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한부인생 놀이
죽음은 나를 만드는가, 파괴하는가?
나는 죽을 듯이 괴롭다가 한고비 넘긴 중이다.
마음의 병이 심했다.
둘째를 중증장애인으로 낳고 그 아이의 부모가 된다는 게 나는 너무 힘들었다.
다른 장애인 아이의 부모들은 수용하고 잘 살아 가는데 나만 몸부림치는 거 같아 부끄러웠다.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그게 나니까.
나는 무엇보다 나답게 장애인 부모가 된다는 게 힘들었다.
나는 늘 내가 나다울 때 죄도 덕도 다 내거라 생각했다.
어차피 선업도 악업도 내 몫인데 나답지 못한 걸 업고 가는 건 더 짜증 날 거 같았다.
그렇게 나는 최선을 다해 힘들었다.
그러다 칠 년쯤 되면서 한결 편해졌다.
나는 요즘 내 정신과 영혼을 불교에 맞춰 해석하고 있다.
이건 내게 다음 생과 전생을 이해하게 했다.
그러면서 나는 시한부 인생 놀이를 시작했다.
십 년 살고 죽는다고.
자살은 아니다.
그냥 상상놀이다.
그런데 이 놀이, 좀 슬펐다.
(아직은 아니지만) 돈 좀 벌었다 해도 집이나 차를 바꾸는 게 낭비 같았다.
결국 집사고 차 바꾸고 옷 사는 게 죽을 사람에겐 진짜 의미 없는 거였다.
그건 살사람의 행동이었다.
나는 온통 자식들과 남편이 걱정됐다.
믿음직한 남편이 내가 먼저 가면 그 책임을 다하느라 기운 없어질 걸 생각하면 미안했다.
또는 내가 혼자되고 십 년이면 나도 갈 때 두 녀석들이 버텨낼 방법을 만들 수 있을지 걱정됐다.
큰아들은 서른이 다돼 갈 테니 비교적 안심되지만 그래도 걱정이다.
가장 큰 걱정은 둘째였다.
결국 내가 할 일은 둘째를 자립시키고 큰아들도 스스로 살아내게 키워야 했다.
그리고 나도 나답게 만들어야 했다.
물론 불교적으로 이런 대비도 다 쓸데없지만 부모노릇은 하고 가고 싶은 게 모든 부모 마음이다.
본능인 거 같다.
해내지 못하더라도.
어쨌든 이 상상은 하루하루를 가치 있게 만들었다.
십 년은 죽기에는 짧았지만 아쉬운 대로 작가로서 성취할
걸 도전 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나는 시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무엇이든 지금 하게 되었다.
그래서 요즘 부지런하다.
내 생각엔 부쩍 화도 덜 낸다.
죽음은 나를 파괴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늘 염두에 두면 오늘에 집중할 수 있다.
아까운 줄 알면 아껴 쓰는 법이다.
그런 의미에서 죽음도 나를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