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하필 제주도 한라산 영실코스의 철쭉꽃이 보고 싶었을까? 수 년째, 해마다 유월이 되면 영실코스 철쭉꽃 타령을 했던 나. 그런데 우습게도 왜 보고 싶었는지 그 이유는 전혀 생각나지 않는 것이다.
이유야 아무러면 어떠랴. 오히려 뭔가 이유를 만들기 시작하면 그 순간부터 시시해지는 경험은 누구나 한 번쯤 해본 적 있지 않나? 언젠가 봤던 한 장의 사진이 계기가 되었다거나 전국에서 마지막으로 보는 가장 늦은 철쭉꽃이라거나, 철쭉꽃을 미치도록 좋아한다든지 하는 이유를 대는 순간 그곳에 가고 싶었던 나의 소망은 평범해지고 시시해지는 것이다. 그냥, 왠지, 전라도 말로 '무담시',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나 언젠가부터 애타게 가고 싶었던 곳. 그것도 철쭉꽃이 만개한 6월의 영실. 영실은 나에게 그런 곳이었다.
아마 뭔가 계기가 있기는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 해가 가고, 두 해가 가고 몇 년의 시간이 흐르다 보니 왜 가고 싶었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고 보고 싶다는 소망만 남았다. (나이 먹으면 이런 일은 비일비재하다.) 비행기 한 번 타고 백록담도 아닌 영실 코스 올라갔다 오는 게 뭐 별거라고. 기껏해야 두 시간 코스라는데. 그런데, 참 이상하게도 별거 아닌 그것이 쉽지 않았다. 우선, 6월 첫 주 철쭉 피는 시기에 딱 맞춰 제주도를 찾는 일이 쉽지 않았다. 집안 일로, 직장 일로, 이 곳 저곳에 매인 곳이 많은 지라 내 마음대로 훌쩍 떠나기란 쉽지 않았다. 어쩌다 마음먹고 한라산 턱 밑까지 갔던 적도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겨서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돌아와야 했던 일도 두어 번. 그러다가 마침내 올해 제주도를 찾게 되었다. 올해는 꼭 보고야 말리라.
출발 전날, 갑자기 강풍에 비바람이 온다는 일기예보가 떴다. 하아-. 올해도 영실 코스 철쭉꽃을 못 보고 돌아가는 것인가.
비바람이 오기 전에
6월 4일, 퇴근 후 서둘러 김포공항으로 향했다. 5일 새벽 비행기로 출발할 수도 있었으나 아침을 여유 있게 시작하고 싶었다. 여행 일정은 첫날 우도, 둘째 날 영실 코스 등반, 셋째 날은 정처 없이 이곳저곳 떠돌기. 그렇게 3일의 일정이었다. 그런데, 일기예보는 셋째 날인 6월 7일, 강풍과 비바람을 예고했고, 6일 오후에도 비 예보를 내리는 것이 아닌가. 이러다 영실 코스는커녕 비행기 결항으로 제주도에 갇히는 것이 아닌가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일단 영실 코스는 비교적 일기가 양호한 5일 오르기로 일정을 변경했다. 아무리 영실 코스 철쭉꽃 보는 게 소원이라지만 안전을 무시하고 비 오는 한라산을 오를 수는 없었다.
밤 10시경 도착한 호텔 바로 옆에 마침 큰 마트가 있었다. 마트에서 간단하게 장을 보기로 했다. 등산할 때 먹을 간식 준비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윗세오름 대피소에서 사 먹는 라면이 기가 막히다는 글들이 꽤 있었는데 한라산 홈페이지를 방문해보니 이제 매점을 운영하지 않는단다. 그러니 간식 준비는 필수. 도넛 종류 몇 가지와 포도를 샀다.(등산할 때면 오이를 사가는 것이 정석이라고 생각했는데 산 위에서 먹는 포도맛이야 말로 기가 막혔다!) 배낭 속에 비스킷도 넣어두었으니 내일 산에서의 간식으로는 넉넉할 것이다.
아침을 든든히 먹고 조금 느지막이 호텔을 나섰다. 이번 여행에서는 차량을 랜트하지
않고 대중교통을 이용하기로 했으나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택시를 탔다. 제주시 탑동에 있는 숙소에서 영실 휴게소까지 약 15,000원 정도 나왔다.
