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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경희 Oct 28. 2024

부평 지하호 탐방

부평 문화원 달빛 기행, 부평 지하호 탐방

생각보다 가까이 있는 전쟁

부평에서 꽤 오래 산 필자지만 그동안 전혀 모르고 살았던 장소가 있었다. 바로 부평 지하호. 부평지하호의 정식 명칭은 인천육군조병창 지하시설이다. 부평지하호는 일제 강점기, 일본이 중일 전쟁 장기화에 대비해 현재의 인천광역시 부평 일대에 만들려고 했던 거대한 병기 생산, 보급 기지 건설의 흔적들이다. 그들은 부평구 산곡동에 있는 함봉산 자락 이곳저곳에 인공동굴을 만들고, 미국을 비롯한 연합군의 눈을 피해 아시아 태평양전쟁의 병참기지를 건설하고자 했다. 병참기지, 군비 생산 기지라는 참혹한 전쟁의 현장이자 나라 잃은 시간을 증언해 주는 생생한 역사의 현장이 지근거리에 있었다니. 부평지하호는 심지어 필자가 한 때 근무했던 학교와 불과 버스 한 두 정거장 거리에 있었는데, 왜 그동안 몰랐을까?


지난 10월 26일, 함께 근무하는 사회선생님을 따라 이십 여명의 학생들과 함께 처음으로 부평지하호 탐방에 참가하면서 느낀 감정은 뭐라 설명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 참혹했던 강제 동원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부평지하호는 총 29개 정도가 확인되었다고 한다. 그중 c구역에 있는 지하호의 입구

지난 210월 26일, 부평 지하호 달빛 기행에 학생들과 함께 참여하게 된 것은 같은 학교에 근무하는 사회 선생님 덕분이었다. 부평문화원의 달빛 기행은 [2024 기억하라 부평지하호] 탐방 프로그램으로, '일제강점기 인천육군조병창의 지하공장인 부평지하호를 직접 걸으며 '아시아 태평양 전쟁유적'을 체험해 보는' 프로그램이다.(이하 따옴표 안은 부평지하호 팸플릿에서 인용했다.) 탐방은 한 달 한 번 진행되는데, 산곡동 인평고등학교 인근 구세군 어린이집 앞 공터에서 시작한다. 함봉산 산길을 따라 걸으며 부평 지하호의 흔적들을 답사하게 되며  c구역 6번 지하호 150m를 탐방하는 것으로 끝난다. 전체 탐방 시간은 대략 한 시간 30분 정도. 부평지하호는 대부분 사유지나 군부대 지역 안에 있어서 개인적인 접근은 어렵고, 부평문화원의 탐방 프로그램을 통해서만 방문할 수 있다. 전체 탐방은 부평문화원 문화 해설사님의 안내로 진행된다.

문화해설사의 안내를 들으며 탐방을 기다리고 있는 학생들


전쟁, 강제 동원의 흔적

부평 지하호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진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라고 한다. 리플릿 안내 글에 따르면 지하호(인공석굴)는 2016년 당시 조사를 할 때만 해도 '새우젓 굴'로 알고 있었다고 한다. 다만 몇몇 동네 어르신들의 기억에서 일제 강점기에 만들어진 것이라는 증언이 있었고, 이후 '지속적인 조사와 연구, 역사 전문가들과 교류를 통해 일본군 극비 문서를 발견하게 되어 인천 육군 조병창의 지하공장(무기 생산 및 보관)'으로 확인되었다. 일제 강점기 일본은 아시아태평양 전쟁 당시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일본 현지, 아시아 곳곳에 부평지하호와 유사한 구조물을 건설하였다. 부평 지하호가 조병창을 건설하기 위한 굴이라는 사료를 확인하게 된 후 일부 방송 프로그램을 통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고, 지하호 건설에 동원된 사람들의 증언을 확보하게 되면서 점차 강제동원의 전모가 알려지기 시작했다. 증언에 의하면 부평 인근뿐 아니라 멀리 경기도 등지에서도 학생들을 동원하였다고 한다. 물론 대부분의 학생들이 자신이 어디로, 왜 가는지에 대해 잘 알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며, 이곳에서 1일 2교대, 매일 12시간씩 돌산을 파는 강제 노동을 해야 했다. 일본은 이곳에 병기를 생산하는 공장(조병창)을 만들어 중일 전쟁의 장기화로 인한 병기 보급 문제를 하고자 했다. 다만 조병창을 완성하기 전에 일본이 패망하였고, 미완성으로 남게 되어 그 전모가 알려지기 전에 사람들의 기억에서 점차 사라지게 되었던 것 같다.

