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3-16일, 전교조 인천지부가 주최하고 제주 다크투어리즘이 안내한 4.3 유적지 답사여행에 참여하였습니다. 이 글은 첫날 들렀던 평화공원에 대한 기록입니다.
제주도를 향해
제주도 4.3 역사 기행 참여를 결정하고 난 후 한동안 마음이 무거웠다. 가볍게 휴가지로 방문하던 장소를 국가 권력에 의한 학살과 인권유린의 현장으로 방문해야 한다는 것이 나를 무겁게 짓눌렀다. 언제부터였을 까. 무거운 이야기들을 듣는 것이 힘들어지기 시작한 것이.
2박 3일의 짧은 일정인지라, 배낭 하나로 가볍게 짐을 꾸리고 집을 나서면서, 실상은 내가 4.3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대학시절 귀동냥으로 들은 몇 가지 진실, 시위대들이 목청껏 부르던 민중가요 몇 구절, 간간히 신문기사를 통해 접한 소식들, 대통령의 사과, 특별법 제정, 4.3과 관련된 이념 논란, 기념식장에서의 몇 가지 에피소드. 단순한 숫자인지, 역사적 사실인지조차 정의 내리기 어려운 단어로 4.3은 내 주위를 떠돌고 있었다.
사진을 찍지 않으리라 결심했다. 4.3이 역사적 평가가 끝난 과거의 사건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민주정부가 탄생하고, 다시 보수정권을 거쳐 촛불 정부가 들어서기까지 70년이란 긴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사건에 가벼운 마음으로 카메라를 들이댈 수 없었다.
사진 찍기를 좋아하는 내가 사진을 찍지 않겠다고 결심했던 장소는 이전에도 있다. 폴란드 크라쿠프에 있는 아우슈비츠 수용소 방문할 때였다. 제주도 4.3 답사는 아우슈비츠를 방문할 당시 느꼈던 나의 감정을 다시 불러 들었다. 나는 4.3과 관련된 것은 그 어떤 것도 찍지 않겠다고 굳게 결심했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작은 똑딱이 카메라를 가방에 집어넣었다. 만일 내가 이 카메라를 사용하게 된다면 그것은 정말 내 마음을 움직이는 어떤 대상을 만났다는 뜻이 될 것이다.
제주시 봉개동 237-2, 4.3 평화공원
늦은 비행기로 도착하여 첫 밤을 보내고 난 아침 9시, 제주에는 비가 오고 있었다.
답사의 첫 방문지는 4.3 평화공원. 전체 규모는 20만 제곱미터 정도라고 하니, 상당히 방대한 규모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제일 먼저 기념관으로 향했다.
솔직하게 이야기하자면, 답사의 첫 방문지인 4.3 기념관에 대해서는 큰 기대가 없었다. 그간 크고 작은 기념공원이나 기념관들을 방문했을 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감동을 받은 적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많이 달라졌으리라고 생각하는데, 나는 역사와 관련된 기념관을 방문하고 감동을 받은 기억이 거의 없다. 어린아이들이 있는 가정이면 의례 한 번쯤 방문하는 독립기념관, 서대문 역사 형무소도 방문한 적이 있으나 마음으로부터 감동을 받지는 않았던 것 같다. 이 글을 쓰면서, 독립기념관 누리집을 찾아보았다. 우리 아이가 어렸을 때 방문했던 당시와 콘텐츠들이 어떻게 달라졌을까. 짐작대로 당시와 달리 다양한 콘텐츠들이 많이 생긴 것 같았다. 내가 방문했던 시기는 독립기념관이 생긴 지 몇 해 되지 않았을 때로, 전시물 주는 생경함에 놀라 되돌아왔던 기억이 있다.
서대문 역사 형무소는 불과 삼 년 전에 방문했었는데, 일부 전시물에서 비슷한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남아있다. 특히 나를 힘들게 한 전시물들은 당시의 고문 장면 재현해 놓은, 선혈 낭자한 실물 크기의 인형들이었다. 그때, 독립 열사들의 투쟁을 전하는데 꼭 이런 방식밖에 없었나 하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제주 4.3 평화공원에 대한 나의 기대는 딱 이런 정도였던 것 같다. 답사의 첫 문을 여는 장소이기 때문에 역사적 배경, 진실, 진행 과정 전반에 대한 개략적인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장소. 그런데, 평화공원의 기념관의 제1관을 들어서면서, 나는 가방 속 깊이 넣어둔 카메라를 끄집어냈다.
