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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테 Apr 04. 2021

힙한 우산 지팡이와 짝짝이 신발

산티아고 순례길Day 11(나바레떼→ 나헤라)


나는 이 지구에 어떤 나비효과를 일으킬 수 있을까?


아킬레스건이 잘 버텨주기를 바라며,

오늘은 알베르게에서 거의 마지막으로 출발했다.

오전 8시에 나오니 이미 날이 밝아있었다.

NAVARRETE 나바레떼 마을

등산화를 신어보니 역시나 무리일 것 같아서

처음부터 크록스 샌들을 신고 가기로 했다.

그나저나 어플을 켜보니, 어제 27km를 넘게 걸어 다녔다는 걸 알게 됐다.

알베르게에 도착한 뒤로도 마을을 이리저리 돌아다녔는데, 그게 꽤 되는 거리였나 보다.

아프다고 절뚝거리면서 잘도 돌아다녔네, 하는 생각에 괜히 웃음이 났다.

그렇게 앞에서 전화를 하며 걷는 순례자 뒤를 아무 생각 없이 따라가고 있는데,

뒤에서 다른 외국인이 이쪽 길로 가야 한다고 알려주었다.

이렇게 종종 순례자들에게 도움을 받곤 한다.

그리고 반대로 내가 도움을 주기도 한다.

누군가의 친절에 고마움을 느껴보았기에,

다른 누군가에게도 친절을 베풀고 싶어 지는 건 아닐까. A가 B에게, B가 C에게, C가 D에게..

그렇게 점점 나비효과처럼 한 사람의 날갯짓이 번져나가는 걸 상상해본다.


나는 이 지구에 어떤 나비효과를 일으킬 수 있을까?

절뚝이면서 걸어가다 보니 문득 다행이란 생각에 감사함이 올라온다.

비가 안 내리는 게 어디야.

이렇게 화창한 날씨라 엉금엉금 기어가면서도 마음이 편할 수 있는 거지.


삼선 쓰레빠를 가져올까 했었는데

크록스 샌들이라서 천만다행이지 뭐야.

오늘도 계속해서 평탄한 길이라 얼마나 다행이야.

힘든 상황에서도 잘 찾아보면 나에게 도움을 주고 있는 것들은 언제나 있구나. 




역시 돌다리도 두드려 보고 건너야 해.


갈림길이 나왔다.


한쪽은 일반코스, 다른 한쪽은 1km 정도 돌아가는 길.

그곳에 Ventosa라는 작은 마을이 있고

그 마을 알베르게가 참 예쁘다는 소리를 들었다.


다리도 아픈 데다가 오늘은 짧게 걷고 싶어서,

그리고 예쁜 알베르게에서 묵고 싶어서, 

돌아가는 코스를 선택했다.

벤토사로 가는 길 곳곳에 귀여운 그림과 사진들이 놓여있었다. 

그렇게 벤토사 입구에 도착했다.

아직 오전 10시 반이길래 레스토랑에서 이른 점심을 먹으며 밀린 유튜브 편집을 하기로 했다.

베지터블 샌드위치를 시켰는데, 아니 이게 뭐야.

햄과 치즈가 잔뜩 들어가 있다.

베지터블 샌드위치가 맞냐고 물었는데 맞다고 한다.

'아, 이런...'

어제까지만 해도 주문을 할 때마다

"쏘이 베지테리아나. (저는 채식주의자입니다)"

라고 먼저 밝힌 뒤 메뉴를 물어보며 시켰다.

대부분 베지터블이라고 쓰여있는 메뉴를 보여주었고

이번에도 당연 그럴 거라 생각했는데ㅎㅎㅎ 정확히 물어보지 않은 나의 실수였다.

햄과 치즈를 어찌어찌 빼고 나니 정작 야채는 별로 있지도 않았다.

빡침이 살짝 올라왔다.


'역시 돌다리도 두들겨보고 건너야 하는겨.'

음식을 먹으며 까미노 어플을 켜서 벤토사 알베르게들을 확인했다.

그러다 문득 예약 사이트를 훑으니 알베르게 총 3군데가 전부 예약 마감이었다.

그중 한 곳은 비싼 호텔 수준이었는데도.

'아, 이런...'


가을 까미노는 비수기라 굳이 알베르게들을 예약하지 않아도 된다.

그저 선착순으로 자리를 잡으면 되는데 이런 작은 마을의 알베르게는 미리 예약을 했어야 함을 깨달았다.

12시간 전에 마지막 예약이 끝났다는 알림을 보자 

다음 마을까지 8~9킬로를 더 가야 함에 한숨이 나온다.

역시 돌다리도 두들겨보고 가야 하는 건데 말이야.

오늘 짧게 벤토사까지만 걸을 생각에 평소보다 늦은 시각인 8시에 출발을 했던 건데.

거기다 괜히 이 길로 들어서는 바람에 1킬로나 더 걷게 생겼다.

BUEN CAMINO 부엔 까미노


'그래도 뭐 어떡해. 계속 가야지. 부엔 까미노인걸.'


참 웃긴 게

아까까지만 해도 이 발목으로는 벤토사까지도 무리라 생각하며 절뚝거려왔는데

내가 오늘 여기서 묵을 수 없고, 

다음 마을까지 9킬로를 더 걸어가야 함을 마음먹고 나니

나약해졌던 마음이 한 뼘 위로 올라옴을 느꼈다.


