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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면마비의 균형

세상에 나쁜 일만 생기지는 않는다.

by 바카리

평형

얼굴이 무너져 흘러내린 안면마비는 비대칭과 비균형 그 자체다. 얼굴에 힘을 풀고 무표정으로 가만히 있는다면 안면마비를 앓고 있다는 걸 알기 힘들지만, 움직이는 순간 눈코입이 들썩들썩 난리가 나더니 한쪽으로 쏠려버린다. 마치 눈코입이 물 위에 떠있는 종이배가 움직이는 것 마냥 제자리를 찾기 어려워한다.

안면마비로 대칭을 잃어버린 나의 얼굴은 "불안정"해졌다.
평형

과학엔 '평형'(平衡, equilibrium)이란 개념이 있다. 입자 따위가 움직임이 없이 안정적으로 보이는 순간. 팽이가 돌면서 제자리에 가만히 있는 것처럼 보이거나, 헬스장에서 무거운 바벨을 들고 버티거나, 고무줄이 물건을 꽁꽁 동여매고 버티거나 하는 순간이 모두 평형 순간이다. 한 순간이라도 가만히 있는 것처럼 보이면, 평형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수많은 평형이 우리 곁에 있다.


안면마비가 오면, 한쪽 얼굴의 운동신경이 일을 하지 않고 뻗어 버린다. 그럼 근육을 수축시키는 미오신이라는 애도 덩달아 일이 없어진다. 그럼 근육이 축 처진 상태로 움직이지 않는다. 아무리 내가 애를 써도 미오신이 파업을 그만두게 하는 일이 쉽지 않다.
안면마비 전에는, 얼굴 근육이 탱탱하게 당겨줬기 때문에 중력에 맞서 입꼬리와 눈꼬리를 잘 올려줬다. 웃는 모습도 잘 지을 수 있었고, 찡그리거나 놀란 표정도 다양하게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근육이 뼈와 살에 붙어, 중력에 더이상 이끌리지 않으려 간신히 대롱대롱 매달린 상태가 됐다. 비유하자면, 고무줄의 탄성이 없어지고 출 쳐진 실이 된 것이다.


맛있는 국을 끓이려고 했는데, 너무 싱겁다. 그럼 국의 맛은 싱거운 평형이다. 나는 소금을 더 넣어서 맛의 평형을 더 짜게 만들고 싶다. 아이쿠, 너무 많이 넣어버렸네. 국을 휘휘 저으니 국의 맛이 짠 평형으로 변했다.

요새 트럼프가 관세를 마구마구 올리려고 한다. 가격은 수요과 공급으로 결정되는데(시장 균형, market equilibrium) 관세 때문에 공급가가 올라서 물가가 더 높은 상태에서 평형을 이루게 된다.

소금을 넣고 관세를 올리는 것, 이것은 기존의 평형 상태를 다른 평형 상태로 옮기는 외부 작용이다. 나는 외부 작용이 평형을 깨려고 해도, 다시 새로운 평형점으로 도달한다는 사실이 재밌다. 마치 세상의 평화(평형)를 깨기 어렵다는 말처럼 들려서, 뭔가 희망적인 느낌이랄까? (N의 상상)


오, 그렇다면 안면마비에 걸린 나도, 새로운 평형점에 도달한 것 같다!


균형

과학과 같은 학문에서는 '평형'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하지만, 일상에서는 균형이라는 단어를 많이 쓴다.

자기소개서를 써본 적이 있는가? 자기소개서를 쓰다보면 "본인의 장점과 단점(강점과 약점)을 서술하시오"라는 단골 질문을 피해갈 수 없다. 이 질문을 풀어내다 보면 내가 나를 스스로 평가하게 되는 시간을 갖게 된다. 면접관에게 심사 받는 것도 힘든데, 나한테까지도 심사를 받아야 하다니. 이상한 상황이다.