문화 해설사의 설명을 듣는 모습
굴 입구에서 문화원 직원이 나눠준 헬멧을 쓰고 탐방을 시작한다. 굴 곳곳은 바위 틈에서 흘러내린 물로 질척거리고, 곳곳에는 새우젓 보관 흔적들이 남아 있다.
온도계. 6번 굴의 온도는 늘 13도를 유지한다.

시간의 흔적이 쌓이고 있는 부평 지하호

부평지하호가 오랜 시간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고 한다. 일부는 일본군 주둔지에 있었고, 일본이 패망한 후에는 군부대가 주둔하거나 미군이 주둔하게 되어 일반인들이 접근할 수 없었다. 나머지 대부분의 지하호는 사유지에 있다 보니 오랜 시간 외부에 노출되지 않고 시간이 흘렀다. 광명동굴이 그러했듯 한 때 새우젓 저장 창고로 쓰이기도 했단다. 우리가 탐방한 c구역 6번 굴 역시 새우젓을 포장했던 비닐 등이 어지럽게 널려있었다.

c구역 6번 지하호의 깊이는 약 150m 정도다. 산길도 어두웠지만 지하호 내부에는 전혀 조명장치가 없기 때문에 손전등은 필수다. 손전등이 없다면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칠흑 같은 암흑이 우릴 기다린다. 이런 열악한 환경에서 어린 학생들은 돌벽을 뚫고 돌을 나르는 강제 노동에 동원되었던 것이다. 안전을 위한 안전모 착용 역시 필수다. 입구에서 나눠준 안전모를 착용하고 랜턴으로 발끝을 비추면서 지하호 벽면을 타고 흘러내린 물로 질척거리는 바닥을 조심스럽게 걸어갔다.

 동굴 끝에 도착하면 당시 어린 학생들이 작은 손으로 단단한 돌 벽을 뚫던 흔적이 우리를 기다린다. 탐방객들은 잠시 모든 불빛을 끄고, 일제 강점기 또래 학생들이 마주했을 칠흑 같은 어둠 속 그 시간으로 돌아가 묵념을 올렸다.

어느덧 지하호 특유의 차가운 공기가 옷깃을 뚫고 피부에 느껴진다. 동굴 벽면에는 물기가 흐르고 있었다. 아마도 돌에는 석회석 성분이 섞여 있었을까? 물이 방울방울 떨어지는 천장을 올려다보면 손톱만 한 종유석이 자라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오랜 시간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는 동굴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종유석이 종유석이 자라고 있는 것이었다.

잊지 말아야 할 것들

돌아가는 길, 먼저 출발한 학생들의 랜턴이 동그랗게 빛의 원을 그리면서 산 아래로 천천히 움직인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은 아름답다는 생각이 불쑥 튀어나온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 그저 잠시 머물다 왔을 뿐인데, 해방된 나라에서 자유롭게 호흡하고, 자신을 위해 생각하고 움직이고 미래를 꿈꿀 수 있는 자유에 감사하게 되는 것이 신기하다.  

역사의 흔적은 생각보다 오래간다. 누군가가 계획적으로 은폐하고, 경험한 사람들의 기억에 조차 가물거릴 만큼 많은 시간이 흘렀다 하더라도 그 흔적은 어디에선가 불쑥 우리를 찾아온다. 광복 후 수 십 년이 지난 2016년에 부평지하호가 불쑥 우리를 찾아왔듯이 말이다. 부평지하호는 일제 강점기 강제 동원의 가슴 아픈 현장이면서 반전 평화 교육의 생생한 현장일 수도 있다. 최근 뉴라이트 계열 학자들의 망동이 계속되고 있는데, 그들에게 이곳 부평 지하호를 보여주면 어떤 이야기를 할지 궁금해진다.

* 부평지하호와 달빛 기행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부평문화원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부평문화원 (icbp.go.kr)

부평문화원 홈페이지 갈무리
부평지하호 안내 리플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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