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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경희 Jan 11. 2019

578분의 300

소금산 출렁다리에서 입장료만 내고 돌아온 이야기

출렁다리를 찾아서

어디서 봤는지, 읽었는지 기억은 나지 않는데, 원주 소금산에 출렁다리가 새로운 관광명소가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들의 자취방을 정리하게 되어 원주 갔던 날, 돌아오는 길에 소금산 출렁다리를 가보기로 했다. 소금산 출렁다리는 원주 간현 관광단지 안에 있었다. 때는 삭풍이 몰아치는 일월, 시간은 어느덧 세시를 향해 가고 있었다. 소금산 출렁다리로 향하는 섬강은 겨울 한파로 꽁꽁 얼어 있었다. 하지만, 겨울이고 평일이라 사람이 별로 없을 것이라는 내 예상과 달리 주차장에는 차들로 제법 차 있었다. 

입구에서 3000원을 주고 티켓을 구입하니 2000원의 지역 상품권과 티켓 역할을 하는 팔찌 하나를 준다. 상품권은 아무 매장에서든 사용할 수 있으니, 결과적으로 입장료는 1000원인 셈이다. 매표소 직원은 이 종이 팔찌를 꼭 왼손에 차라고 신신당부를 하는데, 그 이유는 소금산을 올라가서야 알게 된다.  

섬강의 풍경.
올라가는 길의 목조데크와 중간에서 내려다본 섬강의 풍경


너희가 분수를 아느냐

나는 태생적으로 게으른 사람이다. 나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내가 굉장히 잘 돌아다니는 활동적인 사람으로 오해들 하는데, 실은 나는 게으르고 방콕을 무지 좋아한다. 누군가 끌어내 주지 않으면 때로 사흘씩 대문 밖을 안 나갈 때도 있다! 게으른 나는 등산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적당하게 올라가는 시늉만 하곤 산 아래에서 부침개를 먹는 것을 더 좋아한다. 나는 땀을 흘려야 하는 운동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글로 써놓고 보니 좀 부끄럽다.) 소금산 출렁다리는 출렁다리니까 아마도 산 꼭대기에 있을 것이다. 등산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나지만 오늘은 특별히 마음먹고 왔으니 산 꼭대기까지 올라가서 출렁다리를 꼭 보고 가야겠다.


출렁다리 올라가는 길은 두 가지라고 안내가 되어 있다. 하나는 등산로이고, 다른 하나는 목조 데크다. 당연히 등산로는 좀 더 오래 걸린다. 게으른 나는 당연히 목조데크를 선택했다! 주차장 식당에서 만난 아지매 이야기로는 다녀오는데 한 시간 정도 걸린다고 했으나 나는 인천으로 돌아가야 했기 때문에 발걸음을 서둘렀다. 고속도로가 막히기 전에 출발해야 한다. 


생각보다 산이 가파르다. 씩씩대고 한참을 오르다 보니 문득 데크에 붙여진 숫자판이 보인다. 100m? 무슨 뜻일까? 아, 총 300m 중 이제 100m를 올라왔다는 뜻이란다. 원주시 관광과 직원들은 참 친절도 하다. 덕분에 게으른 나는 살짝 절망해본다. 

'이제 겨우 100m를 왔다고? 그럼 아직도 200m를 더 올라가야 한단 말이지?' 

나는 얼마나 남았는지 아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걸음을 서두른다. 그런데 이번에는 다른 표지판이 내 눈에 들어왔다. 300/578. 숫자가 쓰여있는 표지판이다. 원래 게으른 사람들은 질문이 별로 없다. 나는 숫자만 흘낏 읽고 걸음을 서두른다. 그런데, 내 앞을 올라가던 부부의 대화가 그만 내 귀로 들어왔다. 

"와, 계단 진짜 많다. 이 데크 계단이 전부 몇 개야?"

"578개래." 

"어떻게 알아?"

"거기 쓰여있잖아."

578? 어딘가 익숙한 숫자. 조금 전 무심결에 읽었던 숫자가 바로 데크 계단의 숫자였던 것이다! 나는 조금 더 절망해본다. 아까 300을 지났으니 몇 개가 남은 거야? 수학은 잘하나 산수를 잘 못하는 내가 복잡하게 계산해본다. 숨을 헐떡이면서 계산을 하니 더 더디다. 300? 그럼, 278개 남았다는 건가? 그때 눈앞에 들어오는 숫자. 578분의 430. 그럼 이제 148개 남았네.

갑자기 수능 감독 나갔던 때가 떠올랐다. 수능 감독을 나가게 되면 하루 전 감독관 연수라는 것을 하게 된다. 보통 두 시간 이상 걸리는 긴 연수인데, 내용은 수능 감독 요령과 함께 감독관이 꼭 지켜야 할 수많은 주의사항들이다. 예를 들면 예민한 수험생들을 위해 소리 나지 않는 밑창의 신발 착용, 바스락 거리지 않는 재질에 눈에 띄지 않는 색의 옷을 입을 것과 같은 사소한 것에서 감독 위치까지, 수험생들이 그날 최선의 컨디션을 유지할 수 있도록 감독교사가 지켜야 하는 주의사항들이다. 이렇게 신경을 곤두세우고 감독에 들어가도 자신의 책상 옆에 서 있지 말고 다른 데를 가라거나(감독관 위치는 정해져 있어 마음대로 바꾸지 못한다.) 신경 쓰이니 움직이지 말라는 민원을 받기도 한다. 하지만, 가장 힘든 것은 정해진 위치에 꼼짝하지 않고 80분에서 120분 안팎의 시간을 견뎌야 하는 일이다. 이 긴 시간의 감독이 세 시간이다. 긴장감 속에서 하루 종일 감독을 하고 나면 거의 탈진상태가 된다. 평생을 좌우하는 중요한 시험이니 시험을 보는 학생들도 힘들지만 교사들에게 이 시간은 참으로 지루하고 고단한 시간이다. 


