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무엇으로 인간이 되는가?

<양면의 조개껍데기> 김초엽 단편집 감상평

by 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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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과연 무엇으로 인간인가?
더 나아가, 존재는 무엇으로 존재가 되는가.


<양면의 조개껍데기>는 내가 읽은 두 번째 김초엽의 책이다. 이전에 읽었던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이 비교적 상상 가능한 공상과학의 영역이었다면 이번 책은 그에 비해 한층 더 심화된 주제들로 이야기를 전하는 느낌이었다. SF장르에 특화된 작가의 면모가 드러나는 일곱 편의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다.


[수브다니의 여름휴가] 녹슬어가는 자연스러운 변화

인간화 시술을 받은 수브다니가 다시 안드로이드로 돌아가려고 피부이식을 받는 이야기다. 수브다니는 어쩌면 변화하지 않는 자신의 모습보다, 사랑을 겪으며 자연스럽게 낡고 녹슬게 변화하는 것을 갈망했는지도 모른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하고 싶은 걸 하고 사는 게 어쩌면 삶의 본질이 아닐까 하는 질문을 던지는 듯했다.


[양면의 조개껍데기] 서로를 인정하고 함께 살아가기

두 개의 자아 라임, 레몬과 함께 살아가는 외계인 샐리가 두 개의 자아로 인해 혼란스러운 일상을 바꾸기 위해 자아를 분리하려는 시술을 받으려다 서로의 소중함을 깨닫게 되는 이야기이다. 우리는 상황에 따라 그에 맞는 자아로 살아간다. 어떤 자아를 없애고 배제하는 게 아니라 각자의 역할을 인정하고 함께 살아가야한다. 비단 자아뿐 아니라 우리의 형태, 혹은 정체성 같은 것들도 말이다.


[진동새와 손편지] 존재의 확인은 결국 사랑

의식을 여러 물체로 이동할 수 있는 개체가 우주에서 떠도는 우주선을 탐색하다 만난 진동새와 진동새의 쓰임을 알게 되면서 일어나는 이야기이다.

"더 기다릴 수 없었어요, 지금 당신을 만나러 와야 했어요"라는 메시지를 우주선의 주인은 진동새를 통해 전하고 있었다. 어떤 생명체든 존재의 이유는 누군가에게 도달하려는 의지나 연결이 될수도 있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존재란 누군가와 관계 맺기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소금물 주파수] 스스로 탐색하고 본질에 대한 질문을 하는 과정

연구를 위해 바다로 파견된 로봇 돌고래가 자신의 존재를 인식하고 탐구하면서 자아가 생기고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이게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이다.

물론, 박사의 남다른 교육이 수반되긴 했지만, 자신을 진짜 돌고래로 인식한 로봇이 자아를 찾고 인식하게 되면서 자신의 본질과 의지를 갖게 되는 것처럼 인간 역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질문을 던지고 탐색하는 과정자체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이라 생각했다.

다만, 후반부에서 박사의 죽음으로 인한 공백이 생기면서 연구자가 손녀를 찾아간다. 그 연구에 대해 하나도 모르던 손녀가 갑자기 역할을 수행하고 연구기밀까지 듣는 다는 설정은 살짝 몰입을 방해하는 느낌이 있어 개연성 측면의 아쉬움을 남긴다.


[고요와 소란] 인간중심사고의 오만

인간이 사물의 소리를 갑자기 듣게 된 세계에 대한 이야기이다. 종교단체가 그 현상을 결국 자신들이 각자 모시는 신의 목소리로 해석하려 드는 모습은 현실적이면서 아이러니했다. 과연 종교란 무엇인지 본질적인 물음을 생각해 보게 만드는 부분이었다. 우리는 사물, 생물의 소리조차 인간의 언어로 번역해서 납득해야하는 지독한 인간 중심적 사고에 갇혀있다. 작가는 이 소란스러운 세계에 갑작스러운 고요를 선물하며 묻는다. 우리가 지구의 주인처럼 굴 권리가 있는가? 이 작품은 인간이 없었던 지구의 원형을 상기시키며 타 존재와 조화롭게 공존할 것을 제안한다.


