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품 기획에 대하여

제품 기획

by 뽀야아빠

두 번째 직장이 반도체 기업이었습니다. 첫 직장은 무역 상사였고요. 이 두 번째 직장에서 제품 기획이라는 것을 처음 하게 되었습니다. 누가 시켜서 한 것은 아니고 제품을 판매하다 보니 고객으로부터 아쉬운 점들을 듣기도 하고(VOC: Voice of Customers) 경쟁사 제품과 비교하여 부족한 부분들도 지적을 받아왔으니 그걸 반영한 다음 제품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혼자 기획이라는 것을 해봤습니다.


요즘은 자료도 많고 인공지능도 있어서 간단한 아이디어를 가지고 필요로 하는 결과물을 상당히 빠른 시간 내에 높은 완성도로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하지만 2007년 즈음으로 기억하는데 그 시절은 인터넷의 정보마저도 한정적이었습니다. 제품 기획서라는 것을 작성해야 하는데 중소기업이었던 그 회사에는 그런 양식이 존재하지 않았고 일반 양식 중에 하나를 골라서 양식마저도 혼자 만들어야 했지요.


전 운이 없는 것인지 있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만 기본적으로 멘토가 없어 왔습니다. 상급자는 있지만 하는 일이 다르거나 아예 상급자가 오너이거나 머 그런 상황이었죠. 그래서 대부분 혼자 뚝딱뚝딱거리면서 일을 해왔습니다. 얼마 전까지 아니 지금도 가장 큰 스트레스가 제가 일하는 방향이나 결정을 하는 것이 맞는지 틀린 지 고민하는 거였거든요. 이제 50살이 넘은 이 시점에선 그러려느니 하고 있기는 합니다만 여전히 맞나 틀리나에 대해 누군가가 결정해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ㅎㅎ


기획서는 기본적으로 아주 간단합니다. 당시에는 힘들었지만요. 우선 기존 제품의 업그레이드 제품을 만들려고 한다면 기존 제품의 스펙을 적고, 이 제품이 시장에서 지적받았던 부분을 정리합니다. 그리고 경쟁사 제품의 스펙을 적거나 로드맵을 정리해서 우리 제품에 추가해야 할 부분을 정리합니다. 이 두 가지가 핵심이 되며 회사의 자본이 투입되어야 하기 때문에 출시 시점, 예상 판가, 예상 수량을 넣어야 합니다. 회사 차원에서 만드는 기획서라면 투입되는 자본과 인력, BEP 달성시점 등의 구체적인 숫자들이 요구될 수 있지만 영업마케팅부서의 말단이 작성하는, 시장에서의 요구사항을 정리해서 초기 Initiation을 하는 수준의 기획서라면 위의 정보들이면 충분할 것이라고 봅니다.


제 첫 기획서이자 저의 의견이 그래도 반영된 첫 제품의 이름은 MDIN-200이었습니다. 십 수년을 넘어 근 20여 년 전이지만 여전히 기억하고 있습니다..ㅎㅎ 구글에서 이름을 넣고 검색해 보니 다양한 제품들이 나옵니다만 AI개요의 섹션에 설명된 제품은 저 제품이 맞네요. 오래간만에 회사 연혁에 들어가니까 MDIN-200의 첫 납품이 2008년 3월이라고 나오네요. 추억 돋습니다.


다시 돌아와서 그 첫 기획서를 위시로 지금의 회사에 와서는 다양하게 많은 제품 분석, 제품 기획들을 해오고 있습니다. 이제 직접 제품 기획서를 작성하지는 않지만 결재 올라오는 기획서들은 보면 완전히 달라졌다고 느껴집니다.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내러티브(스토리텔링)가 항상 첫 부분에 적혀있더라고요. 예를 들어 우리는 왜 이길 수 있는가? 왜 우리 제품은 성공할 수밖에 없는가가 최상단에 적혀있다는 거죠. 전 그런 게 궁금하진 않는데...ㅋㅋ 그리고 워낙 빨리 시장이 바뀌니까 스펙 분석을 넘어 이 스펙이 언제까지 유효할 지에 대한 전망도 들어 있고 예전에는 NPV라는 수치를 상당히 많이 사용했는데 NPV보다는 시나리오 분석이라는 것이 기본인 듯합니다. 베스트 시나리오, 머 워스트 시나리오 등인데... 읽어보면 재미는 있습니다. ㅎㅎ 그리고 리스크 섹션이라는 것도 항상 나옵니다. 흠... 단지 아쉬운 것은 현장 감각보다는 숫자, 포맷에 다소 집중한 듯한 기획서들이 더 많다는 거네요.


예전 기획서는 무엇을 만들 것인가였다면 요즘은 왜 우리가 이걸 만들어야 하냐에 가까운 느낌입니다. 질문이 더 원천적이고 많아졌어요. 아마도 세상이 그만큼 더 복잡해졌다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반도체나 자동차처럼 호흡이 상당히 긴 비즈니스 영역도 확확 바뀌는 것을 보면 좀 피로하기도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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