나는 수능 감독을 하고 나면 어김없이 그날 밤은 끙끙 앓는다. 대학교 다닐 때 얻은 허리디스크가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이다. 다들 힘들어하는 수능 감독이니 경미한 허리 디스크 정도로는 빠지겠다고 하기 어려워 그냥 힘껏 견디고 앓을 수밖에.(십 수년을 이렇게 감독해왔는데 아무도 관심이 없더니 작년에는 웬일로 뉴스거리가 되어 이건 뭐지? 했던 기억이 갑자기 떠오른다.) 


이 긴 시간을 견디기 위한 나만의 비법은 바로 시계를 안 보는 것이다. 시계를 보게 되면 자꾸만 지금 몇 분 남았지, 지금은 또 몇 분 남았지 하고 남아있는 감독 시간을 계산하게 되고, 그러면 시간이 더 안 가는 것 같았다. 그래서 아예 시계를 안 보는 것을 택했는데, 신기하게도 아예 시계를 안 보면 어느새 '오분 남았네'가 되는 것이다.     

소금산 출렁다리로 가는 길, 데크에 새겨진 이 말도 안 되는 분수는 나에게 수능 감독의 남은 시간을 떠올리게 했다. 

'아아, 이제 130계단 남았네, 이제 120계단 남았네, 아, 이제 110계단 남았네....'

원주시가 원망스러웠다. 이런 유용한(?) 정보를 알려준 그 부부도 원망스러웠다. 그 정보를 엿들은 내 귀도 원망스러웠다. 

나는 어쩌자고 분수도 모르고 남의 대화를 들었던 것일까? 몰랐으면 수능 감독하듯이 아무 생각 안 하고 무작정 올라갔을 텐데. 남은 계단 수를 세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이 사건(?)에서 내가 배워야 할 교훈은 없나? 그래, 바로 이거야. 어쩌면 사람 사는 일도 이것과 똑같지 않나?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 모르니까, 내가 지금 어디 있는지 모르니까 열심히 살 수 있는 거야. 

나는 앞뒤 맥락도 없고 말도 안 되는 오만 가지 상상과 생각과 남은 계단의 수를 셈하면서 올라갔다.

어쨌든 올라왔다.

산수를 열심히 하면서 마지막 데크를 올라간 결과 드디어 왼쪽 팔목의 티켓 팔찌를 스캔할 수 있는 출입구를 만날 수 있었다. 안내 데스크 직원이 강조했던 '왼쪽'팔목에 팔찌를 차야 했던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었다. 출입구 스캔 장치가 왼쪽에 있었던 것이다! 출입구를 지나가면 넓은 데크가 나온다. 그리고 다시 몇 개의 계단을 올라가면 드디어 출렁다리가 우리를 맞는다. 

출렁다리는 생각보다 길었고, 출렁다리 아래 계곡은 생각보다 깊었다. 출렁다리의 바닥은 그물처럼 생겨서 아래가 훤히 내려다보였다. 까마득히 내려다보이는 계곡 위 허공에 내가 서 있었다. 


주머니에 미니 사진기와 핸드폰을 넣었다. 행여 계곡 아래로 빠트릴세라 주머니에 달린 지퍼도 꼭꼭 채웠다. 아, 그런데 이를 어쩌나. 나는 출렁다리를 건너갈 수 없었다. 나는 높은 곳을 무서워하는 진짜 겁이 많은 아지매였다! 게다가 건너가면 다시 돌아와야 했다. 이 출렁다리로! 다시 돌아와야 한다고!!!! 

결국 나는 다리를 건너는 것을 포기하고 말았다. 대신 팔목에 감아두었던 팔찌 사진을 찍었다. 이 팔찌 사진은 다리를 건너가지 못했던, 그래서 다리 한가운데서 셀카를 찍을 수도 없었던, 겁 많은 '나'님의 출렁다리 방문을 증명하는 증명사진인 것이다. 



얼음 계곡

목적지에 도착했다고 해도, 내가 그곳에서 남들처럼 즐기지 못했다고 해도 절망할 것은 없다. 어차피 인생이란 게 뜻대로 되는 일이 몇 개나 있었던가,라고 스스로를 위로하면서 출렁다리 대신 섬강의 얼음 낀 풍경을 즐기기로 했다. 얼음 아래로 제법 깊어 보이는 시퍼런 강물이 비쳤다. 얼음은 쩍쩍 금이 가있는데, 제 스스로 만들어낸 선인지 누군가 돌을 던져 만들어낸 선인지, 참으로 아름다운 얼음 계곡 풍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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