영실 주차장 입구에 도착하니 여러 대의 승용차가 주차장 진입을 위해 대기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영실 주차장이 좁아서 주차할 수 있는 차가 몇 대 안되기 때문에 먼저 온 차가 나갈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한다. 택시 기사님 이야기로는 먼저 주차한 차가 언제 나올지 모르기 때문에 한 시간 대기는 기본이라고 한다.
우리가 탄 택시는 대기 중인 승용차들을 지나쳐 영실 휴게소 주차장으로 곧장 올라갔다. 기사님 이야기로는 버스 정류장에서 내린 후 영실 등산이 시작되는 휴게소 입구까지 근 한 시간 가량을 걸어야 한다고 한다. 등산을 좋아하는 이들에게는 한 시간 거리야 아무것도 아니겠지만 나처럼 저질체력에 등산 경험이 거의 없는 초보자로서는 등산을 시작하기도 전에 이미 지치기 딱 좋을 시간이다. 택시를 타고 온 것이 신의 한 수였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정류장에서 영실 휴게소까지 택시비도 꽤 비싸다고 한다.)
영실 탐방코스 안내도. 입구에는 유네스코 등재를 알리는 팻말이 있으며, 영실코스는 해발 1280m에서부터 시작한다.
오늘 우리가 오르기로 한 코스는 영실 휴게소를 출발하여 병풍바위를 지나 윗세오름 대피소를 거쳐 어리목으로 하산하는 코스다. 만일 차를 가져왔다면 영실로 다시 내려오거나 어리목으로 내려온 후 택시로 영실 휴게소까지 이동해야 하겠지만, 대중교통을 선택했기 때문에 마음 편하게 코스에 변화를 주기로 한 것이다. 막상 올라가 보니, 윗세오름 대피소에서 어리목으로 내려오는 길이 무척 아름다워서 참 잘 한 선택이라고 생각되었다.
한라산 홈페이지에는 영실휴게소에서 윗세오름까지 한 시간 삼십 분 걸린다고 안내가 되어있는데, 나는 거의 두세 시간 걸렸던 것 같다. (참고로, 영실코스에서는 백록담으로 올라갈 수 있는 길이 없다. 다만 윗세오름에서 남벽 분기점까지 가면 백록담의 뒷모습을 볼 수 있다. 우리는 거북이처럼 느리게 올라갔기 때문에 남벽분기점을 들르지 않고 바로 어리목으로 내려왔다.)
왼쪽, 영실 입구 주차장. 작은 매점이 있다. 오른쪽, 오백나한과 까마귀를 표현한 조형물. 한라산에는 까마귀가 많다.
쉘 위 등산
초입은 경사가 완만하고, 좌우로 물이 흐르는 계곡이 있는 데다 키 큰 나무 그늘이 져서 마치 산책하듯 즐겁게 지나갈 수 있다. 그러나 조금만 지나가면 급경사의 데크가 나온다. 인터넷에 미리 다녀온 사람들의 후기를 읽으면 이 난이도 상의 급경사 코스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저질체력의 나로서는 긴장할 수밖에 없는 코스. 무리하지 말고 체력을 안배하며 천천히 올라가야 할 것이다.
영실마루 초입. 완만한 경사에 데크가 놓여있어 산책하듯 오르면 된다.
헉! 헉! 끝이 없을 것만 같았던 가파른 계단.
가파른 계단은 끝도 없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더러 돌계단도 있었으나 대부분 철도 침목같이 생긴 방부목으로 되어 있었다. 영실코스에서 가장 난코스라고 했다. 이 길을 거의 50분 가까이 오르면 병풍바위에 도착한다. 그런데, 인터넷에서 이 코스가 힘들다 글을 하도 읽어서인지 막상 계단의 끝까지 왔을 때 들었던 생각은 '고작 이 정도를 가지고 그렇게 겁을 먹었나?'였다. 이 말은, 인터넷의 글을 통해 계단에 대한 막연한 공포가 부풀려져서 스스로 실제 규모보다 더 크게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어렸을 때 병원에서 주사를 기다리던 마음 같은 것이었다고나 할까. 막상 주사를 맞고 나면 아무것도 아니었던....
