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퍼스타 없이 우승하기

시애틀에서 찾은 해법

by 아일랜드림


15회 연장, 24년의 한이 풀리던 날


2025년 10월 10일 시애틀 T-모바일 파크 야구장.

경기는 끝날 것 같지 않았다. 연장 15회. 선수들의 다리는 풀렸고, 팬들의 손톱은 사라진 지 오래다.

그리고 마침내… 매리너스(Mariners) 4번 타자 폴랑코의 끝내기 안타가 터지며 경기는 끝났다.

시애틀 매리너스가 디트로이트 타이거스를 3:2로 꺾었다.

무려 24년 만의 아메리칸리그 챔피언십 시리즈(ALCS) 진출.

2002년부터 2024년까지 시애틀은 2022년 딱 한 번을 제외하고 포스트시즌 문턱조차 밟지 못하였다.

2001년엔 이치로를 앞세워 메이저리그 역대 최다인 116승을 거두고도 ALCS에서 양키스에 패하였다.

심지어 90년대 켄 그리피 주니어, 랜디 존슨, 에드가 마르티네즈 같은 명예의 전당급 레전드들을 데리고도 가을에 번번이 무너졌다.

메이저리그 30개 구단 중 월드시리즈 진출 경험이 단 한 번도 없는 유일한 팀, 그게 바로 매리너스다.

그만큼 그날 연장 15회, 4시간 58분 혈투의 결과는 값졌다. 이번엔 다를 것이다.



단 하나의 실투, 또 한 번 무너지다


하지만 스포츠는 잔인하다.

ALCS에서 매리너스는 토론토 블루제이스를 상대로 원정 1, 2차전 연달아 이기며 확률상 월드시리즈 진출을 확정 짓는 듯하였다.

그리고 10월 20일 운명의 마지막 7차전, 7회.

그 순간, 공 딱 하나가 잘못 날아갔다.

단 하나의 실투. 통한의 역전 3점 홈런. 3:4 패배. 시즌 끝.

그래도 시애틀은 행복했다. 이치로 이후 무려 24년 만에 리그 결승전까지 온 것 자체가, 이 도시에게는 이미 큰 선물이었으니까.




11년의 기다림, 그리고 완벽한 설욕


4개월 후, 2026년 2월 8일.

이번엔 미식축구다. 제60회 NFL 슈퍼볼 결승전에서 시애틀 시혹스(Seahawks)가 12년 만에 롬바르디 트로피를 들어 올렸다.

상대는 뉴잉글랜드 패트리어츠. 2015년 시혹스는 패트리어츠와의 슈퍼볼 결승전에서 골라인 앞 마지막 패스 한 번의 실수로 우승을 빼앗겼다.

11년을 기다린 설욕전. 이보다 더 드라마틱한 복수가 있을까.

시즌 초반 아니, 끝나갈 무렵까지도 시애틀의 우승을 점치는 전문가는 그리 많지 않았다.



‘다크 사이드’가 23살 청년을 울렸다


올 시즌 시혹스의 수비진은 ’다크 사이드(Dark Side)’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상대 공격팀들이 그만큼 무서워했다는 것.

패트리어츠의 쿼터백 드레이크 메이는 올 시즌 MVP 유력 후보였던 23살 젊은이다.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시즌 내내 최고의 모습을 보여왔으나, 그는 이 날 마치 어른들에게 혼나는 어린아이 같았다.

쉴 새 없는 압박과 기습 블리츠에 시달린 그가 당한 쌕(sack, 쿼터백이 볼을 던지기 전 태클 당하는 것)은 무려 8개, 슈퍼볼 단일 경기 최다 타이기록이다.

화려한 개인기는 시스템 앞에 처절하게 무너졌다.




슈퍼스타 없이 이긴다는 것


여기서 흥미로운 공통점이 보인다.

매리너스에는 홈런 1위 포수 칼 롤리가 있었지만, 오타니 쇼헤이나 애런 저지 같은 전국구 슈퍼스타는 아니었다.

대신 팜(farm)에서 길러 낸 젊고 튼튼한 투수 4인방이 시즌 내내 상대팀 공격을 봉쇄하였다.

결국 선발진 평균자책점(ERA) 1위, 퀄리티 스타트 1위라는 기록이 팀을 24년 만에 지구 우승으로 이끌었다.


시혹스의 공격팀, 쿼터백 샘 다널드는 시즌 전만 해도 팀의 약점으로 꼽혔고 시즌 중에도 불안한 모습을 여럿 보였다.

혹자는 미식축구의 쿼터백이란 야구의 1, 2 선발을 합쳐 놓은 것과 같은 중요성을 갖는다고 말한다.

그 대신 시혹스의 감독 마이크 맥도널드는 (상대적으로 주목이 덜한) 수비팀을 리그 최고로 만들었다.

