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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걸크업 Apr 28. 2020

산티아고 순례길 여정 day1

모든 화살표는 이미 내 안에 있었다.

# 서툰 것도 용기가 필요해


누군가의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눈이 떠졌다.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아직 창문 밖은 어둠이 깔려 있었다. 그리고 어젯밤에는 정말 기절한 듯이 잠들었던 것 같다. 이 방의 또 다른 게스트를 이제야 마주한 걸 보면.


“하이”

“굿모닝”


시계를 보니, 아직 7시가 되지도 않은 시각이었다. 어디를 가는 것일까? 이른 시간인데. 부스럭거리던 친구는 일찍 방을 빠져나갔다. 덕분에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일어나게 되었고, 남은 한 명도 깼는지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문득 몸이 굉장히 개운하고 가볍다는 느낌이 들었다. 밤새 침낭 안에서 깊은 숙면을 취했던 모양이다.


‘오, 침낭이라는 거 생각보다 굉장히 좋은데?’라는 생각을 하며 나갈 준비를 시작했다.


집에서 미리 침낭을 케이스에 집어넣는 연습을 서너 번 했음에도 이게 은근히 쉽지 않다. 역시 처음은 사소하고 별거 아닌 것 같아도 미숙하고 서툰 법이다. 그래도 매일 하다 보면 어느새 익숙해지겠지.


배낭을 메고서 길을 나섰다. 아직 밖은 어둑했고 길거리는 한산했다. 7시 47분 기차를 타기 위해 몽파르나스 역으로 향했다. 분명 가방은 무거우나 발걸음이 너무나도 가벼웠다. 마치 초등학교 시절 들뜬 마음으로 운동회를 향해 등교하던, 설레는 마음처럼.


역 앞에 도착하니 오전 7시 반이었다. 앞으로 자그마치 17분이나 여유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웬걸. 역 안에서 10분을 넘게 헤매게 되었다. 들어왔던 출입구부터 반대편 출입구까지 안절부절 의미 없는 발 도장만 남기다 보니 7시 40분이 넘어가고 있었다. 아, 이러다가는 기차 놓치겠다. 안 되겠다.


“봉쥬르, 익스큐즈 모아”


전혀 모르는 프랑스어지만 ‘안녕하세요, 실례합니다.’ 이 두 문장으로 회사원 같던 남성분에게 말을 걸었다. 그리고는 기차표를 보여드렸다. 다급하지만 침착하게 웃어 보이려는 내 모습을 마치 아셨는지 살짝 웃으셨다. 그리고는 차분하게 기차표를 훑어보더니 위에 전광판을 향해 손가락을 들며 알려주셨다. 솔직히 전혀 못 알아들었지만, 3번 플랫폼으로 가야 한다는 것만은 정확하게 알아들었다.


“메르씨, 메르씨, 땡큐!”

손을 흔들며 서로 무언의 응원을 주고받은 기분을 느끼며 헤어졌다.


그분 덕에 생장으로 가는 기차에 무사히 몸을 실을 수 있었다. 티켓에 적힌 좌석을 찾아 앉고 나니 저절로 ‘휴~’하고 안도감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해냈다. 어제도, 오늘도 굉장히 서툴지만 그래도 잘해나가고 있다는 사실에 잠시 나에게 흐뭇해졌다.


그러고 보니, 이틀 동안 내가 가야 할 길을 찾아가기 위해 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았다.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는 것도 하나의 큰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내가 서툴고 미숙하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또 외부로 드러내야 하기에 그렇다. 지난 3년 동안 히키코모리 생활을 하며 스스로 내 방에 갇혔던 것은, 실수투성이에 보잘것없는 나를 밖으로 드러내기가 너무나도 무서웠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쪽팔리고 창피했다. 내가 타인에게, 그리고 이 사회에 민폐덩어리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두렵고 싫었다. 그리고 가족에게조차도 기생충인 내 모습이 너무나도 보잘것 없이 느껴졌다. 그래서 더 꽁꽁 숨어버리고 싶었다. 할 수만 있다면 애초에 이 세상에 없던 존재이고 싶었다.


