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워진 밤거리를 홀로 걸으며 맑은 별빛 바라보다 한줄기 흐르는 이 내 눈물은 무얼 의미하나요 그대여 그대여 다시 사랑하고 싶지만 너무 늦었잖아요
1988년에 발매한 변진섭의 ‘너무 늦었잖아요’ 의 한부분이다. 문학적인 가사가 마치 나에게도 그런 순간이 있던것처럼 나를 데려가며 공감을 불러온다. 이런 울림이나 공감이 왜 지금의 케이팝에서는 느껴지지 않는걸까? 최근 케이팝이 전세계적으로 큰 인기를 얻고 있는것에 반해 과연 케이팝이 한국 대중들의 공감을 사고, 위로를 받을만한 대중음악의 역할을 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한국의 대중음악이 아닌, 세계시장만을 노리고 소비하기 위한 대상만을 위해 만드는 노래라는 느낌을 지울수가 없다.
예전 노래들을 더 찾아듣게 되는건 아마도 음악을 하는 사람들의 깊은 고뇌와 듣는 이를 위한 공감과 위로, 혹은 희망의 노랫말들이 마음에 남기 때문이다. 거기서 지금의 케이팝에서는 느낄수 없는 카타르시스와 깊은 공감, 향수를 느낀다. 지금의 케이팝은 가사는 영어 위주인데다 한글은 거의 추임새로만 쓰인다. 문학적 표현이나 시적감수성은 기대하지 못한다해도 자국의 국민들이 쉽게 접하고 들을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영어버전, 한글버전을 따로 낼만큼의 수고도 하지 않는다 이젠)
케이팝이 전세계적으로 인기가 있어지는 시기와 맞물려 위에 언급한 80%이상의 영어가사나, 노래의 길이가 짧아지는 것만 봐도 이제 음악은 대중의 깊은 공감과 위로의 산물이 아닌 소비의 도구로만 느껴진다. 그래서 점점 요즘 음악보다는 예전 음악들, 변진섭, 신해철, 김광석, 유재하, 장필순의 음악들에 더 심취하게 되는지도 모르겠다.
케이팝이 세계시장을 노리고 자극적이고 소비적인 전략만으로 자국 대중들의 외면받는 와중에, 유독 눈에 띄는건 우리나라 문학 특히, 여성작가들의 문학이다. <소년이 온다>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을 차치하더라도 지금 대중들에게 읽히는 글들은 거의 대부분 여성작가의 글이다. 개인적으로는 양귀자나 공지영을 좋아해왔기때문에 오래전부터 여성작가들의 작품을 접해오긴 했는데 몇몇을 빼고는 그당시에는 오히려 남성 작가들이 더 두각을 나타내고 대중들의 사랑을 받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치만 최근의 경향을 보면 신진 남성작가는 잘 눈에 띄지 않고 김초엽, 김애란, 장류진, <혼모노>의 성해나 등등 여성작가들의 책들이 대중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것 같다. 그들의 글은 어느덧 장르의 세분화를 거쳐 다양한 독자들에게 카타르시스와 깊은 공감, 감수성을 느끼게 해준다.
이런 현상은 어쩌면 그동안 사회적으로 소외받고 약자의 자리에 놓여있던 여성작가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점잖게 문학적으로 표현해오면서 성장하고 발전해온 산물이 아닐까 생각해보았다. 상대적으로 남성작가들은 그에 반해 기득권의 자리에서 머무르는 경우가 많았고, 가부장적인 시선과 시대가 원하는 감수성의 변화의 흐름에 충분히 응답하지 못한것은 아닐까.
결국 마음에 오래 남는 노래나 문학은 화려한 퍼포먼스도 특별한 가르침도 아닌 ‘진정성 있는 자기 고백’에서 나오지 않을까? 더불어 그걸 소비하는 대중들의 깊은 공감이 그 진정성에 함께한다. 왜 대중들이 한국의 여성작가들에게 열광하고 그들의 책을 소비하는지 지금의 대중문화 전반에 던져볼 만한 물음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