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작년부터 취업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다. 경력단절 기간에 뭐라도 하자는 생각에서였다. 무엇보다 난 올해 다시 일을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었다. 어느덧 프로그램 막바지에 이르러 취업 상담이 있었다.
담당 취업상담사는 이제 적극적으로 구직활동을 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네 살, 세 살 아이들을 키우고있다 하니 더 늦기 전에 취업하는 것도 좋은 점이 많다고 했다. 이유인즉슨 경력단절이 길어질수록 취업에 대한 자신감은 더 떨어지고, 아이가 초등학교 1학년이 되면 챙길 것이 너무나도 많아지는데 차라리 지금 경력을 쌓고 나중에 아이들이 초등학교에 입학하게 되면 그때 잠시 쉬어가도 좋다는 취지였다. 난 아직 그 세계를 겪어 보지 않았으므로 그저 앞서 경험한 자의 조언에 조심히 고개를 끄덕이며 경청했다.
처음 프로그램을 시작했을 때와 지금의 내 생각이 어떻게 달라졌으며 어떤 애로사항들이 있는지.내 안의 고민, 나를 둘러싼 환경에 대한 염려들에 대해선 시시콜콜 털어놓지 못했다.
아이들이 어려 낯선 누군가에게 아이를 맡기는 게 여의치 않고...친정과 시댁 모두 300km 이상 떨어진 곳에 위치해 도와줄 사람이 마땅히 없으며, 작년 하반기에만 아이들이 한 달에 한 번 꼴로 열이 올라 입원을 네다섯 번했다는 이야기는 덧붙이지 않았다.
난 아이들이 아플 때마다 내 처지를 더 처절히 깨달았다. 일도, 공부도...지금 내 생활에 특히 취업은 언감생심인 것만 같았다.(이와 관련된 감정은 - [어린이집 선생님 앞에서 왈칵울었다] 편에서 자세히 나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일'을 하고 싶다.
엄마로서 나도 중요하지만, 온전한 나로도 인정받고 싶다. 욕심이지만 엄마로의 나 그리고 온전한 나 둘 사이 균형을 맞추며 잘 공존하고 싶다.
아이들을 낳기 전까진 '내가 진짜로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일까'만 고려했다. 그런데 지금은 '아이들을 잘 키우며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를 생각한다.
한 매체에서 김미경 강사는 싱글의 삶이 '점'이었다면결혼하고 출산 이후의 삶은 '선'이고 '면'이라고 얘기했다. 점, 선, 면 모두 나의 모습인데 점과 선만이 내 모습이고 면은 내 원래의 모습이 아니라고 부정하는 순간 힘들어진다고 말이다.
나 또한 둘째를 출산하고서 산후우울증이 있었다. 내가 책임져야 할 것, 할 일은 더 늘었고 시간은 아이를 중심으로 흘러갔다. 하고 싶은 것도 해야 할 것도 많은데 시간도 체력도 따라주질 않았다. 내게 주어진 삶은 내가 원하는 모습과는 괴리가 있었다.현재 삶의 모습을 인정하지 못하자 너무 괴롭고 답답했다. 어디든 탈출하고 싶었다. 누가 살짝만 건들어도 욱하고 화가 나거나 시도 때도 없이 눈물이 흘렀다.
지금은 내 현실 그대로의 모습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하루하루를 살아내고 있지만...그렇다고 내가 가진 불안, 염려 그리고 좌절감이 없어진 것은 아니다.
아무것도 되지 못할까 봐 두려웠다.
3년의 방송작가, 1년 갓 넘은 강사 경력 그리고 5년 차에 접어든 경력단절.
내가 가진 이력이다.
난 대학을 졸업하고 알바에 전전하다가 글 쓰는 일을 업으로 삼고 싶다는 생각 하나로 서울에 상경했다. 모두의 만류를 뒤로하고. 스물일곱에 꿈을 향한 첫 발을 내디뎠다. 하지만 내 생각과 달리 방송 작가의 일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글 보다 잡일에 능한 사람이어야 했다.(그래서 방송작가는 방송국 내에서 방송잡가로 불린다.)
나는 주어진 일을 묵묵히 성실히 해내는 것은 좋아하지만 변수에 취약한 사람이다. 그런데 방송국은 온통 변수 투성이었다. 어제 출연을 약속한 출연자가 오늘 변심해 출연을 취소하기도 하고, 잘 진행되고 있는 아이템이 시의성에 의해서 엎어지기도 했다. 그런 변수는 나에게 항상 스트레스였다. 빠릿빠릿하지도 싹싹하지도 못했던 나는 방송국 일이 늘 힘들었다. 힘이 들고 적성에도 맞지 아니하니 일은 당연히 잘하지 못했다. 선배들로부터 많이 혼도 나고 당시 나의 자존감은 바닥이 되었다.
그리고 건강도 많이 잃어버렸을 때... 이제 그만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3년간의 방송작가 생활을 종지부 찍었다. 그리고 다른 업을 가지려고 테솔 자격증을 따고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강사가 되었다.그 뒤 바로 결혼을 하고서 얼마 되지 않아 친정엄마에게 혈액암이 발병했다. 난 남편과 장거리 가족을 하며 엄마를 간병했다. 엄마의 항암치료가 끝날 때 즈음 첫째가 찾아왔다. 그리고 연이어 둘째도 낳게 된다.
난 사회 경력이 그리 길지 않다. 다시 돌아갈 곳이 없다. 서른 후반, 애매한 경력, 어린아이들을 양육하는 사람을 반겨 줄 곳은 있을까. 경력단절이 한 해 거듭될 때마다 ‘사회에 다시 나갈 수 있을까.’라는 불안이엄습해 온다. 결국엔 난 좋은 엄마도 어엿한 사회인도 그 어떤 것도 되지 못할까 봐 두렵다.결국엔 아무것도 되지 못할까 봐.
어떤 일을 할 수 있을까.
몇 시부터 몇 시까지 일할 수 있을까.
일을 시작한다면 아이들은 누가 돌봐줄 수 있을까.
아이들이 아플 때 연차와 반차를 자유롭게 쓸 수 있을까.
그렇지 않을 땐 누구에게 부탁해야 될까.
이 생각 저 생각으로 머릿속이 어지럽혀지고 쉽게 내려지지 않는 결론에 그냥 지금 본업에나 충실하자고 생각해 버리지만 나는 알고 있다. 이 끝나지 않는 고민은 계속될 것이고, 좀처럼 내려지지 않는 결론 속에서 난 계속 허우적거릴 거라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