그런 내가 세상 밖으로 나오기 위해 그동안 얼마나 많이도 울었던가. 그때의 나는 나 자신을 혐오하며 참 많이도 울었다. 우는 내 모습조차도 혐오스러워 상상 속에서 나를 항상 발로 짓밟고 할퀴고 때려댔으니까. 하지만 내가 나의 감옥에서 나올 수 있었던 것은 나를 용서하고 안아주기 시작하면서부터 흘린 눈물들이었다. 저 깊은 심해 속으로 끝없이 가라앉던 내가 마치 용서의 눈물을 타고 점점 수면 위로 올라가고 있는 듯했다.


‘괜찮아. 부끄럽고 수치스럽고 못난 모습이더라도 괜찮아. 그런 너를 사랑할게.’


파리에서 생장으로 향하는 이 발걸음도, 앞으로 40여 일의 순례길에서의 발걸음도, 내 삶의 모든 발걸음들이 언제나 서툴고 미숙하겠지만, 괜찮다. 많이 부족하고 헤매더라도 괜찮다. 그런 나를 이해하며, 계속해서 나아가기로 했다. 그런 용기를 내보기로 했다.


그렇게 두 시간 정도 지났을까? 기차표를 확인하던 승무원이 여기가 내 자리가 아님을 알려주었다. 다른 칸으로 이동하라고 지시를 내렸다. 칸을 빠져나와 이동하면서 알게 되었다. 두 시간 동안 업그레이드된 칸에서 홀로 여유롭게 타고 가고 있었다는 사실을.

‘어쩐지, 생각보다 자리가 너무 넓고 좋다 했어!’


그렇게 옮긴 칸에서도 1시간이 지났을 무렵 또 다른 승무원이 내 자리가 아니라며 이동하라고 지시를 내렸다. 허허허. 2번의 옮김 끝에 진짜 내 자리를 찾았다. 원래의 내 자리는 다소 비좁고 시끄러웠다. 기차 안에서까지 서툴게 헤매서 참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본의 아니게 3시간 동안 업그레이드된 좌석에서 홀로 편안히 사색하며 왔으니까 말이야.



# 우리는 각자 삶의 순례자 들일뿐이야


그렇게 한 시간이 더 지났을 무렵, 환승해야 할 역에 곧 도착한다는 안내방송이 나왔다. 원래 도착 예정시간보다 시간이 한참 지나있었고, 갈아타야 할 기차의 출발시간 마저 이미 지난 뒤였다. 기차에서 내리니 생장으로 가려는 순례자 분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10명이 채 안되어 보였지만 순간 너무나 든든한 느낌을 받았다. 얼핏 들어보니 역 직원분이 택시를 불러준다는 듯했다. 다른 건 못 알아들었지만 ‘탁씨’ 라는 발음은 똑똑히 들렸다.


5명씩 나누어 2대의 택시로 생장까지 이동하게 되었다. 역시 인생사 새옹지마라고, 기차가 늦게 도착한 덕분에 편히 택시를 타고 목적지까지 이동할 수 있게 되었다. 원래대로라면 생장 역에서 순례자 사무소까지 꽤 많이 걸어야 한다고 들었다.

드디어 도착했다. 와, 여기가 생장이구나! 프랑스 순례길의 첫 시작점! 생장! 너무 예쁘다!

동화 같은 마을에 와 있는 기분이 들었다. 약간의 언덕길을 올라가다 보니 닫힌 순례자 협회 사무소 앞으로 한국인 순례자분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5-60대쯤 되는 아주머니 분들이셨다. 아마 그들에게는 젊은 내가 이 길에 혼자 용기를 냈다는 사실이 좋은 영향을 준 것 같았고, 반대로 나에게는 나이가 들어서도 삶에 도전하는 그들의 모습이 좋은 자극이 되었다.


