신선하고 독창적인 정신 안에서 주제가 쉽게 생겨나 싹을 틔우고 자란다. 주제는 어느 순간에든 새로운 결과로 자극을 받고 따라서 주의를 새롭게 집중시킨다.’라고 이야기를 하였다. 이 말은 ‘아는 만큼 보인다’는 흔한 경구를 연상시킨다. 아무것도 없는 백지상태의 마음은 생각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선행 자원이 없기 때문에 무엇에 주의하고 어떤 주제를 만들어야 할지 알 수 없다. 이는 미술과 학습의 위계와도 관련이 있다. 


학습에서의 위계는 하위 수준의 학습과 상위 수준의 학습이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어서 상위 수준의 학습을 하려면 하위 수준의 학습을 완료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 예로 수학 시간에 방정식 단원을 학습하게 된 학생의 경우를 생각해 보자. 사칙연산을 모르는 학생이 방정식 단원을 학습할 수 있을까? 반대로 사칙연산은 방정식 안에 이미 존재하지만 방정식을 모른다고 사칙연산을 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이 경우 사칙연산은 방정식보다 먼저 학습해야 하는 위계가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지식의 위계가 과연 예술교과에도 존재하는 것일까? 여기에 답하기 위해서는 먼저 미술교과에서의 지식이 무엇인가를 먼저 정의해야 하겠지만, 이 논의는 너무나도 방대하기 때문에 이 글에서는 일반적인 미술과 수업에서의 학습 주제로 범위를 한정하고자 한다. 


많은 교사들은 ‘미술과 학습에서 위계가 존재하는가’란 질문에 의문을 표할 것이다. 이는 마치 ‘예술 영역에 위계가 존재하는가’라고 묻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미술과 학습 내용에 위계가 없다는 생각은 어떤 측면에서는 맞고 어떤 측면에서는 틀리다. 애니메이션, 수채화, 조소, 공예와 같은 장르에 대해서건 표현, 감상 등의 학습 영역에 대해서건 어떤 것이 다른 것의 이전, 이후에 학습해야만 한다는 의미의 위계를 주장하다 보면 영원히 끝나지 않는 논쟁이 될 것이다. 모든 예술에는 범접할 수 없는 자신만의 고유 영역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학생들의 학습에서도 그럴까? 물감의 혼합에 관한 윗글에서도 잠깐 보았듯이*22 교육과정을 어떤 순서로 구성하느냐에 따라 경험의 폭과 깊이가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위계에 대한 해석은 달라질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교사의 교육과정을 통해 실제 교실 업을 살펴보는 것이 이에 대해 좀 더 잘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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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여기에서의 교육과정은 국가 수준 교육과정이나 학교 교육과정이 아니라 교사 개인이 교실 안에서 학생들과 학습하기 위해 마련한 교사 개인 수준의 교육과정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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