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치 않은 남성상

시트콤 <순풍산부인과> 박영규 캐릭터 리뷰

by 기로


솔직히 박영규라는 캐릭터의 첫인상은 치사하고 더러웠다.
그래서 나는 그를 등장인물 중 유머를 주는 캐릭터로만 생각했다.


순풍산부인과는 1998년 3월부터 2000년 12월까지 장장 2년 9개월 동안 방영한 시트콤이다. 그중 박영규는 682부작이나 되는 대장정에서 박미선, 선우용녀등과 함께 하차 없이 지킨 등장인물이기도 하다.


극 중에서 오지명의 장녀 오미선의 사위인 박영규는 그렇게 사랑받을만한 캐릭터는 아니다. 장인집에 얹혀사는 것도 모자라 주체할 수 없는 식탐을 뽐내며 여기저기 빌붙어서 얻어먹고 다닌다. 인색하기 그지없는 그지만, 자신의 아내 박미선만을 바라보고 딸 미달이 곁에서 친구 같은 아버지를 자처하며 장인장모에게 애교를 부리며 심심할 때 함께 하는 맏사위 역할을 한다.


내가 박영규 캐릭터에 주목한 이유는 당시 대한민국의 아버지상의 표본은 오지명이었다. 오지명은 잘 나가는 산부인과 원장이지만, 집에서는 고지식하고 무뚝뚝하며 보수적이고 가부장적인 아버지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에 반해 박영규는 외환위기로 인해 직장을 잃고 위신은 없지만, 아내와 함께 장을 보고 장모인 선우용녀와 김장을 하기도 하고 집안의 크고 작은 일들을 함께 하는 인물이었다. 당시의 가장들이 외부의 관계를 가지고 집안으로 돌아와 그 관계들에 의한 체면으로 살아냈다면, 오히려 박영규는 가족 내부와 주변 인물들과의 관계 안에서 노력해 살아남았다.



그는 극 중에서 얌체이자 빈대였고 식탐을 부렸으며 내로남불의 전형적인 인물상이었다. 직장을 잃고 장인의 집에 얹혀살았고, 그로 인해 항상 장인장모부터 처제들의 눈치를 봐야 했다. 외환위기 이후 수많은 가장들이 직장을 잃었지만 그들은 여전히 권위 있고 가부장적인 아버지를 유지했다. 박영규는 그런 의미에서 그들과는 다른 선택을 한 인물이었다.


내가 박영규라는 캐릭터를 다시 보게 된 계기는 의외의 장면에서였다. 동네 반상회 에피소드였다.

특히, 그가 동네 반상회에 유일한 남성으로 참여를 하고 거기서 결국 반장까지 되는 모습은 굉장히 신선하다. 그리고 그가 반장이 되기까지 또 반장으로 활동하면서도 자신이 남성이라는 체면 내세우지 않으며, 함께 하는 동네 여성 이웃들과도 스스럼없이 지내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면서 반장으로서 동네 일을 잘해 시청에서 상까지 받는 성취를 이뤄낸다. 사회적으로 성공한 남성상은 아니지만, 공동체 안에서 성취를 이룬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후에 박영규는 결국 학원에 취업을 하는 데 성공한다. 여기서 나는 결국 박영규가 공동체에서 사회적으로 다시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캐릭터적으로 얌체 같고 전혀 이타적이지 않게 보이긴 하지만 어쨌든 공동체에서 반장활동을 하면서는 최선을 다해 이타적으로 행동했기 때문에 운을 불러온 게 아닐까 추측해 본다.


그래서 박영규는 당시 사회에서는 보기 드문 남성상이었다.

권위 대신 유연함으로, 위신 대신 집안일을 돕는 가정적인 남성으로, 그리고 결국 공동체를 통해 사회로 다시 나아가게 된 다른 의미로 성공한 인물상이었다. 아마 제작진이 의도하고 박영규의 캐릭터를 이렇게 쓴 건 아닐 테지만 말이다.


결국 자신의 운이나 혹은 나아갈 방향을 만드는 길은 나의 주변을 잘 돌보고 그들의 안위를 바라는 일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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