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첫 된장 도전기
운명의 날이 왔다.
드디어 메주를 건져 된장을 만드는 날이다.
오늘이 오기까지 사연이 많았다. 요즘 젊은 세대와는 또 다른 의미의 캥거루족이라 할 나. 어지간한 밑반찬은 그냥저냥 만들어 먹지만, 김장과 간장, 된장은 아직도 친정엄마의 손을 빌려야 한다. 그나마, 김장은 스스로 무수리를 자처하며 장보기, 양념 다듬고 썰기, 양념 비비고 김치 속 넣기 등 온갖 허드렛일을 거들면서 엄마와 언니의 김장에 숟가락을 올려 얼렁뚱땅 지나갈 수 있었다. 하지만, 된장, 간장은 온전히 엄마의 손을 빌리지 않으면 안 되는 실정. 그러면서도 염치는 있었는지, 올해는 나도 한번 담아봐야지, 하는 생각을 늘 해왔다. 하지만, 직장 생활하면서 시간과 마음을 내기가 쉽지 않아 해마다 어, 어, 하는 사이에 된장 담글 시기을 넘기곤 했다.
최근 친정엄마의 건강이 예전만 못해졌다. 이제 내가 된장을 담아 엄마에게 드려야 하는 때가 왔나 싶은 생각도 들고, 엄마가 건강하실 때 엄마의 된장 맛을 전수받아야 하는데 하는 생각도 들었다. 언니도 나와 같은 생각이었다. 우리는 엄마에게 ‘된장 자립’ 선언을 하기에 이르렀다.
메주는 고흥에서 농사지으며 된장을 만드는 친구에게 부탁하여 다섯 덩어리를 택배로 전해받았다. 그런데, 보통 정월장을 담아야 하는데, 어쩌다 보니 삼월이 훌쩍 넘어가버리지 않았는가. 친구는 자신들도 마지막 된장을 이미 담았다면서 서두르라고 하는데, 주말이 아니고는 시간이 나지를 않으니 발 동동 구르고 계시는 엄마에게 기다려달라고 사정할 수밖에.
‘엄마, 우리가 첨부터 해봐야 한당께!’
‘그깟 된장 담그는 게 뭐 어렵다고 이렇게 난리를 치냐. 메주에다가 소금물만 부어놨다가 나중에 메주 꺼내서 부수기만 하면 된디. 나가 물 부어 놀랑께 니는 난중에 메주 꺼낼 때나 와서 메주나 잔(좀) 꺼내서 부숴라.’
엄마가 대충 설명해주신 된장 담그기 순서는 이러했다.
먼저, 메주를 깨끗이 씻어 말린다.
깨끗한 물에 굵은소금을 녹여 가라앉힌다. 불순물이 많이 있기 때문에 오래 가라앉힐수록 깨끗한 소금물을 얻을 수 있다.
항아리에 메주를 켜켜이 넣고, 메주가 잠길 정도로 소금물을 붓는다.
깨끗한 숯을 띄운다.
시간이 지나 간장이 불그스름하게 만들어지면, 메주를 꺼낸다.
메주에 소금을 조금씩 넣어가면서 부드럽게 부숴 다른 항아리나 보관용기에 담는다.
남은 간장물은 달여서 항아리에 보관하고, 필요할 때마다 꺼내 먹는다.
드디어 주말, 된장 담그는 날이 돌아왔다. 일찍 서두른다고 서둘렀으나 친정에 도착해보니 어느덧 12시. 엄마는 언니와 내가 오기를 기다리지 못하고 이미 소금물을 만들어놓고 계셨다.
‘엄마, 내가 한다고 했잖아. 물통 들고 베란다까지 왔다 갔다 하면 힘들다고~~.’
‘니기들이 직장 다님서 더 힘든디. 나는 집에서 농께(노니까) 살살했다.’
양 무릎 모두 인공관절 수술을 하신 엄마는 무거운 것을 들면 안 되는데, 직장 다니는 젊은 딸 힘들다고 그새 소금물을 만들어놓고 기다리신 거였다.