제1관은 홈페이지에 '역사의 동굴'이라는 부제를 붙여놓은 데서도 알 수 있듯이 총 6개의 전시관을 관람하기 위한 입구의 성격을 갖는다. 이 방의 입구에는 제주도 화산 동굴을 연상시키는 용암 바위를 재현해놓았는데, 이 통로에 들어서자 나는 4.3 당시 제주민들이 피란 갔던 중산간의 굴 안으로 들어가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분들이 피란 갔던 용암동굴은 이보다 작고 척박한 곳이었겠지만, 굴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상상할 수 있었다. 이 곳 평화기념관이 4.3을 기억하는 방식은 여타의 기념관과는 다를지도 모른다. 나는 이 공간을 여타의 다른 기념관을 방문했을 때와 다른, 좀 더 경건한 마음으로 경험할 마음이 생겨났다. 그리고, 이런 마음이라면 카메라를 꺼내도 될 것 같았다.
다큐와 예술 사이
역사를 주제로 한 기념관은 어떤 방식으로 만들어야 할까. 아이 어릴 적 들렀던 보았던 독립지사들의 고문 장면은 왜 나에게 독립의 소중함을 깨닫는 순간이 되거나 열사들의 고통과 희생에 대해 감사하는 기억으로 남아있지 않는 것일까. 곰곰 생각해보니, 직접적으로 고문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상상의 힘을 믿지 않는 전시방법이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반 인륜적 고문과 비명, 낭자한 선혈을 보여줄 것인가 말 것인가의 문제가 아니라 이를 통해 지나간 역사와 시대를 상상할 수 있는 힘을 줄 수 있는가의 문제일 것 같다. 예를 들어, 서대문 형무소에서는 열사들이 갇혔던 좁은 감옥에 들어갈 수 있었는데, 당시 함께 간 학생들은 독립투사들이 얼마나 열악한 환경에서 고통을 받으며 죽어갔는지를 알 수 있었다고 했다. 이렇듯 공간 그 자체 만으로도 충분히 지나간 과거의 시간을 상상할 수 있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기념관이 해야 할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제주 4.3 평화공원과 기념관에 대한 생각은 각자마다 다르겠지만, 나는 이 기념관이 지난 70년의 시간에 대해 상상할 수 있는 시간을 주었노라고 생각한다.
제1관의 동굴 입구를 들어서면 둥근 원형의 벽으로 둘러싸인 공간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마치 커다란 굴뚝 같이 생긴 방의 천정으로부터 외부의 빛이 쏟아지는데, 방 가운데에는 비문이 새겨지지 않은 회색빛 도는 백비가 누워있다. 세상의 빛이 이 방으로 들어오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백비가 용암동굴 안에서 바깥세상을 바라보고 있는 것일까. 백비가 누워있는 이유는 4.3 진상규명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천연 돌을 깎아 만든 백비 상단에는 마치 제주도 동쪽 부분 지도처럼 보이는 흔적이 있어서 안내해주신 민중가수 최상돈 님에게 넌지시 물어봤더니, 천연의 돌을 깎았기 때문에 의도적인 무늬가 아니라고 한다. 이 백비가 일어서는 날이 빨리 오기를 바라며 잠시 묵념을 드려본다.
예술적 상상력으로 돌아보게 하다
4.3 기념관은 총 6개의 관과 한 개의 특별관이 있다. 위에서 이야기한 제1관 역사의 동굴, 제2관 흔들리는 섬, 제3관 바람 타는 섬, 제4관 불타는 섬, 제5관 흐르는 섬, 제6관 새로운 시작, 그리고, 특별전시관 다랑쉬 굴이다. 1관은 4.3을 기리는 백비, 2 관부터 5관은 4.3의 진행 과정을 보여주고, 6관은 미래를 바라보며 4.3을 어떻게 정리해가고 있는가에 대한 내용이다. 각각의 관은 나름의 특징을 보여주는데, 특이한 점은 예술가들의 참여가 두드러진다는 점이 여타의 역사기념관과 다른 점이다. 그래서, 각 관을 돌아보면서 4.3의 진행과정에 대한 객관적인 정보와 함께 예술가들의 해석을 함께 보여주고 있고, 객관적인 정보 역시 생경한 표현보다는 정제된 표현을 보여주고 있다. 당시 희생자들의 선혈이 흐르는 인형이 없는 것 또한 주목할 만하다. 대신, 당시 주둔 미군들이 찍은 무성영화를 비롯한 영상자료와 각종 문서들의 방대한 자료를 정리해서 전시하고, 국제, 국내 정치 상황에 근거한 자료들을 통해 4.3이 단순한 지역의 문제가 아니라 국제 관계 속에서 일어난 사건임을 보여준다. 또, 사람에 대한 따뜻한 시각도 함께 담아가고 있다. 군인, 경찰, 희생자들의 다양한 모습을 통해 4.3이 차가운 역사적 서술에만 머무르지 않고, 개개의 따뜻한 숨결과 삶이 있는 살아있는 사람들의 삶에 대한 이야기임을 말하고 있다.
