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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경희 Sep 07. 2024

망한 수업

지난 5월 어느 날이었어요. 고3 수업을 하는데, 한 녀석이 제게 이런 말을 하는 거예요.


"1학년 때 미술, 진짜 재미있었는데, 3학년 미술은 왜 이렇게 재미없어요?"


"뭣이라?!"

어이가 없었어요. 참고로 이야기하자면, 그 아이의 1학년 때 미술 교사도 저였어요. 작년에는 '3학년 수업도 선생님이 하시냐'면서, 다행이라고 말하고 갔던 학생이었어요. 아니, 그런 이야기를 해 놓고서 이제는 미술이 재미없다고? 나 그때 너랑 같이 수업했던 바로 그 선생님이야! 

우리가 그날 하고 있었던 수업은 탁본 수업이었어요. 탁본이 뭔지 아시죠? 비석이나 부조에 한지를 바짝 붙이고, 솜방망이에 먹을 묻혀서 찍는 전통 판화요. (오래전에는 많이 했던 수업인데 요새는 별로 안 하는 것 같아요.)


아니, 내가 표를 안 내서 그렇지, 자료 준비하느라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아세요? 자료 검색하고, 동영상 다운로드하여 PPT 만들고, 천 잘라서 솜방망이 만들고(옛날에는 칠판 닦이로 찍었음.), 잉크는 먹물이 좋을지, 스탬프 잉크가 좋을지, 물감이 좋을지 고민하고 또 고민해서 세심하게 준비했는데, 교사 면전에서 그렇게 돌직구를 던지냐고요! 완전 마상 ㅠㅠ


실은 저도 아이들이 지루해하는 것을 느끼고는 있었어요. 수업하다가 보면 우리 느끼잖아요. 즐겁게 몰입하는지 아닌지. 그 아이는 워낙 솔직한 아이인 데다 저를 어려워하지 않는 아이였어요. 느낌 그대로 이야기했을 뿐인데 걔가 무슨 잘못이 있겠어요? 재미없는 수업을 한 (또는 재미없게 수업한) 제가 잘못이죠. 상황 묘사를 추가해서 상상 수업으로 완성할 계획이었지만(원래 수업 제목이 판화와 상상이었음.) 눈물을 삼키면서 서둘러 접었어요. 진짜로 탁본만 하고 끝냈죠.


다음은 아이들 작품이에요. 이게 그렇게 재미가 없었을까요? 수업준비하면서 저는 진짜 재미있었거든요. 그런데 그때의 수업분위기란.... 온몸으로 재미없다고 얘기하는 게 느껴져서 참 힘들었어요.

사실 변명거리는 많아요. 고3이 되면 몸이 무거워서 자리 옮기는 것도 귀찮아하니 1학년 때처럼 학교 밖으로 야외스케치를 가거나 사진 촬영 기법 배운다고 운동장을 뛰어다니기도 애매하고요, 1 학기에 일 년 수행을 끝내야 하는 한계 상황도 있잖아요. 그래서 탁본 수업을 계획한 것이었거든요. 짧게 끝내려고요.


탁본이라는 주제가 너무 쉬웠을까요? 고3 남학생에게는 너무 시시해서 호기심을 이어갈 만한 소재가 아니었을까요? 중학생이었다면 좀 달랐을까요? 아니면 장치가 부실했거나 제가 서툴러서 '로맨스 단계'를 만드는데 실패해서일까요? 원인이 뭐든 간에 인정할 수밖에 없었어요. 이 수업 망했구나~


선생님들은 어떠세요? 샘들은 이런 경험 없으세요?


부끄러워서 말을 안 해 그렇지 저는 자주 있어요. 특히 처절하게 망한 수업이 몇 개 있는데, 십수 년 전 했던 <소원 알 만들기> 수업도 그중 하나예요. 이 수업은 풍선 표면에 종이를 여러 겹 붙여서 알처럼 만들고 그 안에 지점토를 포함한 혼합 재료로 미래의 자신의 모습을 만들어 넣는 수업이죠. 저는 이 수업을 딱 두 번 했었는데, 첫 수업은 중학교 3학년 여학생들과 했어요. 그땐 좋았죠. 아래 이미지는 그때의 수업 결과물이에요. 정말 예쁘죠!

