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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찬주 Apr 18. 2024

시한부인생 놀이

죽음은 나를 만드는가, 파괴하는가?

나는 죽을 듯이 괴롭다가 한고비 넘긴 중이다.

마음의 병이 심했다.

둘째를 중증장애인으로 낳고 그 아이의 부모가 된다는 게 나는 너무 힘들었다.

다른 장애인 아이의 부모들은 수용하고 잘  살아 가는데 나만 몸부림치는 거 같아 부끄러웠다.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그게 나니까.

나는 무엇보다 나답게 장애인 부모가 된다는 게 힘들었다.

나는 늘 내가 나다울 때 죄도 덕도 다 내거라 생각했다.

어차피 선업도 악업도 내 몫인데 나답지 못한 걸 업고 가는 건 더 짜증 날 거 같았다.

그렇게 나는 최선을 다해 힘들었다.

그러다 칠 년쯤 되면서 한결 편해졌다.

나는 요즘 내 정신과 영혼을 불교에 맞춰 해석하고 있다.

이건 내게 다음 생과 전생을 이해하게 했다.

그러면서 나는 시한부 인생 놀이를 시작했다.

십 년 살고 죽는다고.

자살은 아니다.

그냥 상상놀이다.

그런데 이 놀이, 좀 슬펐다.

(아직은 아니지만) 돈 좀 벌었다 해도 집이나 차를 바꾸는 게 낭비 같았다.

결국 집사고 차 바꾸고 옷 사는 게 죽을 사람에겐 진짜 의미 없는 거였다.

그건 살사람의 행동이었다.

나는 온통 자식들과 남편이 걱정됐다.

믿음직한 남편이 내가 먼저 가면 그 책임을 다하느라 기운 없어질 걸 생각하면 미안했다.

또는 내가 혼자되고 십 년이면 나도 갈 때 두 녀석들이 버텨낼 방법을 만들  수 있을지 걱정됐다.

큰아들은 서른이 다돼 갈 테니 비교적 안심되지만 그래도 걱정이다.

가장 큰 걱정은 둘째였다.

결국 내가 할 일은 둘째를 자립시키고 큰아들도 스스로 살아내게 키워야 했다.

그리고 나도 나답게 만들어야 했다.

물론 불교적으로 이런 대비도 다 쓸데없지만 부모노릇은 하고 가고 싶은 게 모든 부모 마음이다.

본능인 거 같다.

해내지 못하더라도.

어쨌든 이 상상은 하루하루를 가치 있게 만들었다.

십 년은 죽기에는 짧았지만 아쉬운 대로 작가로서 성취할

걸 도전 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나는 시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무엇이든 지금 하게 되었다.

그래서 요즘 부지런하다.

내 생각엔 부쩍 화도 덜 낸다.

죽음은 나를 파괴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늘 염두에 두면 오늘에 집중할 수 있다.

아까운 줄 알면 아껴 쓰는 법이다.

그런 의미에서 죽음도 나를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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