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찬란한 순간은 언제인가요?

언니네 앨범에서 쏟아진 옛날 사진을 보며

by 김경희

엄마는 올해 구순이 되셨다. 엄마는 언니네와 함께 살고 계신다. 혼자 살고 계시던 엄마를 언니네가 모시게 된 지 십여 년이 되어가는데, 엄마의 인지능력이 조금씩 저하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주간보호센터를 다니고 계시는데, 엄마는 주간보호센터를 노인대학이라고 부르신다. 이른 아침부터 준비를 마치고 센터에서 오는 차를 기다리신다.

갑자기 엄마를 돌보게 된 언니는 엄마의 건강상태나 일정에 따라 일상을 제한받는 상황이 되었다. 얼마 전부터 우리 형제들은 당번을 정해 일요일이면 언니집을 방문해서 엄마 산책도 시켜드리고 목욕도 시켜드린다. 일요일 하루라도 언니가 마음 편히 쉴 수 있기를 바라고, 미약하나마 엄마 케어에 힘을 보탠다는 의미였다.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의 방문이 오히려 언니를 번거롭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걱정스럽긴 하지만 말이다.


내 차례였던 지난 10월 초 일요일이었다. 여느 때처럼 언니 집 현관을 열고 들어갔더니 언니가 거실 가득 옛날 사진을 펼쳐놓고 앉아 있었다.

"언니, 뭐 하고 있어?"

언니는 사진을 정리하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오랜만에 펼쳐놓은 앨범은 어마어마한 양을 자랑했다. 언니네 가족의 앨범만 해도 여러 권이었고, 살림을 합치면서 엄마의 오래된 앨범도 덩달아 언니네로 이사를 왔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이 방 저 방 책꽂이에, 옷장 구석에, 침대 아래에, 어딘가의 틈새마다 한 두 권씩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접착력이 떨어진 앨범에서 삐져나온 사진들은 세월의 직격탄을 맞아 누렇게 변색되어 있었고, 심지어 누구를 찍은 것인지 잘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바랜 것도 있었다. 사진을 찍었을 때는 진심을 다해 포즈를 취했겠지만 사진첩에 꽂은 이후 몇 번이나 펼쳐봤을까? 사실 특별한 일이 없다면 옛날 앨범을 들여다볼 일이 얼마나 있겠는가? 나 역시도 무수한 사진을 찍었건만 지난봄, 아들이 결혼식에 쓸 동영상을 만들기 위해 제 어릴 적 사진을 찾았을 때 말고는 사진첩을 열어 본 지가 언제인지 까마득하다.


나도 언니 옆에 앉아 하나하나 사진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흑백사진, 젊은 나이로 돌아가신 아버지의 사진, 귀여운 원색 옷을 입고 춤추는 조카들의 옛날 사진, 손끝에 만져질 것만 같은 통통한 볼을 가진 동생의 돌사진, 낯설기만 한 엄마의 젊은 모습, 심지어 월남(베트남)전에 참전하셨던 외삼촌의 젊은 시절 사진도 있었다. 사진을 보자 잊었던 옛 기억들이 툭툭 튀어나왔다.

엄마와 함께 찍은 동생의 돌사진

풋풋한 여고생이었던 언니가 흑백 코스모스를 배경으로 책가방을 들고 서있었다. 아마도 졸업 사진을 찍는 날이었거나 특별히 카메라를 빌려서 친구들과 외출한 날이었을 게다.

언젠가 어린이날, 젊은 아버지가 우리 자매를 데리고 사직공원에 소풍을 간 날 찍었던 사진도 있었다. 사진 속 어린 자매들은 다들 쭈쭈바를 하나씩 물고 있었다. 그 시절을 돌이켜 보면, 이 많은 자식들에게 쭈쭈바 하나와 공원 산책도 큰 마음을 내야 가능했던 어려운 살림이었을 것이다. 장남이었던 젊은 아버지는 얼마나 외롭고 버거우셨을까? 돌아가신 아버지보다 더 많은 나이가 되어 사진을 보니 아버지의 삶이 새삼 다가왔다.

(사진은 외삼촌의 젊은 시절 사진) 당시에는 필름 한 통 인화를 맡기면 이미지와 합성한 사진을 서비스로 인화해주기도 했다.

우리는 언제 사진을 찍을까? 핸드폰 카메라로 수시로 사진을 찍고 지우는 요즈음과 달리 불과 몇십 년 전만 해도 사진을 찍는 것은 대단한 행사였던 것 같다. 카메라를 가지고 있는 집도 드물었을뿐더러 인화 비용도 제법 비싸서 사진은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매체가 아니었다. 누가 되었건 슬프고 안타까운 순간을 기념하려고 사진을 찍는 사람은 없다. 소풍, 생일, 가족 행사, 졸업식이나 입학식 등, 당연히 즐겁고 행복한 순간을 기념하기 위해 사진을 찍었을 것이다. 귀한 카메라였고, 빛나고 아름다운 순간을 기념하기 위한 사진이었을 것이다. 언니의 앨범에서 쏟아진 사진들 역시 즐겁고 행복한 순간, 가장 빛나고 아름다워서 기록하고 싶은 순간을 담고 있었다.


언니는 꼭 필요하고 의미 있는 사진만을 남겨 새로 구입한 사진첩에 다시 정리할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덧붙이는 이야기가 언니의 가까운 친구들도 앨범을 정리하기 시작했다고도 했다. 앨범을 정리한다는 것은 삶의 전환기에 주변을 정리하고 노년의 삶을 새롭게 준비한다는 의미로 느껴졌다. 언니처럼 나도 사진첩 정리를 시작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 사진첩뿐이랴. 더 이상 입지 않는 유행이 지난 옷가지가 그득한 장롱, 쓰지 않는 그릇들로 어수선한 찬장도 떠올랐다. 언젠가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힘이 사라진 순간이 왔을 때 나의 장롱과 싱크대를 바라보는 낯선 누군가의 모습을 상상하자 조금 울적한 기분이 되었다. 사진첩에 더해 장롱과 싱크대도 정리해야겠구나.


정리를 마치고 나면 나의 사진첩과 장롱과 찬장에는 무엇이 남아 있을까? 아마도 여러 번 고민하여 선택한 특별히 소중한 것들이 남게 될 것이다. 누군가가 나의 사진첩을 펼치면서 '그런데, 이 중에서 당신에게 가장 찬란한 순간은 언제였나요?'라고 묻는다면 나는 어떤 대답을 할까? 과거의 빛나는 기억은 현재의 나에게는 물론 미래에도 살아가는 힘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그런 순간은 단 하나만 존재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또, 빛나는 순간이란 사진첩 속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삶이 지속되는 한 우리는 매 순간 최선을 다해 살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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