골똘히 나를 평가하며 장단점을 찾다보면, 장점을 조금만 뒤집으면 단점이고, 단점을 조금만 뒤집으면 장점이라는 걸 어렵지 않게 깨달을 수 있다. 그렇다, 성격이 급하다고? 추진력이 좋은 거다. 인내심이 강하다고? 결단력이 약한 거다. 아, 마치 동전의 앞면과 뒷면처럼, 장점과 단점은 서로를 보완하고, 나는 장점과 단점의 줄다리기 사이에 균형을 잡고 서있는 존재였다! 여기도 평형이 도사리고 있었다니.

돌이켜보면 모든 일이 그렇다. 가고 싶은 대학에 떨어졌기에, 다른 학교에서 4년 장학금을 받고 교환학생을 갈 수 있다. 회사에서 평가를 낮게 받았기 때문에, 정신차리고 이직 준비를 시작할 수 있다. 주식에 물려봤기 때문에, 비트코인으로 더 큰 손해를 보지 않을 수 있다. 비극은 정말 비극일까?


안면마비에 걸린 후 내 생활을 되돌아보니, 처음 두려웠던 생각처럼 마냥 비극은 아니었다.

마비된 쪽의 볼은 움직이지 않아서, 마비된 쪽으로 음식을 씹으면, 음식이 볼과 치아 사이에 껴서 나오지 않게 된다. 볼근육이 움직이지 않으니, 외부 도움 없이는 음식물이 탈출하지 못한다. 마치 뒤집어채 버둥대는 거북이 같다. 그 느낌이 아주 답답하므로, 마비되지 않은 볼로만 씹게 된다. 그러면 씹는 속도가 매우 느려지고, 자연스레 음식을 천천히 먹게 된다. 한쪽 입근육도 멈췄으니 입이 크게 벌어지지 않는 것도 덤이다. 식사가 느려지면, 조금 먹게 된다. 먹고 나서 포만감이 올라올 때까지 시간이 충분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간식도 안 먹는다. 볼에 낀 음식이 너무 답답해서 식후 빠른 양치질을 하게 되는데, 간식을 먹으면 또 볼에 이물질이 끼고 다시 양치질을 해야하기 때문이다. 양치질 까짓것 또 하면 되지 않냐고? 입에 물을 머금고 우글우글하면, 입이 제대로 닫히지 않아 꼬부기마냥 물을 뿌~ 해버린다. 그래서 물이 나오지 않게 손가락으로 입에 집게를 물려야 한다.

덕분에(?) 체중이 2주만에 2kg이 빠졌다. 평소라면 조금만 허기져도 간식을 먹었을텐데, 그정도 배고픔을 참는 게 양치질보다 훨씬 쉽다. 안면마비로 몇 달만 더 고생하면, 콜레스테롤 수치가 확 떨어질 것 같다.

54-2.png 양치질하다 물을 뿜는 꼬부기

안면마비에 걸리면 관심도 많이 받는다. 외향인에겐 마냥 나쁜 건 아니다. 안면마비는 평생에 걸리는 사람이 1~2% 정도 밖에 안된다. 인생은 길고 노년에 걸리는 비율이 더 높으니, 사실상 안면마비에 걸려본 사람은 1%도 채 안되는 것이다. 만약 당신이 컨텐츠를 생산하는 사람이라면, 아주 좋은 소재를 얻은 것이다.

나는 안면마비에 걸리기 전에는 안면마비가 선천적이며 영구적인 것이 대부분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직접 안면마비에 걸려 편견도 자연스레 부쉈고, 안면장애에 대해 공감할 수 있는 경험(공감력은 앞으로 점점 더 중요해질 능력이다!)이 생겼다.

안면마비(벨마비)는 통증은 없으나, 외적으로 증상은 잘 보인다. 이 뜻은? 아픈 척이 충분히 가능하다. 힘든 일은 (당연히 피해야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알아서 빼준다. 어쩔 수 없이 운동도 못(안)한다. 이게 좋다는 건 아니지만, 증상이 겉으로 보이지 않아서, 주변 사람이 배려하는 걸 잊는 경우가 있는 질병보다 나을 때가 있다는 의미다.