솔직히 이제는 무언가를 도전하기에는 또래보다 늦어버린 30대라고만 생각했는데, 그건 사실 나이를 앞세운 나의 비겁하고도 열등감 서린 변명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늦은 건 늦은 거고, 도전은 도전이다. 중년 순례자분들의 나이가 나보다 20년의 차이가 난다고 해서, 그들의 도전이 나의 도전보다 20년 치만큼 못하다고 할 수 있을까?

 

전혀. 전혀 그럴 수 없다. 애초에 서로를 비교할 수 없는 각자만의 도전이고, 삶이다. 그런데 나는 왜 그동안 남들보다 뒤처졌다는 생각에 그토록 괴로워했을까. 그 시절의 내가 있었기에 지금의 깨달음도 얻을 수 있는 거지만, 한편으로는 그때의 내가 안쓰럽게 느껴졌다.

순례자사무소 앞에 걸려있던 조가비

순례자 협회 사무소의 오픈 시간이 오후 2시부터라고 적혀있었다. 15분 정도 순례자분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순례자 사무소의 문이 활짝 열렸다. 5번째로 줄을 서서 기다리게 되었고, 줄은 생각보다 빨리 빠져나갔다. 내 차례가 되어 크리덴시알(순례자임을 증명하는 문서)을 발급받기 위해 신청서를 작성하게 되었다. 이 순례길에 한국인들이 정말 많이 오긴 오나보다. 한글로 된 설명서가 준비되어 있어서 새삼 놀라웠다. 신청서에는 국적, 이름, 나이, 주소, 직업, 걷는 목적 등을 간단히 적어내기만 하면 되는 거라 금세 완료가 되었다.


나의 첫 크리덴시알! 그리고 내 손으로 직접 영광의 첫 쎄요(도장)도 찍었다! 옆에서 아주머니 순례자분들도 첫 크리덴시알을 흔들며 기뻐하고 계셨다. 문득 우리는 각자 자신의 삶의 순례자들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 우월감을 가질 이유도, 열등감을 느낄 이유도 없는 거였다. 타인은 타인의 삶을 걸어가고, 나는 내 삶을 걸어갈 뿐이다.

나의 첫 크리덴시알과 쎄요


순례자 여권인 크리덴시알을 손에 쥐고 일어서니, 아주머니 순례자 분께서 손가락으로 옆을 가리키셨다. 도네이션(기부)으로 조개껍데기를 가져갈 수 있게 모아놓은 상자였다.

‘그래, 배낭에 가리비 하나씩은 달아줘야 순례자지!’

하얀 가리비들 사이에서 홀로 주황색 빛깔을 띄고 있는 예쁜 가리비를 하나 집었다.


“조개가 살짝씩 깨져있는데?”

“네! 그래서 더 예뻐요! 마음에 들어요.”


왠지 나를 닮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배낭에 바로 가리비를 달았다. 바라보고 있자니 배시시 웃음이 절로 난다. 이로써 순례자들이 으레 하는 통과의례를 모두 마친 기분이 들었다. 이제 나는 공식적으로 진짜 순례자가 되었다.

순례소 사무소 안의 조가비 도네이션 상자
내가 고른 주황색 조가비

# 늘임봉 꼭대기와 생장 전망대


친해진 아주머니 순례자 한 분과 오늘 묵을 알베르게(순례자 전용 숙소)를 물색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들어온 곳은 55번 공립 알베르게였다. 순례길에서의 첫 알베르게라는 생각에 기대감이 한껏 부풀었다. 무거웠던 배낭을 내려놓으며 짐을 대충 풀어놓고서 창문으로 다가갔다. 이미 방에 들어선 순간부터 창문 밖 풍경에 마음을 빼앗겨버렸다. 그저 감을 따라 들어온 곳인데 이렇게나 아름다울 줄이야. 마치 알프스 소녀 하이디라도 되는 기분이었다.