영실마루 기는 길, 오백나한. 병풍바위
한라산에는 까마귀가 많다. 등산객을 늘상 보는 탓인지 사람에 익숙하고 영리하여 등산객들이 주는 음식도 곧잘 받아먹는다.
화창했던 날씨는 병풍바위를 지나갈 무렵 갑자기 변덕을 부려 산 아래서부터 구름이 빠른 속도로 따라오기 시작했다. 비 예보는 내일부터였는데 벌써 비가 오는 것은 아닌지 살짝 겁이 났다. 아마 이 산속에 우리 일행만 있었다면 돌아갔을 터이지만 내 앞에, 그리고 내 뒤에 산에 오르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나도 용기를 내서 발걸음을 재촉했다.
한라산의 날씨는 변화무쌍하다. 갑자기 몰려온 구름이 산을 뒤덮는다. 계단 까마득한 저 멀리 먼저 올라간 사람들의 실루엣이 보인다. 안개는 점점 짙어지고....
군데군데 하얀 뼈대를 드러내고 망부석처럼 서있는 주목 또한 인상적인 풍경을 만들어 낸다.
맨 오른쪽 사진의 현무암 더미를 지나면 드디어 선작지왓, 멀리 보이는 둥근 산이 백록담이다.
왔노라, 보았노라.
드디어 보았노라, 영실 철쭉!
선작지왓은 영실기암을 지나면 만나는 너른 평야지대를 이른다. 영실 초입의 나무가 키 큰 활엽수들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면 이곳 선작지왓은 나무들은 하나같이 키가 작다. 사진에 노랗게 보이는 것들은 모두 키 작은 조릿대들이다. 그리고 멀리 내가 그토록 보고 싶어 했던 철쭉 군락이 보였다.
광활한 산죽 평원을 걷다 보면 고도에 대한 감각이 사라지는 것을 느낀다. 내가 있는 이 곳이 산인지, 혹은 너른 평야를 걷고 있는 것인지 감각이 무디어진다. 광활한 평원에 홀로 서 있는 느낌.
말이 필요하랴!!
영실코스의 철쭉꽃은 영실 기암을 지나면서 비로소 나타난다. 그런데, 이곳을 방문하면서 새롭게 발견한 것은 내가 그토록 보고 싶었던 철쭉꽃이 아닌 선작지왓의 끝간 데를 짐작하기 어려운 광활하고 너른 조릿대 군락이었다. 백록담의 둥근 가슴을 멀리 조망하며 걷던 먹먹하게 너른 그 벌판이 아직도 눈 앞에 아른거린다. 철쭉꽃은 충분히 아름다웠지만 기대했던 만큼은 아니었다. 아마도 멀리서 조망할 수밖에 없는 지형 조건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내년 여름 다시 이곳을 오게 된다면 그것은 아마도 철쭉 때문만은 아니 것이다.
파노라마 기능으로 찍어본 선작지왓
전망대를 올라가면 백록담을 뒤로 두른 철쭉 군락이 보인다.
철쭉꽃이 있던 없던 한라산의 어딘들 아름답지 않겠는가.
윗세오름을 거쳐 만세 동산을 넘어 어리목으로
선작지왓의 전망대를 지나 윗세오름으로 가는 길을 걷다 보면 오른편으로 노루샘을 만날 수 있다. 여기서 한라산 물 한 모금으로 목을 축이고 윗세오름으로 향한다. 병풍바위 근처에서 구름에 잠시 갇혔던 것과 달리 선작지왓부터는 비교적 화창한 날씨가 계속되었다.
윗세오름 대피소의 매점은 홈페이지에서 확인한 대로 폐쇄되어 있었다. 우리 일행은 그 정보를 미리 확인해서 알고 있었고, 중간중간 쉬면서 열심히 가져온 간식을 먹었기 때문에 그다지 아쉽지는 않았지만, 매점 폐쇄 정보를 모르고 산을 오른 사람들에게는 낭패였을 것이다. 우리도 그런 분을 한 분 만나게 되었다. 나이 드신 남자분이었는데, 매점의 라면만 믿고 전혀 간식을 가지고 오지 않으신 것이다. 마침내 우리 배낭에는 넉넉한 간식이 들어있어 함께 나눠드렸다.