이 외에도 눈이 잘 감기지 않아서 세상에 돌아가는 일을 한 순간도 놓치지 않는 것이나, 얼굴 비대칭을 줄이기 위해 무표정 얼굴을 유지하면서 주름이 적어지는 것이나, 다른 사람이 내가 화난 것처럼 오해해서 나를 신경써주는 것 등등 자잘한 좋은 점이 있다. 이제는 나도 말하면서 이게 장점인지 단점인지 모르겠으니 넘어가자.


되돌아간 행복, 그것이 남긴 흔적

자정작용 自淨作用
자연은 인간 혹은 외부 요인에 의해 오염물질이 생겨도, 스스로 정화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만약 더러운 폐수가 강에 흘러 들어간다면 많은 물고기와 미생물이 죽을 것이다. 하지만 대자연은 오염물질 따위에 당황하지 않는다. 깨끗한 물로 오염물질의 농도를 낮추고 오염물질을 분해하는 미생물이 투입된다. 시간은 좀 걸릴지라도, 자연은 다시 이전의 모습을 되찾게 된다. 인간이 자연에 저질렀던 많은 사건을 돌이켜 보자. 방사능 오염, 산불, 오존층 파괴, 기름 유출 사건... 하지만 자연은 인간의 실수를 안아주며 다시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간다.


올림픽에서 메달을 따고, 원하는 대학에 합격하고, 로또에 당첨되고. 인생에 기쁜 일은 종종 발생한다.

이별을 겪고, 교통사고를 당하고, 주식 투자에 실패하고. 인생에 나쁜 일도 종종 발생한다.

그런데 그 희노애락이 평생동안 지속되지 않는다. 그 짜릿한 순간과 좌절한 순간은 생각보다 길지 않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은 다시 일상의 수준으로 회귀하게 된다.

나는 이것이 일종의 '심리적 자정작용'이 아닐까, 생각한다. 누가 인간이 자연의 일부가 아니랄까봐, 인간은 자연을 닮은 걸까?


안면마비를 진단받고, 거울 속 삐뚤어진 얼굴을 바라보며 좌절감에 빠졌을 때가 있었다. 안 그래도 피곤하고 힘든데, 나에게 이런 일까지 생기다니. 금방 낫지도 않는다니. 하... 세상이 날 버린 걸까.

입꼬리를 움직일 수 있게 되는데 2주가 걸렸다. 눈을 완전히 감을 수 있을 때까지 3주가 걸렸다. 물을 입에 가만히 머금고 흘리지 않는 데까지는 4주가 걸렸다. 하지만 아직도 안면마비는 완치되지 않았다.

반면에 내 좌절감도 아직 완치되지 않았을까? 나는 아직도 세상을 원망하고 있을까? 물론 아니다. 나도 자연의 일부였는지, 안면마비에 익숙해지고 적응했다. 좌절감은 찾기 어렵다. 나는 다시 이전의 행복감으로 돌아가서 평형을 찾았다.

내가 다시 돌아갔다면, 다시 평형점에 도달했다면, 무엇이 남게 되었을까?

과학에서는 파라미터(parameter)나 포텐셜 에너지(potential energy)가 바뀌었다고 말한다. 쉽게 말해, 변화가 지금 상태 어딘가에 흡수되어, 과거와 현재의 차이가 생겼다는 의미다.

나는 안면마비를 겪었지만 점점 건강을 회복하여 이전 상태로 되돌아 가고 있다. 하지만 병력(病歷, medical history)은 그대로 남아 나를 구성하게 될 것이다. 안면마비는, 나라는 인생에 한 구절의 역사를 남겼다. "건강에 대한 경각심", "안면장애에 대한 이해", "평형과 균형, 그리고 자정작용". 이 흔적이 앞으로 내게 긍정적인 변곡점이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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