가장 가슴 아팠던 방은 다랑쉬 굴을 전시한 특별전시관이었다.
1948년, 11명의 민간인이 토벌대에 의해 질식사한 동굴 현장을 발굴 당시 그대로 재현하였다. 긴박했던 피난생활과 당시의 학살 현장을 느낄 수 있는 공간이다. 동굴의 가운데를 절개하여 드러내 놓은 연출로 만나는 내부는 당시의 상황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다.(홈페이지 설명글)
역사를 공간에 재현하는 데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을 것이다. 어떤 경우는 피해자의 입장에서 고통을 '고통스럽게'드러낼 수 있다. 또 어떤 경우는 담담하게 당시 상황을 그대로 드러냄으로써 객관적인 입장을 유지하기도 하는데, 나는 다랑쉬 굴의 연출 방식이 그러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가장 차가운 방식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 고통이 가장 잘 전달되었던 것 같다.
제주도 출신으로 4.3을 주제로 오랫동안 그림을 그려온 강요배 화백의 그림, 제주도 오름을 상징하는 설치 작품, 제주 민예총 작가들의 석고 붕대를 이용한 대형 부조'죽음의 섬' 아트워크, 박불똥 작가의 설치 작업, 그밖에 애니메이션과 미디어아트 작가들의 다양한 예술작품을 통해 예술이 제주 4.3을 어떻게 해석하고 재현하고 있는가를 볼 수 있었다.
이 중 '죽음의 섬' 아트워크는 예술가들의 부조로 가득 찬 작은 방에 설치되어 있다. 희생에서 유해발굴까지의 여러 과정을 보여주고 있는데, 벽 아래에는 당시 희생자들의 신발과 같은 유물도 함께 전시되어 사건에 대한 분노를 일으킨다.
또 미디어 아티스트들의 작품도 설치되어 상영되고 있다. 각 작품은 3분 안팎의 작품으로, 만일 시간이 허락된다면 각 작품을 천천히 보기를 권한다. 나의 경우, 답사 일행이 있었기 때문에 짧게 감상하고 이동해야 해서 다소 아쉬웠다.
박불똥 작가의 설치작품 '행방불명'은 벽면에 설치된 작품이다. 철판에 뚫린 구명은 행방불명된 3,000명의 피해자들을, 구멍에 꿰어진 철선들은 가해자의 총구를 떠나 피해자의 몸에 박힌 총알의 궤적을 상징한다고 한다. 현대미술이 다소 난해하기는 하나 작품에 붙여진 설명글을 읽으면서 천천히 이동하다 보면 제주 4.3의 진실에 조금 더 다가갈 수 있으리라고 생각된다.
6관은 4.3이 현재 진행형이라는 점으로 미루어 볼 때 각 전시관들 중 앞으로 가장 많은 변화를 겪게 될 전시관이라고 생각한다. 설치된 영상에서 돌아가신 노무현 대통령의 연설 장면을 보게 된 점도 가슴 아팠다. 이곳을 마지막으로 로비로 나가게 되는데, 로비로 가는 길목은 피해자들의 영정사진들이 붙어있다. 그분들의 얼굴 속을 빠져나오면서 마음의 빚이 생긴 것 같아 가슴이 묵직했다.
희생자 14,232명, 행방불명자 3895명
우리가 방문한 날, 상생 해원굿이 예정되어 있었다. 기념관 출구를 나서자 공원 길을 따라 검고 흰 깃발을 단 대나무가 설치되어 나부끼고 있었다. 흰색은 삶을, 검은색을 죽음을 상징한다고 한다. 잠시 비가 갠 하늘에 불길한 비구름이 이리저리 몰려다니는데, 대나무 끝에 걸린 깃발은 쉼 없이 펄럭거렸다.