[달고 미지근한 슬픔] 인간은 무엇으로 살아가는가

데이터세계로 이주한 인간세계에 사는 인간들이 허무를 이겨내는 방식으로 몰두를 선택해서 살아간다. 신체가 없이 삶도 죽음도 없기에 1세대 인간들은 스스로 사라지는것을 택했다. 2세대 역시 그런 정해진 공식안에서 허무를 이기기위해 자신들의 방식으로 어떤 활동들을 하며 살아가지만 결국 도달하는건 허무함 뿐이다. 그러나 삶은 살아야 하는것, 인간으로 살기위해 그들은 본질 즉 물리적으로 자신들을 유지하고 있는 것을 찾으러 떠난다. 의미조차 남지 않은 세계에서 인간은 무엇으로 살아가는 것일까하는 본질적인 물음을 던지고 있었다. 최근 AI 기술의 급격한 발전을 보며 느꼈던 막연한 불안이 이 이야기들과 겹쳐 보였다. 우리도 '제미나이''쳇지피티''클로드'처럼 ai 데이터로만 남아 형태가 사라지는 것은 아닐까.


[비구름을 따라서] 우리의 쓸모는 누가 정하는가

사소한 물건이 차원을 넘어 이동할 수 있는 세계, 그 세계로 가고 싶은 이연의 이야기이다. 쓸모를 결정하는 경계는 누가 만드는 것일까? 우리의 쓸모는 누가 정하는 걸까에 대한 물음을 하게 되는 이야기였다. 결국 이 세계에서 쓸모가 없어져야 넘어갈 수 있지만, 어쩌면 역설적으로 누구보다 이세계에서 쓸모있게 살아가고 싶다는 이야기는 아니었을까?




일곱 편의 이야기를 읽고 아래의 질문들이 떠올랐다.


인간은 과연 무엇으로 인간인가?
더 나아가, 존재는 무엇으로 존재가 되는가.


로봇 돌고래가 조사하고 탐구하면서 자아가 생긴 것 처럼, 수브다니가 인간화를 포기하고 다시 금속피부로 돌아가 자신을 찾는 것처럼, 이곳은 자신의 세계가 아니라며 다른 세계로의 탐구를 하며 떠나간 이경처럼, 형태가 없고 의식만 남아 인간의 형태로 살아가지만 결국 허무만을 느끼고 다시 자신들이 허무가 아닌 추구해야할 본질을 찾아가는것처럼.


인간은 그냥 존재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스스로 의미를 묻고, 선택하고, 탐구하고,

때론 저항하는 태도 속에서 비로소 존재하는 인간이 된다.


자신의 쓸모를 계속 증명해야만 살아남는 시대에 우리는 어떻게 저항하고, 존재하며 살아갈것인지를 자신에게 되물어볼 시간이다. 우리의 쓸모를 증멸할 필요는 없다 그저 존재하기에 살아가는 것임을 받아들이고, 지금 현재를 소중하게 여기며 충실하게 보내는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저항일지 모른다.


+아주 낭만적인 결론도 내보고 싶어졌는데 수브다니가 결국 남상아를 사랑했기때문에 자신과 다르게 세상을 떠난 인간을 보고 자신도 사랑했던 그사람과 동일하게 영속성을 사라지게 하는 것을 택해 금속으로 돌아간거라면? , 두개의 자아가 존재하고 싶어하는것도 결국엔 사랑하는 이가 있었기 때문이었고, 로봇 돌고래가 그렇게 열심히 자신을 찾아간것은 결국 자신을 사랑으로 교육한 박사님때문이라면?, 언급한 진동새의 존재는 사랑이었으며, 인간이 몰두하는 것도 결국 그 몰두하는 대상에 대한 사랑이고 그 사랑으로 우리의 존재를 확인하는 것이라면? 마지막으로 비구름을 따라서에서 다른 세계, 쓸모를 증명하지 않아도 되고, 비가 내릴때만 듣는 라디오가 있는 그세계를 사랑해서였다면. 어쩌면 이 모든 존재의 움직임은 사랑을 향한 몸짓이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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