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그리트, 마가렛, 마그넷

나이 들어가는 것을 느낄 때

by 김경희

우리는 언제 나이 들어가는 것을 느낄까? 가까운 것이 잘 안 보이기 시작하는 노안이 시작되었을 때? 오래 걷거나 서있는 것이 슬슬 힘들어지기 시작할 때? 감정이 요동치는 갱년기를 처음 자각했을 때? 이 모두가 노화의 진행을 알리는 징조이기는 하지만, 나의 경우 뻔히 아는 단어가 말이 되어 나오지 않았을 때 처음으로 '아, 내가 나이 들어가고 있구나.' 느꼈던 것 같다. 왜, 그럴 때 있지 않는가? 머릿속에서는 분명히 '사과'를 생각하고 있었는데 입에서는 '배'가 튀어나오고, 사람의 이름이 기억나지 않아서 '있잖아, 걔'로 퉁치는 일 말이다. '있잖아, 걔, ' 한 마디로도 누구 이야기인지 이심전심으로 알아채면서도 결정적으로 그 이름이 생각나지 않아 '그러니까, 걔' 하면서 깔깔 웃기도 하고, '사과'를 생각하면서 '배'를 내뱉을 때도 서로 '사과'를 말하고 들었다고 생각하면서 대화를 이어가는 어처구니없는 상황도 벌어진다. 심지어 더 이상 웃음의 소재거리가 되거나 충격적이기는커녕 나이 들어가는 것이 나 혼자만은 아니다 싶어 서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기도 한다. 이제는 그럴 수도 있는 나이지, 하면서.


친근한 사이라면 서로가 무엇을 말하려고 했는지 금방 알아차리지만 낯선 이국 땅, 이방인이 되어 처음 만난 외국인 앞에서 이런 경우를 맞닥뜨리게 되면 얼마나 황당하고 당황스러울까? 이를 테면, 지난 7월 23일. 두 명의 후배들과 함께 떠난 유럽 여행, 어느 미술관 앞에서 일어났던 일처럼 말이다.


지난 7월 23일부터 8월 8일까지 필자는 친한 후배 두 명과 유럽 미술관 여행을 떠났다. 8월 2일, 우리는 벨기에 브뤼셀의 한 미술관 앞에 서 있었다. 벨기에의 대표적인 미술관으로는 벨기에왕립미술관과 벨기에 출신의 초현실주의 화가인 마그리트 미술관이 있다. 두 미술관은 한 건물에 나란히 있었고, 통로를 통해 다른 미술관으로 이동할 수 있다. 입장 티켓은 따로 구입할 수도 있는데, 만일 통합 티켓을 구입하면 입장료를 할인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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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그리트미술관 내부 풍경
마그리트 미술관과 왕립미술관 입장료는 각 10유로씩. 하지만 통합 티켓을 구입하면 15유로로 할인해준다.

우리는 세트로 구입한 티켓으로 왕립미술관을 먼저 관람하고 난 후 마그리트 미술관으로 이동하기 위해 연결 통로를 찾고 있었다. 그런데, 안내판이 애매하게 되어 있어서 연결 통로를 얼른 찾지 못했다. 마침 출입구에 있던 미술관 직원이 보였다. 내가 짧은 영어로 '마그리트 미술관 입구가 어디'인지 물어보려는 순간 화가의 이름이 생각이 떠오르지 않는 거다. 그 순간 머릿속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단어는 무엇이었을까? 바로 어렸을 때 좋아했던 과자 이름인 '마가렛'이었다. 순간, 이건 아니다, 마가렛을 입 밖으로 내뱉는 순간 나는 작가 이름도 모르고 미술관을 찾은 사람이 되는 거라는 생각이 동시에 떠올랐다. 나의 짧은 영어가 완전한 문장을 만들지 못하고 버벅거리고 있자 옆에 있던 후배가 마그리트 미술관을 찾고 있노라고 정확하게 이야기를 해줘서 다행히 위기를 모면했다. 그 자리를 벗어나 마그리트 미술관으로 향하면서 일행들에게 내가 왜 머뭇거렸는지를 이야기하려고 했는데, 이번에는 마그리트는 커녕 과자 이름인 마가렛도 떠오르지 않았고 뜬금없는 마그넷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에 툭 튀어나왔다. '마'자 하나 빼고는 공통점이라고는 하나도 없는데, 도대체 어떤 개연성을 가지고 떠오른 단어인지. 마그리트, 마가렛, 마그넷.... 이야기를 들은 후배가 왜 마아가린은 빼먹었느냐고 해서 한참을 웃었다.

르네 마그리트는 벨기에 출신의 유명한 초현실주의 예술가다. 빛의 제국 1954

나이 든 사람이 되는 일은 두려움을 동반한다. 나이 든 사람을 혐오의 눈으로 보기도 하는 사회현상이 그런 두려움에 한몫을 하는 것 같기도 하다. 무엇보다 젊음의 상실을 경험하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달리기가 버겁고 양손에 든 장바구니의 무게가 새삼스러워진다. 노안이 와서 가까운 것보다 적당히 먼 곳에 있는 것들이 더 잘 보이기도 하고, 어둠이 편안하고 익숙하게 느껴져 집의 불을 켜는 시간이 점차 늦어진다. 하지만 나이 들어가는 것이 젊음의 상실이라는 것에 완전하게 동의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어떤 종류의 상실도 상실 만을 의미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상실의 경험은 인간이 본질적으로 완벽할 수 없는 존재라는 점을 새삼 깨닫게 한다. 나는 무엇이든 자주 잊어버리고 실수가 잦아지는 나이 든 나를 젊은 시절의 나에게 했던 것 보다 좀 더 너그럽게 대한다. '그럴 수도 있지.' 하면서. 칼 같은 잣대로 나와 타인을 재단했던 젊은 시절의 나를 부끄럽게 돌아보기도 한다. 그리고 나처럼 실수가 잦거나 나와 같은 나이로 살아가고 있는 비슷한 또래의 사람들을 조금은 여유 있는 시선으로 바라보려고 노력한다. 나이가 좀 더 많아지면 지금 모르는 어떤 생각과 경험이 나를 맞이할까? 나이 든다는 것은 젊음의 상실이 아니라 단지 새로운 경험 속으로 들어가는 것일 뿐일지도 모른다.


*르네 마그리트 미술관

르네 마그리트는 대표적인 초현실주의 화가다. 일평생 양복을 입고 사무실에 출근하듯 작업실에 출근한 매우 성실했던 작가로 알려져 있다. 매력적인 마그리트의 작품세계는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https://musee-magritte-museum.be/en

마그리트미술관 홈페이지 갈무리1.jpg 마그리트 미술관 홈페이지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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