정규시즌 최소 실점 1위, 상대팀 턴오버 유발 1위라는 기록이 팀을 슈퍼볼 우승으로 이끌었다.


그리고… 2021년 창단한 NHL 아이스하키 리그 신생팀 시애틀 크라켄(Kraken)도 마찬가지다.

압도적인 스타는 없지만 두터운 선수층을 앞세워 이번 시즌 플레이오프를 노리는 다크호스팀이 되었다.

야구도, 미식축구도, 아이스하키도. 시애틀 연고 구단들은 한결같이 슈퍼스타 대신 시스템을 택했다.



‘머니볼’과의 기시감


숫자로 보면 더 명확하다.

매리너스의 2025년 연봉 총액은 약 1억 4,500만 달러, 리그 16위.

다저스나 양키스처럼 3억 달러를 넘기는 팀들의 절반에도 못 미친다.

오타니(7,000만 달러)와 저지(4,000만 달러), 단 두 명의 연봉을 합친 금액이 매리너스 로스터 전체 연봉과 비슷하다.


우리에게 영화로도 잘 알려진 2002년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의 머니볼(Money ball) 경영이 떠오른다.

당시 애슬레틱스의 단장 빌리 빈은 심각한 예산 부족 속에서 돈이 아니라 데이터(출루율)만을 가지고 저평가된 선수들을 모아 팀을 꾸린다.

그 해 애슬레틱스는 양키스 연봉의 3분의 1도 안 되는 돈으로 아메리칸리그 서부지구 1위를 달성하고야 만다.

참고로 당시 같은 지구에서 뛰던 매리너스는 애슬레틱스보다 두 배의 연봉을 쓰고도 최종 3위, 포스트시즌 진출에 실패하였다.

매리너스는 그때의 실패를 20여 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반면교사한 것일까.


셀러리캡(salary cap, 연봉 총액 상한제)이 모든 팀에 동일하게 적용되는 NFL도 다르지 않다.

시혹스는 주전 쿼터백 다널드에게 2025년 약 1,300만 달러(리그 18위 수준)만 썼다.

다른 팀 엘리트 쿼터백들의 연봉이 6,000만 달러에 육박하는 것과 비교하면 그야말로 헐값이다.

대신 남은 돈으로 수비와 오펜시브 라인의 뎁스를 두텁게 채웠다.




시애틀에 농구가 돌아온다면


시애틀엔 NBA 팀도 있었다. 슈퍼소닉스.

1979년 우승 한 번, 1996년엔 게리 페이튼과 숀 켐프의 전성기에도 불구하고 조던의 불스에 막혀 준우승. 그리고 2008년, 끝내 슈퍼소닉스는 시애틀을 떠났다.

그런데 최근 시애틀에 NBA 구단 복귀 움직임이 구체화되고 있고, 빠르면 2027년 새 구단 창단이 전망된다고.


만약 시애틀에 농구가 돌아온다면, 새 프런트는 어떤 선택을 할까.

슈퍼스타 한 명에 모든 것을 거는 기존 방식을 따를까,

아니면 같은 동네 타구단에서 증명한 ‘시애틀식 시스템’을 코트 위에도 이식할까.

개인보다 시스템이 강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는 도시, 시애틀의 다음 챕터가 기대된다!




덧) 우승을 위한 마지막 퍼즐


참고로 올해 시애틀 연고 구단들의 선전에는 타 지역 대비 유독 강한 팬덤도 분명 한몫했다.

1995년 매리너스가 타 도시로 매각될 위험에 처했을 때 팬들은 벌떼 같은 응원과 항의로 팀을 시애틀에 주저앉힌 역사가 있다.

2002년부터 20년간 단 한 번도 가을야구에 진출하지 못했을 때에도 팬들은 비운의 에이스 펠릭스 에르난데스(2010년 사이영상)와 경기장을 지켰다.


시혹스에서는 팬들을 12번째 선수라는 의미로(미식축구는 한 팀에 11명이 뛴다) '12s(twelves)'라고 부르며 미국 NFL 구단 중 유일하게 12번을 영구 결번하였다.

이에 대한 보답으로 팬들은 기네스북에도 오른 138 데시벨의 광적인 함성을 내지르기도 하였으며 이토록 거친 응원은 실제 원정팀 오펜시브 라인의 작전을 방해한다.

시혹스의 홈구장 루멘필드에는 항상 12명이 뛴다.



I-405 Exit7 근처에 위치한 시혹스 훈련장(VMAC) - Twelves, 12번 숫자가 선명하다 (출처 : Wikipedia)


시혹스가 우승하자 코스트코에는 기념 와인, 샴페인이 나왔다. 스타벅스도 움직였다 (출처 : KX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