사실, 내가 간식을 넉넉하게 가져온 이유는 따로 있었다. 혹시라도 조난을 당하게 되면 비상식량이 필요할 것 같아서 초콜릿 묻은 비스킷이며 과일이며 물 따위를 넉넉하게 가져왔던 것이다. (등산로를 벗어나지 않는 한 그럴 일은 없지만, 세상일을 어찌 알겠는가. 나이가 들면 기우라는 게 자꾸 생긴다.) 그거 짊어지고 산을 올라오느라 내 어깨만 힘들었지. 그리고 이제 조난당할 일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 가지고 온 간식을 그분에게 아낌없이 나눠 드렸다. 그리고, 그분은 남벽 분기점으로, 우리는 남벽까지 다녀올 자신이 없어서 바로 어리목으로 하산을 시작했다.
윗세오름 대피소 입구. 파란 하늘 아래 선명한 붉은 깃발이 우릴 반긴다.
따가운 유월 햇살을 피해 휴식을 취하느라 대피소 그늘마다 등산객들이 누워있었다.
윗세오름에서 어리목으로 내려가다 보면 다시 넓은 평원을 만나게 된다. 만세 동산이란 곳이다. 우리는 만세 동산에서 철쭉을 심는 분들을 멀리서 만나게 되었다. 사실 나는 영실코스 철쭉이 야생인 줄만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분들 작업하는 모습을 보면서 이 많은 철쭉들이 세심하게 관리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만세동산을 내려가다 보면 모노레일 철로를 볼 수 있는데, 아마도 그것을 타고 한라산을 오르내리면서 철쭉을 돌보고 심는 등 관리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오른쪽 사진을 보면 멀리 길 가운데 일하시는 분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어리목으로 내려가는 길은 영실로 내려가는 길보다 길다. 그래서인지 등산객들이 많지 않고 한적했다.
왼쪽. 길을 가다 돌아보면 여전히 나를 지켜보고 있는 백록담. /오른쪽, 어릿목 가는 길.
좌. 만세동산도 철쭉이 지천이다. / 우. 모노레일
어리목으로 내려오는 길은 멀고 지루했다. 평소에 오른쪽 무릎이 안 좋았는데 오랫동안 걸었더니 아니나 다를까, 소식이 오기 시작했다. 무릎 통증 때문에 중간중간 쉬다가 걷다가를 반복하길 수 번. 드디어 어리목 안내소로 내려올 수 있었다.
어리목 주차장에서 산으로 오르는 출입구에는 출입 금지를 표시하는 줄이 드리워져 있었다. 영실코스는 물론 이곳 어리목 역시 일정 시간 이후에는 입산이 금지된다.
한라산의 기후는 변화무쌍하다. 때문에 등산할 때는 주의사항이나 홈페이지 공지사항을 꼼꼼하게 챙겨보고, 하지 말라는 일, 가지 말라는 곳에는 절대 가지 않는 것이 행복한 산행의 지름길일 것이다.
사족
숙소로 돌아오는 길. 우리는 다시 택시를 타기로 했다. 사무실 앞쪽에 두 대의 택시가 대기 중이었으나 미터기가 아닌 가격 흥정을 하는 택시였다. 게다가 택시비를 제법 많이 불렀다. 바로 뒤편 사무실 벽에는 미터기로 운행한다는 표지판이 버젓이 붙어있었으나 택시 기사는 당당하게 고가의 택시비를 부르는 것이었다.
우리는 택시 앱을 쓰기로 했다. 택시 앱으로 승차가 안되면 조금 피곤하긴 하지만 그냥 버스를 타기로 했다. 표지판 아래에서 버젓이 가격을 흥정하는 제주시 택시. 괘씸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우리의 콜에 바로 응한 택시가 있었다. 그것도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우리가 타게 된 택시 기사는 어리목 주차장에서 죽치고 않아서 관광객들을 상대로 호객하는 택시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다. 그들 때문에 제주도 택시들이 욕을 먹는다고 하면서. 어찌 되었건 그분 덕분에 숙소까지 잘 돌아올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