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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테 Apr 27. 2020

산티아고 순례길 여정 day0

모든 화살표는 이미 내 안에 있었다.

# 어설픈 시작이더라도 괜찮아.


오후 2시.

곧 파리 샤르드골 공항(CDG)에 도착한다는 안내 방송이 나왔다.

두리번거리며 주위를 살피다가 창문 가림 막을 올렸다.

'음……. 올려도 되겠지?'



와... 이런 풍경이라니!

무언가 도시의 모습을 생각했는데, 내 예상과는 다르게 너무나도 멋진 자연 풍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덕분에 벌써 순례길을 걷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 진짜 왔구나. 앞으로 40여 일 동안 이런 멋진 풍경들을 보면서 걸어가게 되겠지?’

다시금 가슴이 두근두근 뛰기 시작했고, 창문 밖 풍경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잠시 뒤 비행기가 착륙하기 시작했다.

고개를 돌려 한국에서 미리 준비해 온 유심칩을 핸드폰에 끼우기 시작했다. 유심칩을 교체하는 내 손을 물끄러미 보고 있자니, 어느새 기대감과 설렘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걱정들이 한가득 채워지고 있었다.


‘공항은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을까?’

‘예약해둔 호스텔까지 헤매지 않고 잘 갈 수 있겠지?’

‘불어, 스페인어는커녕 영어도 못하는데 괜찮으려나.’

‘근데 이거 데이터 안 터지는 거 아니야? 그러면 정말 안 되는데.’


‘...아... 나 괜히 온 건 아닐까. 내가 정말 잘 해낼 수 있으려나...'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불안감들이 우후죽순으로 올라왔다.

전원 버튼을 눌러 핸드폰을 켜면서 잠시 눈을 감았다.


‘예상치 못한 일이 생겨서 공항을 못 빠져나가게 되더라도, 뭐... 한국으로는 보내주겠지. 그리고 공항에서 몽파르나스 역까지 가는 방법, 인터넷으로 많이 찾아봤잖아. 그대로 하면 돼. 괜찮아. 엉망진창이 되더라도 나 자신을 탓하거나 혐오하지 않을게. 헤매더라도 괜찮아.'


코로 숨을 크게 들이마신 뒤에 다시 입으로 후- 하고 내뱉었다.

그렇게 3~4번을 반복하자 밖으로 나갈 준비가 된 것 같았다.


좋아. 못 먹어도 고!



# 미션: 출구를 찾아라.


내리는 승객들이 너무 많아서 좌석에 앉아 천천히 기다리다 보니 맨 마지막으로 비행기에서 내리게 되었다. 그렇게 화장실까지 들렸다가 나와 보니, 그 많던 승객들은 다 어디로 사라지고 텅텅 비어버렸다. 사람들을 뒤쫓아 가려고 했건만, 따라갈 사람들이 없어졌다. 이제 난 어디로 가야 하지?


비행기 표에 적힌 Terminal 2E를 무작정 찾아 헤맸다.

그렇게 Gate E를 찾아서 앞사람을 따라 짐을 풀고 심사를 받으려고 하는데,

직원분이 비행기 표를 찍어보더니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나에게 어디로 가냐고 물었다.


‘음, 그런 건 왜 묻는 거지?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으러 왔다고 말을 해야 하나? 이걸 근데 영어로 어떻게 말해야 할까?’


“음... 산티아고....”


어리바리하게 버벅거리는데, 앞에서 심사를 받던 남자분께서 뒤돌아보시더니 도와주시겠다고 하셨다. 다행히도 한국분이셨다.


“최종 목적지가 어디세요? 산티아고 순례길 걸으러 오신 것 같은데, 마드리드로 가세요?”

“아, 아니요. 저 파리요. 몽파르나스 역으로 가야 해요.”

“지금 여기는 환승 게이트예요. 입국심사받는 곳으로 가셔야 해요.”


그제야 직원이 왜 자꾸 나에게 최종 목적지가 어디냐고 묻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속으로 ‘내가 생장까지 가는 거 알아서 뭐할라고?’라고 생각했던 거 미안해요.

나도 참... 최종 목적지는 어느 공항까지 가느냐는 의미였구나. 좀 바보 같았다.


감사하게도 남자분께서 시간이 남는다며 심사를 받다 말고서 계단까지 데려다주셨다. 나에게 영어를 못하는데도 혼자 여행을 나서고, 산티아고 순례길까지 걸으려는 용기가 대단한 것 같다고 하셨다. 그런 말을 들으니 사실 처음에는 의아한 기분이 들었다. 요즘에는 혼자 해외여행을 다니는 사람도 너무 많고,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분들도 많으니까.


