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내용으로 꼭지를 만들어보려고 했던 것은 아닌데... 생각나는 것들이 많아서 몇 개 더 적어보려고 합니다.
마음의 미로를 뚫고 답을 찾아내야 하는 상사의 이야기입니다.
제가 부장이 된 지 얼마 안 되서인데 중국 지사에 가서 워크숍을 해야 했습니다. 워크숍 이전에 확정해야 하는 것이 몇 가지 있었는데 관례처럼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중 하나가 중국조직을 포함한 전체 연구소 조직도 확정이였습니다. 그때가 대략 12월 초순이었고 조직개편과 관련된 사항은 10월 초쯤 추석 끝나고 공지가 되었으니 대략 2개월의 시간이 지난 상황이었죠.
중국 지사 워크숍 어젠다를 받았는데, 해야 하는 일 중에 조직도 결정이 적혀있는 겁니다.
'잉? 아직도 조직도가 결정되지 않았나? 종종 보고 드리는 것을 봤는데?'
라고 생각하기는 했습니다. 여하튼 전 연구소와 하등 관계없는 사장 직속 별동대(?) 같은 것이라 참관이나 하자라는 마음으로 지사를 방문했었습니다.
하루 일찍 도착했지만 저녁 시간이어서 간단히(?) 저녁을 먹고 담날 아침 일찍 오전 미팅에 들어갔죠. 임원분이 오후 3시 지사에 도착하는 일정이었고 그전에 최종 조직도를 만들어서 보고해야 했습니다. 조직도 보고 담당자(?)가 제 동기 부장이었는데 우선 지금까지 논의한 조직도를 PPT로 열더라고요.
많이 바뀌어 있었고 150명에 달하는 조직이라 한 눈에 파악되지는 않았는데 무엇보다도 눈에 띄는 PPT의 제목이...
"제28차 조직 변경안..."
"님, 이거 진짜 28차야?"
"응... 이제 29차를 만들어야지..."
이게 머지? 어떻게 조직도 정도가 29차까지 갈 수 있지?라는 의문이 들었고 조직 개편 회의가 시작됐습니다. 인원을 이리 배치하고 저리 배치하고 다시 원복 시켰다가 조직 구성을 이렇게도 바꿔보고 저렇게도 바꿔보고.... 결국 29차가 완성되었습니다. 29차의 이름은 이제 보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서 심지어... Draft로 변경되었습니다.
임원분이 도착했습니다. Draft 조직도가 열렸습니다.
"흠... 난 좀 별로인데... 어쩌고 저쩌고...... 잠깐 좀 쉬면서 다시 생각해 봐. 나 담배 피우고 올게..."
머지? 머가 문제지? 저포함 각 부장/이사들끼리 이게 문제다 저게 문제다 그러면서 다시 Draft_2의 조직도로 제목이 변경되고 2차 안(실제는 30차..ㅋㅋ)이 만들어졌습니다.
"흠... 조금 낫기는 하는데... 어쩌고 저쩌고.... 잠깐 좀 쉴까..."
갑자기 답답해졌습니다. 답답한 나머지, 오지랖이겠지만
"어떤 부분이 맘에 들지 않으실까요? 저희는 나름의 효율을 감안해서 만든 듯 한대요..."
"이게 효율적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어떤 측면에서?"
"이러저러한 것을 감안했고 이러저러한 부분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내년 계획은 저러 이러하니까 이 조직이면 문제가 없을 듯합니다"
"유 부장은 XX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그때 알았습니다. 특정 누군가가 맘에 안 들었다는 것을...
"아..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한 번만 더 실무선에서 논의하고 최종안 다시 보고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그 인물을 제외하고 조직도를 만들었습니다.
그 임원분의 피드백은,
"난... XX를 제외하라는 것이 아닌데... 그대들이 이렇게 생각한다는 거지?"
결국 조직도는 컨펌이 되었죠... 나중에 좀 더 시간이 흐른 뒤에 알게 되었습니다. 그 임원분은 본인이 원하는 바를 정확하게 알려주지 않으신다는 것을요.. 그 임원의 마음을 맞춰야 한다는 것을... 마치 마음이 넓은 것처럼 '특별히 오더 할 것은 없어요. 여러분들이 고민해서 안을 가져오면 돼요'라고 하지만 결국 그의 마음이 결정한 것을 맞출 때까지 컨펌은 나오지 않습니다.
여담이지만 식사도 그렇습니다. '점심 머 먹을까? 암거나 추천해 주세요'라고 하죠. '돈가스 어떠실까요?' '아니 다른 건 없나요?' '순댓국 드실래요?' '그건 너무 헤비 하고'....
그래서 결국은 머 드시고 싶으신데요..라고 물어보면 '어쩔 수 없네.. 김밥에 라면 어때?'라고 합니다...
에휴... 무슨 맘인지는 알겠어요. 좋은 사람임을 맘이 넓은 사람임을 보여주고 싶고 무조건 내 말을 들어라고 하는 그런 권위적인 사람으로도 보이고 싶지 않으시겠죠... 그럴 거면 묻고 난 이후 내가 하고 싶은 혹은 먹고 싶은 것 정도는 포기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괜스레 주변 사람들 더 피곤하게 하고 회사 차원으로 확대하면 시간과 리소스 낭비를 초래하는 거거든요.
보상심리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이 잘못된 말인 것은 누구나 알죠. 어린 시절에 상급자들 때문에 고생했던 것을 나중에 시간이 흘러 상급자가 되었을 때 그 힘들었음을 보상받고 싶어서 다시 악습이었던 것을 반복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들 잘알죠.. 헌데 이게 계속 반복됩니다. 왜냐하면 내가 하는 것이 그 악습이었던 것은 아니니까요. 정확히 일치하지는 않으니 내가 악습을 만들어내고 있다고 생각하지 못합니다. 예전이라면 몇 번이고 검토했을 내용을 이제 "짬밥"이 올랐다고 직급이 높아졌다고 바쁘다는 핑계로(바쁘지도 않습니다. 그리 믿는 거지) 슬쩍 보고 적절치 않은 답을 던지는 경우가 있죠. 그래서 본인이 틀리면 인정하기 싫으니 화를 내거나 밀어붙이거나 해서 무마합니다. 상급자가 되면 생각을 더 많이 해야 하고 행동에 고민을 더더욱 해야 합니다. 보상 받으려는 생각이 아니더라도 "이제 좀 편해보자.. 그래도 되잖아"라고 본인을 설득하면 어느 순간 이상한 상사가 되어 있을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