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이야기 6

by 뽀야아빠

업데이트가 늦은 김에 짧게 적어두었던 글 하나 정리해서 올립니다.


동기부여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스스로 동기를 부여했던 것 같습니다. 벌써부터 연말연시를 맞아 송년회가 시작된 듯한데 며칠 전 송년회 겸 술자리에서 옛날이야기를 하다가 불현듯 생각이 나 몇 자 적어봅니다.

제가 일을 시작할 당시에 영업에 대한 인상은 그다지 좋지 않았습니다. 스킨 영업이라고 비하하는 말이 있는 것처럼(요샌 네트워킹 영업이라고 하나요?) 접대는 필수 그 이상의 것이었죠. 그런데 할 줄 아는 것이 영어 밖에 없던 저는 무역업이라고 주변에 이야기는 했지만 결국은 스스로도 나름 좋게 생각하지 않던 영업 사원의 길을 걷게 됩니다. 그래도 무언가 의미를 부여해야 할 듯해서 '무역업을 배워 스킨 영업이 필요 없는 해외 영업을 해야지', 혹은 '전략 마케팅 같은 것을 목표로 해야지' 등의 생각을 항상 했었던 듯 합니다.


무역회사를 거쳐 반도체 회사에 입사를 했고 다시 다른 반도체 회사로 이직을 했죠. 이 마지막 회사는 업무가 다소 자유로웠습니다. 제가 해야 할 일은 특정 반도체를 "중국 외"인 미국, 유럽 등에 판매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래도 상대적으로 먼 지역이다보니 출장 가는 것이 정해진 전시회를 빼고는 직접 영업을 하는 것이 많이 어려워서 일이 많다고 볼 수는 없었거든요. 2009년 정도의 이야기니까 중소기업이 해외 출장을 소위 팍팍 가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관리할 업체도 많지 않고 주로 대리점과의 소통이 업무의 전부였었습니다. 시장 보고서와 같은 것은 대리점에서 올라오는 주간보고를 잘 정리하면 되는 거였고 고객사 관련은 대리점에서 Follow-up 한 내용을 또 정리하면 되는 정도였거든요. 그래서 시간이 많았죠..ㅎㅎ


그 시간을 어떻게 쓸까 고민하다가 직접 시장 정보와 기술 트렌드를 정리하자고 결심했습니다. 전 전략 마케팅(기술 전략) 쪽을 하고 싶었다는 동기가 나름 있었으니까요. 그때부터 누구도 보지 않는... 누구에게도 보고하지 않을 보고서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제 업무는 하루 8시간 기준에서 1시간이면 끝나는 일이라 스스로 일을 만들어서 일을 한 거죠. 전 마케팅이 되고 싶고 그걸 잘할 수 있다고 증명하고 싶었기 때문에 좀 느슨해질려면 계속 다그치면서 만들어낸 보고서를 혼자 읽어보고 즐거워하고 그랬었습니다.


정보도 지식도 없었는데 어떻게 이런 보고서들을 만들었을까 라고 지금은 생각되지만 어차피 저 혼자 볼 연습같은 것이라 맨 땅에 헤딩으로 시작을 했습니다. (아... 그래도 회사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확신은 있었고 당연히 회사가 커버하는 지역과 기술로 한정지어서 했으니 절대로 제 안위를 위해 회사 시간을 쓴 것은 아니라는 점 혹시나 해서 적어둡니다) 당시 저희 회사는 CCTV 쪽이 메인이었는데 이 시장이 소위 '메이저 시장'이 아니라 정보가 거의 없었어요. 그래서 잡지들의 기사가 유일한 소스였는데 잡지마다 다루는 기술이나 업체 등이 좀 많이 달라서 트렌드라는 이름으로 정리하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잡지에서 다루는 기획 기사들의 공통분모를 찾고 그걸 별도로 정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정리한 목록들을 시장의 기술트렌드라고 생각하고 해당 기술들을 공부하기 시작하는 거죠. 누구도 설명을 해주지 못하는 상황이었고 인터넷에 정보도 없어서 오히려 기자분들에게 메일 보내거나 (ㅋㅋㅋ 지금 보면 파이팅은 있었네요) 유사한 단어들을 인터넷에서 찾아서 이런 건가 저런 건가 갸우뚱하면서 나름의 방식으로 기술 내용을 상세히 정리했죠. 그러고 나서 기술에 맞는 업체들을 찾고 그 업체들을 전시장에서 만나면 가서 기술도 물어보고(안타깝지만 전시장에 있는 업체 스태프들은 엔지니어보단 영업이라 큰 도움이 되지 않는 경우가 태반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제 나름의 DB를 만들었었습니다. 회의를 하거나 부서 미팅 등을 하다 보면 아무래도 공부를 좀 한 제가 나쁘지 않은 의견을 하는 경우가 있었고 동기들이 제 보고서를 보고(술 마시고 나 보고서만들어.. 등을 이야기하긴 했죠) 좀 좋게 소문이 나기도 했었습니다. 결국 제가 알고 있는 지식에 깊이감 이 더해지고 좀 더 나은 수준의 보고서들이 만들어지면서 정신 차려보니 전략 마케팅 그룹의 수장이 되어있더라고요.


시약이나 실험기기를 수입/판매하는 회사를 다녔고 그 다음은 TV나 디스플레이에 사용되는 반도체 회사를 다녔고 CCTV에서 이제 자동차 반도체를 만드는 회사를 다니고 있습니다. 기술만 보면 디스플레이 칩에서 카메라, 저장기기, 신호 분할 반도체에 이어 이제 인공지능 반도체까지 보고 있습니다. 스스로에 대한 동기부여, 의미 부여가 여기까지 오게 만들어 준 듯합니다. 위에 적은 것처럼 여전히 저렇게 일하고 있어요. 단지 궁금한 기술이 있으면 인공지능을 사용해서 저 위의 맨땅에 헤딩하는 단계가 줄어들고 더 깊이 있게 공부를 할 수 있게 된 것만 차이가 있습니다.


요새는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만 제 자리에는 여전히 타성에 젖지 말자, 내 하는 일에 스스로 타당한 의미를 부여하자와 더불어 재미있는 말이 있습니다.


나는 월급 쟁이니까 타인이 어떻게 생각하냐가 중요하다. 필요로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직접 관계가 아니더라도 일과 연관성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모든 것을 알아야 한다라고 적혀 있습니다.


흠... 타인이 어떻게 생각하냐가 중요하다.. 요새는 맞지 않겠죠?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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