알베르게 창문 밖으로 펼쳐진 풍경

샤워를 마치고 간단히 장을 본 뒤에 마을을 구경했다. 기념품 가게들을 기웃거려도 보고, 예쁜 다리를 감상하기도 하다가 마을을 내려다볼 수 있는 곳에 올라갔다. 와... 마을의 작은 전망대 같았다. 풍경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정말 아름다운 곳이었다. 이 곳에 서서 이 낯설고도 설레는 마을을 내려다보고 있으니 어린 시절의 내가 떠올려졌다.


나는 어릴 때부터 높은 곳을 정말 좋아했다. 초등학생 때도 점심시간이면 운동장에 있던 늘임봉을 타고 기어 올라가 맨 꼭대기에서 뛰어노는 친구들을 내려다보곤 했다. 특히 수업이 끝난 후 한참을 뛰어놀다가 저물어가는 해를 보며 늘임봉 위에 앉아있으면 뭉클하면서도 무언가 묘한 기분을 느끼고는 했다. 물론 늘임봉 위까지 올라올 수 있는 친구들이 거의 없었기에 홀로 이 명당을 차지했다는 우월감도 한몫했지만, 그곳은 나에게 아지트였던 셈이다. 그때의 감정이 생각나는 건 무엇일까.


힘든 줄도 모르고 뻘뻘 땀을 흘리며 뛰어놀다가 홀로 위에 앉았을 때, 그 어린 나이에도 나는 즐거움과 동시에 불안과 고독을 함께 느꼈던 것이다.


‘나는 어떤 어른이 될까? 지구는 왜 있는 걸까? 사람들은 왜 살지?’


아직 커다랗게 해가 쨍쨍 비추지만 곧 노을 지며 저물어갈 하루가 좋으면서도 슬펐다. 그때와 마찬가지로 나는 생장의 이 멋진 풍경 속에서 황홀함과 설렘을 느끼면서도 한편으로는 내일 펼쳐질 순례길이 두려웠다. 조금씩 세상 밖을 나오고 있는 내가 기특하면서도 미래에 대한 막막함과 알 수 없음에 불안했던 것이다. 그때와 같은 질문이 여전히 내 안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나는 어떤 길을 걷게 될까?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지? 삶이란 무엇일까?’

전망대에서 내려다 보이는 예쁜 마을, 생장

좀 더 사색하고 싶었지만 날이 좋지 않더니 역시나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장을 봐온 걸로 이른 저녁을 먹은 뒤 침대에서 개인 시간을 보냈다. 불안하고 두려운 마음이 서리니 누군가에게 의존하고 의지하고 싶은 마음이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스스로 자립하기 위한 길을 걸으려 순길을 떠나온 만큼 그런 나를 다독였다.


‘괜찮아. 새롭고 낯선 곳이기에 올라오는 두려움이야. 도전했기에 무서운 것은 당연한 거야. 막상 해보면 그리 어렵지 않을지도 몰라. 또 끝까지 완주하지 않아도 돼. 그런 걸로 나를 압박하지 않을게. 괜찮아.’


나를 다독였던 덕분일까. 두려움보다는 설렘과 기대감이 나를 감싸는 기분이 들었다. 어쩌면 두려움 속 진짜 알맹이는 변화에 대한 기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덧 저녁 8시가 되자 어둠이 깔리기 시작했고, 알베르게는 취침모드가 되었다. 순례자들의 코 고는 소리를 들으며 나도 잠을 청하기 시작했다. 내일부터 펼쳐질 나의 진짜 새로운 모험을 응원하며, 부엔 까미노!


*부엔 까미노란 좋은 길, 좋은 여행, 좋은 방법이란 뜻을 지니고 있다.


[2019.10.02.]

몽파르나스 역 → 생장


ᵀᴿᴬⱽᴱᴸᴴᴱ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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