그런데 그분의 말에 내가 낸 용기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해보게 되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도전하고 성공했다고 해서, 내가 낸 용기가 작아지는 것은 아니었구나. 마치 ‘너의 도전과 용기에 자신감을 가져!’라고 알려주신 것만 같았다. 그리고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행운이었다. 환승 게이트에 서 있던 단 두 명의 승객 중에서 바로 앞의 분이 한국 사람이었다는 것이. 안 그랬다면 나는 그곳에서 더 오랫동안 헤맸을 것이다.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서 남자분께서 알려주신 곳으로 향했는데, 이번에도 직원이 나를 부른다. 여기로 못 들어가니 다른 곳으로 가라는데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있어야지. 엉망진창이네 정말.

그렇게 몇 번이나 공항 직원들에게 다가가 내 비행기 표를 보여주었고, 그들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걸으며 어렵게 입국 심사대를 찾을 수 있었다.

비행기에서 내린 지 1시간 만이었다. 입국 심사대에는 기다리는 승객이 단 한 명도 없었다. 앉아있던 직원의 표정이 마치 ‘얘는 뭔데 지금 나타나지?’란 표정이었지만, 나는 새어 나오는 웃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좀 바보 같았던 내가 너무 웃겼고, 탈출했다는 생각에 마냥 기뻤다.

무거운 배낭을 메고서 1시간이나 미로를 헤매다가 출구를 발견하는 기분이란!

물론 비행기에서 입국 심사대까지였지만 어느새 자신감이 많이 붙어있었다. 나름 수확이 있는 1시간이었다. 그동안 무거운 7kg의 배낭을 메고서 내가 과연 하루에 20km씩을 걸을 수 있을까 걱정했었는데, 뭐 어깨가 많이 아프기는 하지만 이 정도면... 미션 임파서블? 아임 파서블!



# 나를 반겨주던 행운의 숫자 3


공항버스를 타고 몽파르나스 역에서 내렸다. 파리로 들어오는 많은 순례자분들이 이 곳 몽파르나스 역에서 기차를 타고 생장으로 향한다고 들었다. 생장은 산티아고 순례길 프랑스 루트의 첫 시작점이다. 나도 내일 이 곳에서 기차를 타고 생장으로 향할 예정이다. 오전 7시 47분 첫 차를 타고서. 허허허.


역에서 10분 정도 거리에 있는 호스텔에 무사히 도착했고 3층 33번 방 330번 침대를 배정받게 되었다. 3이 무려 5개라니. 33333. 마치‘파리에 온 걸 환영해. 앞으로 펼쳐질 멋진 모험을 마음껏 즐기렴.’의 메시지 같았다.


방에 들어가니 3인실이었고, 운이 좋게도 내가 배정받은 침대는 싱글베드였다. 그 옆으로 이 층 침대에는 각각 누군가들의 짐이 놓여있었다. 일단 아무도 없는 틈을 타 화장실에서 여유롭게 샤워를 하고 나왔다.

‘아, 살 것 같다. 너무 개운해.’

노래를 흥얼거리며 배낭에서 침낭을 꺼내기 시작할 무렵, 덩치 큰 남자애 한 명이 들어왔다.


“하이”

서로 미소와 함께 짤막한 인사가 오고 갔다.

남자애는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내더니 금세 다시 나갔다.

다음 여행은 영어를 좀 더 배워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할 수 있는 대화가 인사가 전부라니, 너무 아쉬운걸.


침낭을 이불 위에다 마저 깔고 나니 벌써 오후 7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창문 밖 발코니로 나가보니 노을이 지고 있었다. 하늘이 핑크빛으로 물들어져 간다. 너무 아름다운데 일단 배도 너무 고팠다. 구글 지도의 도움을 받아 근처 subway 샌드위치 가게로 향했다. 영어를 못하는 채식주의자인 나에게는 적당히 때울 수 있는 좋은 선택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얼른 먹고 들어가 자고 싶기도 했다. 물론 파리에서의 첫 끼가 서브웨이 샌드위치라는 건 그리 낭만적이지는 않았지만. 아니다, 내가 지금 여기 있다는 자체가 낭만이지.


치즈를 뺀 베지 샌드위치를 들고서 이층 창가 자리에 앉았다. 사람들이 쉴 새 없이 지나가는 모습을 보면서 빵을 먹고 있으니, 이상하게 여기서 오래 살았던 것 마냥 느껴졌다. 낯설지 않고 익숙한 듯 편하고 여유롭기까지 했다.‘나 적응력 갑인데? 여기서 살아도 되겠어.’라며 웃기지도 않은 셀프 칭찬을 하다가 조금씩 어두워져 가는 풍경에 정신을 차렸다. 내가 아무리 이 곳이 편하더라도 나는 여기서 누가 봐도 복대 찬 여행객이야. 슬슬 들어가자.


호스텔로 들어오자마자 대략 12시간의 비행+무거운 배낭과 4시간을 함께 했더니 피곤이 몰려왔다. 포근하게 침낭 속으로 들어가자마자 ‘33, 330’이라고 적힌 방 카드를 손에 쥔 채,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앞으로 걷게 될 산티아고 순례길이 이 숫자들처럼 행운이 가득하기를 바라면서.



[2019.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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