<알 만들기>는 학교를 옮기고 또 한 번 했는데, 두 번째는 완전히 망한 거예요. 새 학교는 남녀공학이었는데, 그 사이 오 년의 시간이 흘렀던 거예요. 스마트폰이 보급되기 시작했고, 옛날과 달리 아이들은 오랜 시간 집중해서 만드는 걸 지겨워했어요. 1/3이 완성을 못하고 끝났어요. 제가 아이들의 변화를 제대로 읽지 못했던 거죠. 제가 수업자료 남기는데 완전 진심인데, 얼마나 망했는지 사진 한 장 안 남겼네요.


비교적 최근의 망수업으로 <자개 공예와 가족 초상화 그리기>도 빼놓을 수가 없네요. 저는 촌스럽게 자개를 엄청 좋아해서 한동안 자개에 빠져 있었어요. 자개의 아름다움을 아이들에게도 소개하고 싶었죠. 액자 모양의 작은 나무 블록을 어찌어찌 검색해서 거기에 가족 초상화를 그리고, 모서리를 자개로 장식해 보겠다는 야심 찬 수업 계획을 짰어요.


자개를 구입하고, 자개 그립톡 만들 때 쓰는 페인트를 한 통 사서 쓰기 좋게 매니큐어 빈 통에 따라 놓고 수업을 시작했죠. 그런데, 와~ 자개 페인트를 32명이 동시에 사용하니까 냄새가 장난이 아닌 거예요. 아이들도 머리 아프다고 하고, 하루 종일 냄새를 맡아야 하는 저는 더 죽을 지경이었죠. 게다가 저희 학교 남학교거든요? 산만큼 커다란 남학생들이 손바닥만 한 나무토막에 대나무 꼬치로 자개를 찍어다 붙이는 모습을 상상해 보세요. 애들이 얼마나 지겨웠겠어요? 평가 때문에 어찌어찌 마무리는 했는데, 지금 돌아봐도 매력이라곤 1도 찾아보기 어려웠던 수업이었죠. 알 만들기 수업보다 더 처절하게 망했다는....


어떠세요? 보기만 해도 고리타분하고 답답~하게 느껴지지 않나요? 감각을 열어주는 게 아니라 쥐어짜는 수업의 표본이었달까요? 

이렇게 망한 수업은 깨끗하게 접어버릴 때도 있었고, 어떻게 살려보겠다고 덕지덕지 수선해서 간신히 체면치레를 한 적도 있었어요. 어느 쪽이든 같이 수업을 한 학생들에게는 많이 미안하죠. 그 시간은 이미 흘러가 버렸잖아요. 망수업의 추억은 두고두고 뒤통수를 부끄럽게 만들어요.

수업은 진짜 어려운 것 같아요. '이건 대박 날 거야' 생각하면서 자신만만하게 준비했지만 망하기도 하고, 파일럿으로 대충 진행했는데 대박이 나서 진짜 재미있다는 반응이 돌아오기도 하죠. 망한 수업은 왜 망했까요? 성공한 수업은 왜 성공한 걸까요? 가치 있는 수업은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요?

성공한 수업을 나누면서 배우는 시간도 좋지만 가끔은 이렇게 망한 수업 이야기를 하면서 우리끼리 서로 위로하는 시간을 가져보는 건 어떨까요? 토닥토닥~하면서요.


사족: 아참, 글머리에서 3학년 미술 재미없다고 제게 돌직구를 던졌던 학생 말이에요, 그다음 수업은 피규어 만들기였는데, 순회지도를 하다 보니 고개도 안 들고 몰입하고 있더라고요. 뭘 그리 열심히 하나 봤더니, 피규어 발가락을 만드는데 완전 진심이더라는.... .수업이 끝날 때쯤 제가 물어봤어요. "미술 재미없다더니 이건 좀 괜찮니?" 그 아이는 자신이 한 말도 기억 못 하나 봐요. 뭔  소리냐는 듯 "네?" 이러더라고요..... 흑, 나쁜 놈!


아래는 그 학생이 만든 피규어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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