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힌세상] 4. 완벽과 노력의 모순

by 기리니

초등학교 3학년 때까지는 작은 시골마을에서 살았었다. 동네 마트나 예체능 학원은 있지만 아주 작고 소담스러워 같은 빌라 이웃집 동생들이 다 모이는 그런 곳이다. 으레 그런 동네들은 아주 친밀했기에 한 집에서 모여 어른들이며 아이들이며 저마다 시간을 보내는 것이 일상이었다. 그 동네에서 우리 오빠와 내가 가장 나이가 있는 편이었기에 자연스럽게 우리 주위로 동생들이 모였다. 그럼 우리네 작은 방에서 옹기종기 모여 같이 게임도 하고 피아노도 치고, 재밌거나 허무맹랑한 이야기들을 하며 웃고 떠드는 것이다. 공통점은 없어도 같은 공간에서 노는 게 마냥 좋았던 우리였다.


언제는 내가 동생들과 같이 있는 자리에서 왜인지 책을 읽고 있었다. 초등학생 저학년이 읽음직한 큰 글씨의 가벼운 책이었다. 동생들이 떠드는 재미난 소음 속 나는 점차 홀로 심각해졌고 기어코는 동생들에게 짜증을 내고야 만다. 이유인 즉, 책을 읽어야 하는데 읽히지가 않아서다! 단순히 주위가 시끄러워서 집중이 안 되는 것이 절대 아니었다. 나는 문장의 모든 글자들을 그야말로 '완.벽.히' 읽어야 했다.


예를 들면,


'선생님이 잠시 나갔다 올 건데 마시멜로를 먹지 않고 기다린 친구들에게는 하나를 더 줄 거야.'


위의 문장을 구성하는 모든 단어, 낱말, 음절을 모두 뇌에서 인식했다고 생각해야지 그다음 글로 넘어갈 수 있었다. 눈으로 들어온 시각적 자극이 뇌로 들어가 인지를 하고 반응을 해야 그 글자는 비로소 '읽은 것'이 되었다. 글자가 조금이라도 먼지처럼 흩어져 날아가버리면(그런 기분이 들면) 난 그 글자를 '읽지 않은 것'이 되는 것이다. 단순한 글자라도 나는 상당한 집중력이 필요했고 나는 자주 지치는 기분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생각해 보니 초등학생 때뿐만이 아니었다. 중학교 시절에 나는 매번 교과서가 필기로 지저분했는데, 수업 중 선생님이 중요하다고 설명하며 칠판에 적으라고 작성해 준 모든 것들을 적었다. 정말 '모든 것'을 말이다. 불필요한 조사나 어미들마저도! 공부도 못하는 학생이었건만 하기 싫은 숙제를 하는 것처럼 열심히 필기를 하던 나는 수업 마무리 종이 울려도 금세 자리를 일어나지 못하였다. 그러고 나면 자주 지친 기분과 손가락을 파고드는 펜의 중압을 느끼고는 했다.




나에게 주어진 일은 뭐든 열심히, 잘하고 싶었는데 내게는 그 행위를 정의하는 기준이 늘 높고도 멀었었다. 행위를 설명하는 가장 최적의 기준이 나에게는 늘 가이드라인이었다. 마치 그게 명확한 정답이 있는 100점짜리 답안지인 것처럼. 나는 운전을 할 때 대체로 깜빡이를 잘 키는 편이다. 그렇지만 도로 상황이나 주위 차량에 따라서는 키지 않을 때도 많다. 그렇다면 내 기준에서 나는 '도로교통을 잘 지키는 사람'은 아니다. 스스로에 대한 높은 기준은 늘 나를 자격미달의 사람으로 만들어버렸다. 결국 번듯한 직장을 다니며 일을 할 때 누구보다 상사에게 인정받고 다른 동료로부터 존경받지만 막상 근무평정에서 '왜 본인 점수를 이렇게까지 낮추는 거예요?'라는 소리를 듣게 되는 것이다.


잘하는 사람이고 싶지만 잘할 수 없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나에게 '잘'은 완벽에 가까운 기준이라 나는 늘 모자랐고 부족했다. 그게 나를 열등하게 만들고 어느 순간 스스로를 너무 버겁게 만들어 버렸다. 이룰 수 없는 이상향의 형태인 '완벽'은 형태 없는 희망고문에 불과했고, 난 늘 노력이라는 단어가 숨 막히게 무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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