절뚝거림도 미세하게 수그러들었고

어찌 됐든 오늘도 20km를 넘게 걸을 수 있을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생각해보니 첫날에는 왼쪽 서혜부 임파선염이,

그다음은 왼쪽 어깨가,

그다음은 오른쪽 발볼이

아프다고 난리를 치다가 사그라들었다.


어느 곳 하나 소중하지 않은 곳이 없음을 깨달으며 통증을 어루만져준다.

이 길을 걸으며 지난날의 나를 어루만져주듯이.


'그래, 네가 거기 있었지.

많이 아프고 힘들었지.

그동안 알아주지 않았던 거 미안해.'


그럼 어느새 계속 아플 것만 같았던 통증이 누그러들다 사라진다.

아킬레스건도 며칠이면 사라질 통증이라 생각되기 시작하니, 마음이 가벼워졌다.

점점 오늘의 목적지까지 충분히 걸어가고도 남겠다는 생각이 든다.


역시 사람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만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한계는 본인이 만드는 거구나. 


1km를 더 걷는 동안에 6km도 무리라고 생각했던 마음이

어느새 20km를 가도 충분히 거뜬하다로 바뀌어 있었다.


괜찮은 것을 또 얻어간다.



힙한 우산 지팡이와 짝짝이 신발


한참을 걷다 보니 험난해 보이는 산 길이 나왔고

돌길에 크록스가 살짝씩 미끄러지길래 왼쪽 발만이라도 안정감을 주고자 잠시 등산화로 갈아신었다. 

너무 웃긴가?ㅋㅋㅋ 싶었는데,

한 할머니 순례자분이 우산 2개를 지팡이 삼아 걸어가신다. 


'와!!!!! 할머니 완전 힙한데?!'

그래, 또 올라가 보자. 

우산 지팡이와 짝짝이 신발.

다행히 저 부분만 경사진 산 길이었고 금세 도로 평지가 펼쳐졌다.

산을 올라야 하는 줄 알고 각 잡고 있었는데 살짝 허무하다.

계속 이어지는 포도나무들.

주렁주렁 달려있는 포도들이 눈에 아른거려 하나만 빼서 먹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이 수많은 것 중에 하나면 티도 안나지 않나?'

그렇게 순례자들이 그런 마음으로 다 하나씩 따 먹으면 포도가 남아나질 않겠지ㅎㅎㅎ

그렇게 어디선가 하늘에 드론이 나타났다.

여기에 드론을 가져와서 찍으며 걷다니 진짜 대단하다. 걷기만 해도 힘든데.

혹시 얼마나 더 가야 하는지 길이 어떤지 보기 위해 드론을 띄우는 거 아닌가 싶은 생각도 했다.

'도대체 어디까지 가야 하는 거야? 오늘은 왜 이렇게 앉아서 쉴 벤치도 안 보여.'


중간중간 예쁜 구석들이 나오면 그게 곧 살짝의 휴식이다.

사진을 찍기 위해 잠시 멈추고서 '예쁘다.'라는 감탄사를 뱉는 구간.

사람들마다 그런 구간이 가지각색일 거라 생각하면 재밌다. 

어느새 마을에 도착했다. 

여기도 큰 도시의 스멜이 풍긴다.

엊그제 알베르게에 빨래를 걸어놓고선 팬티랑 스포츠 타월만 쏙 빼놓고는 걷어오는 바람에

팬티가 한 장이 되어버렸고, 수건 없이 샤워를 해야 했다.

'오, 도시다. 다행이다. 오늘은 팬티랑 수건을 사야지.'

골목길을 지나가다 속옷을 파는 곳을 하나 찜해두었다. 

2시가 넘은 시각에 도착했기에, 가게들이 다 문이 닫혀있어서 이따 저녁에 나와서 사기로 했다.

그래도 다행이다! 오늘은 파는 데가 있네!

이 구역의 포토존인가.

라스 페냐스 알베르게 (11유로)

알베르게를 어디로 갈까 고민하다가 그냥 발길 닿는 대로 왔다.

알베르게 주인이 처음으로 내 이름을 어떻게 읽는지 물어본다.

"거니."라고 말해주었다.

그러자 이름으로 불러주기 시작하는데 그게 괜스레 기분이 좋았다.

사람은 역시 자기 이름으로 불릴 때 좋은 거구나.


오늘은 처음으로 샤워를 마친 후에 저녁 6시까지 쭉 낮잠을 잤다.

그렇게 일어나 마을을 구경하러 나오니 몸이 좀 더 개운했다. 

그리고 여기 참 예쁜 마을이네!

어느덧 날이 어둑해진다.

과일들이랑 팬티, 수건을 사서 숙소에 들어오니 여전히 이 방에 나 혼자다.


"와, 전세 냈다!"


알베르게에서 혼자 자보게 되다니 흔치 않은 경험일 것 같아서 신기했다.

정말 홀가분하고도 편하게 하룻밤을 묵고 가겠구나 싶어서 신이 났다.


'푹 자고 내일도 열심히 걸어보자! 파이팅!'




2019.10.11

나바레떼 Navarrete → 나헤라 Najera

총 17km


트래블희 ᵀᴿᴬⱽᴱᴸᴴᴱ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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