기념관 바로 뒤의 시간의 길을 따라 걷자 거대한 무덤군이 우리를 맞았다. 시신을 찾을 수 없는 행방불명되신 분들의 표석이다. 당시 빨갱이로 몰린 제주도민들을 수용할 감옥이 부족하여 인천으로, 서울로, 전국 각지의 교도소에 분산, 수용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6.25 전쟁이 터지자 이들은 고향땅을 밟아보지도 못한 채 사라져 간다. 시신을 찾지 못한 후손들은 그 지역 교도소의 흙을 한 줌 가져다 헛묘를 쓰기도 했다니, 그야말로 야만의 시절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행방불명자의 묘비 옆으로 위령제단이 있다. 위령제단은 희생자 14,232명 중 14,1147명의 위패가 모셔져 있는 곳이다. 위패는 동네별로 분류되어있는데, 한 동네에서 동시에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어 같은 성씨의 이름이 나란히 새겨져 있었고, 심지어 아무개 씨의 1녀, 1남과 같이 아직 이름조차 갖지 못한 어린아이들의 위패까지 있었다. 위령제단 앞은 여러 가지 물품들이 어지러이 널려 있었는데, 원래 이 곳에서 상생 해원굿을 열기로 했으나 비가 오는 바람에 다른 곳에서 굿을 진행하고 있다고 했다.
3.895기의 방대한 양의 표석들과 위령제단의 위패들은 나에게 작년 폴란드 여행에서 만났던 한 장소를 떠올리게 했다. 그곳은 나치의 인류 학살 현장 현장인 아우슈비츠(폴란드어로 오슈비엥침)이다.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방문한 날은 화창한 여름날이었다. 하지만, 역사의 무게가 주는 중압감 탓인지, 나도, 동행한 언니도 화창한 날씨를 즐길 수 없었다. 그곳 수용소는 가감 없이 객관적 사실만을 전달하고 있었는데, 당시 수용소 건물을 원형 그대로 복원하여 유지한 것도 인상적이었거니와 수용자들의 열악한 생활상을 그대로 보여주는 생활 집기를 보존하고 있는 것도 인상적이었다. 그런데, 당시 나에게 가장 큰 충격을 주었던 곳은 바로 희생자들의 소지품 보관소였다. 나치는 수용소에 수감된 사람들의 소지품을 모두 압수하여 종류별, 소재별로 분류했고, 그들이 필요한 곳에 재활용하였다. 그들의 수집품에는 안경, 치아, 옷, 가방, 허리띠 등 사람이 사용하는 모든 물건이 포함되었다. 심지어 나치는 희생자들의 머리를 모두 밀었고, 그들의 머리카락까지 모았다. 그들은 그 머리털로 카펫을 짜는 등 인간의 상상으로는 미치지 않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리고, 그곳에는 희생자들의 안경을, 옷을, 머리털을 전시해놓은 방이 있었던 것이다.
방안 가득 쌓여있는 희생자들의 머리카락을 상상해보라. 또, 안경을 상상해보라. 희생자들의 머리카락, 안경은 산을 이루었다. 그러니, 이를 통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는지를 어찌 상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어떤 설치 미술이 이보다 더 강력하게 나치가 저지른 인류에 대한 범죄를 웅변할 수 있까. 어떤 설명이 이보다 더 처절하게 그들의 만행을 고발할 수 있을 것인가. 나는 이 글을 쓰는 지금도 그때를 떠올리면서 가슴 떨리는 것을 느낀다. 그리고, 행불자들의 표석을, 위패를 보면서 그때와 비슷한 분노의 감정을 느꼈다. 방대한 양의 행방불명자들의 표석은 아우슈비츠 희생자들의 소지품과 마찬가지로 침묵으로 제주의 고통을 토해내고 있었다.
봉안관 앞을 지나 주차장으로 오는 길에 설치된 조형물 <비설>은 관심을 갖지 않으면 지나치기 쉽다. 행불자의 표지석과 위패가 4.3의 피해를 객관적인 정보로 보여준다면 <비설>은 자식을 보호하고자 온 몸을 던진 어미의 모습으로 방문객들의 가슴을 잔잔하게 적셔준다. 나선 모양의 돌담을 따라 내부로 들어가면 바닥은 조금씩 낮아지고, 중앙에 이르면 흰색 대리석으로 표현된 흰 눈 위에 아기를 껴안고 무릎 꿇고 있는 한 어머니의 조형물에 이르게 된다. 돌 담 벽에는 제주 방언의 자장가가 새겨진 판이 붙여져 있어 애끓는 모성을 더욱 안타깝게 느끼게 해준다. 이 조형물은 실제 사건을 모티브로 만든 것으로, 현재의 위치 근처에서 희생된 모녀의 모습이라고 한다. 흰 대리석 위에 찍힌 선명한 발자국은 그날의 비극적인 상황을 여실히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