된장 담그기에 자신이 없었던 나는 나름 비장의 무기를 준비해놓고 있었다. 올해야 엄마 손과 조언을 빌리겠지만, 언젠가는 나 혼자 된장을 담가야 하는 날이 올 터인데, 그때를 대비해서 소금의 염도를 수치화해서 볼 수 있는 기계, 바로 염도계를 준비해 갔던 것이다! 메주야 된장을 전문으로 만드는 친구네 메주를 사용하니 품질 보장일 것이고, 문제는 염도인데, 염도계만 있으면 문제없이 맛있는 된장이 만들어질 터! 그런데, 막상 택배로 받은 염도계를 열어보니 허술하기 짝이 없는 게 아닌가. 플라스틱 안에 눈금 그려진 종이 한 장이 달랑 들어 있는 거였다. 이거, 염도를 잴 수는 있는 건가? 좀 비싸더라도 디지털 염도계를 샀어야 했나, 오만 가지 생각이 들었다.
일단 엄마가 녹여놓은 소금물의 염도를 재보았다. 염도는 15.
‘엄마, 친구가 20으로 하라고 했는데 이거 15밖에 안 돼.’
‘아, 시끄러, 달걀 동동 띄워서 500원짜리 동전 하나만큼 나오면 돼야. 그런 거 없어도 된장만 맛있게 담갔구만. 할머니도 늘 그라고 했어야.’
아, 그렇구나. 엄마의 된장은 할머니의 비법을 전수받은 거였구나. 어린 나이에 시집와서 비로소 살림을 배우기 시작했으니, 할머니의 된장 맛이 엄마 된장 맛인 건 당연한데, 왜 그런 생각을 한 번도 안 해봤을까.
‘엄마, 그래도 날씨가 너무 더운디 좀 짜게 해야 하지 하는 거 아니여?’
엄마만 만나면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가 저절로 튀어나온다.
‘아, 니 맘대로 해. 된장 하나 담금서 뭘 그라고 수선을 피운디야.’
나는 소금을 가져다 풍덩풍덩 집어넣고 녹이기 시작했다. 소금이 밑도 끝도 없이 들어가는데 염도계는 요지부동. 어찌어찌하다 보니 간신히 18도가 되었다. 엄마가 띄우다 놓아둔 달걀을 물에 띄워보니 500원짜리가 아니라 500원짜리 두 개는 됨직하게 달걀이 둥실 떠오른다. 나는 슬그머니 겁이 나기 시작했다. 이러다 간장이 소태가 되면 어쩌나. 나는 결정을 내려야만 했다. 비겁한 결정이었다. 나는 염도 20도와 500원짜리 동전 사이에서 타협을 했던 것이다!
‘됐어, 엄마. 우리 마트 가자.’
소금물을 다시 휘저어 놓은 터라 바로 항아리에 붓지 못하고 가라앉기를 기다리는 동안 마트를 다녀오기로 했다.
마트에서 돌아와 친구의 메주를 항아리에 차곡차곡 담고, 녹여놓은 소금물을 부었다. 드디어 항아리 뚜껑이 닫혔다. 제발 제발 맛난 된장이 되어라.
1주일이 지났다.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야, 간장 위에 머가 슬어야. 머시 하얗게 끼었다. 메주 건져 부러야 쓰겄다.’
기상이변으로 예년보다 따뜻한 봄날이었다.
‘거 봐, 내가 소금 더 넣어야 한다고 그랬지!’
나는 큰 소리를 땅땅 쳤다. ‘과학의 힘을 믿었어야지'가 생략된 큰 소리였다.
‘아, 시끄럽고, 야, 너 올 때까지 못 기다리겄다. 그냥 건져 부러야겄다.’
‘엄마, 내가 가서 봐야제! 글고 일주일 만에 건져도 되나?’
‘아, 괜-찮-해~야. 벌써 색깔이 빨갛게 올라온다.’
‘글지 말고 엄마, 소금을 쪼까 더 치면 어찌까. 언니랑 나가 4월 초에 가께. 글고 엄마 혼자 어찌케 메주 꺼내고 간장 다리고 한다요. 엄마 힘든 디 하지 말고 기다려, 잉.’
‘알았어. 그라믄 나가 소금을 한주먹 올려놔 봐야 쓰겄다.’
하루 뒤, 엄마에게서 전화가 왔다.
‘야, 소금을 좀 더 넣었더니 위에 낀 것이 없어져 부렀어야.’
‘그래? 다행이네. 담 주에 나가 가께 같이 합시다, 엄마. 혼자 하지 말고.’
간장이....
메주를 소금물에 담근 지 어느덧 2주.
언니와 나는 다시 엄마 집으로 모였다. 엄마의 설명대로 간장 위에는 하얀 막이 얇게 끼어 있었다. 뜰 채로 조심조심 흰 막을 건져내고 메주를 꺼냈다.
‘이것이 된장이 된단 말이지.’
꺼낸 메주를 엄마가 준비해 놓은 대야에 내려놓았다.
‘할머니는 이래 갖고 메주 하나에 소금 두 주먹씩 넣었어야.’
주먹에 소금을 쥐고 보여주신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꺼낸 메주를 맛보니, 아, 짜다!
여기에 두 주먹씩 소금을 넣으면 얼마나 짜질까?
친구는 염도계로 20.3을 맞췄어도 싱겁다고 했는데, 뭐가 문제였을까?
염도계가 잘못되었을까? 하얗게 낀 막 때문에 더 넣은 소금이 문제였을까?
어른 말씀을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긴다고 하는데, 엄마 말씀을 잘 안 들은 내가 문제였을까?
엄마는 ‘괜찮다, 괜찮다,’ 하시며 날 안심시킨다.
‘싱거운 거시 문제제, 짠 것은 콩 삶아서 섞으면 됭께 괜찮해야.'
된장이 싱거우면 소금을 더 넣고, 짜면 콩을 삶아 넣어줘서 간을 맞춰주면 된다는 말씀이었다.
나는 손목이 안 좋은 언니 대신 콩콩콩 열심히 메주를 찧었다.
'그냥 메주만 찧으면 너무 되서(되직해서) 나중에는 다 말라부러야. 간장을 바가지로 퍼서 끼얹어 감시로 찧어야 써. 그래야 된장이 촉촉하니 맛나다.'
덩어리가 남지 않아야 하니 뒤적거리며 열심히 찧어야 했다. 거기다 간장물도 부어가면서 치댔기 때문에 옷에도 된장이 튀기 시작했다. 차를 가져와서 다행이지 전철로 돌아갔으면 옷에서 나는 간장 냄새 때문에 다른 사람들 눈총 깨나 받았을 것이다. 어깨도 제법 아팠다. 엄마는 메주가 그렇게 단단하지 않아서 찧는데 덜 힘들어 다행이라고 나를 위로하셨다.
다섯 덩어리를 다 찧고 나니 간만의 노동에 피곤이 몰려왔다. 하지만, 놀 수 없다. 이제 간장을 달여야 한다. 항아리의 간장을 작은 통에 담아 가스레인지에 올려 둔 커다란 들통에 옮겨 담았다. 양이 꽤 되는지라 끓는데도 제법 시간이 걸린다. 게다가 끓다가 넘치면 안 되니까 여러 번 나눠서 달여야 한다.
‘엄마, 이거 얼마나 끓여야 해?’
‘그거? 삼분의 일은 졸아야 돼. 아직 한 참 멀었어야.’
간장이 끓기를 기다리는데, 졸음이 왔다. 소파에 잠시 기대 눈을 감았는데 까무룩 잠이 들었나 보다. 잠결에 언니와 엄마가 두런두런 주고받는 이야기가 들렸다.
언니 : ‘엄마, 너무 짜네.’
엄마 : ‘야, 야, 간장이 소태가 돼야 부렀다.
그만 졸이자.’
‘내 간장이 소태가 되었다고? 그러면 안 되는데...‘ 생각을 하면서도 눈이 떠지지 않았다.
한 참을 더 자고 잠에서 깨어난 내가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 간장이 소태가 되었어?’
엄마는 삼분의 일은 줄어야 간장이 된다고 하셨는데, 너무 짜서 중간에 불을 꺼버렸다고 했다.
‘괜찮다. 싱거우면 많이 넣어 묵고, 짜면 쪼끔만 너서(넣어서) 묵으면 돼야.’
그러게, 엄마 말을 들었어야지
많이 속상했다. 엄마는 정말 쉽다 하셨는데, 정말 간단하다 하셨는데, 쉽지 않고, 간단치 않은 것이 간장, 된장 담그기인 것 같다. 엄마의 비법과 염도계라는 과학의 힘을 절충하여 실패하지 않고 맛나게 담아보려고 그렇게 노력을 했건만...
엄마 말씀대로 콩이라도 삶아서 섞어야 할 것 같다. 그러게, 엄마 말을 들었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