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정말 마지막인 거지?”
“응, 이거 가져가.”
그가 내민 것은 손수건이었다. 장거리 연애를 하던 우리가 헤어지는 날. 내가 그에게 마지막으로 받은 붉은 색 손수건. 어디 여행지에서 기념품으로 가져왔다고 해맑게 웃으며 보여주었던 것이었다. 나중에 함께 가서 또 다른 손수건을 가져오자며 그렇게 밝은 모습을 보여줬던 그인데, 이젠 정말 다시는 보지 못할 남이 되는 순간이었다.
“가면서 필요할 거야. 휴지는 버릴 곳이 없잖아.”
그 역시 젖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는 내 마지막 귀로(歸路)에서의 내 감정, 내 움직임 하나하나까지 세세하게 배려했을 정도로 마음 따뜻한 사람이었다.
마지막이 될 얼굴을 마주 보자 눈에서는 그동안 감정을 다스리고 참았던 눈물이 또 다시 새어나왔다. 석별의 고통이 견딜 수 없었다. 마음이라는 것이 어디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가슴 쪽 어느 한 켠이 너무나도 아프게 저려오면서 내 눈에선 그 고통을 어떻게든 분출해야만 하는 것처럼 눈물이 쏟아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 순간도 잠시, 부정할 수도 없이 우리의 관계는 끝이었다. 사후인연(?)이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 이제 이 현실과 나의 세계에서 그는 사라져야 하는 존재가 되었다. 그 자리에 무작정 버티고 있을 수만은 없어, 힘들게 그의 집 현관문을 열고 나섰다. 내가 떠난 후에 빈 집에 남아있을 그는 과연 괜찮을지. 내가 괜히 추억을 너무 많이 남기고 온 것은 아닌지. 나 역시 그의 걱정을 뒤로하며 사랑에서 점차 멀어지고 있었다.
몇 걸음 걷지도 못한 채, 그의 집 앞 벤치에 주저앉았다. 더욱 심해지는 마음의 고통에 주먹을 꽉 쥐고 이를 악물었다. 무언가 느껴지는 이질감에 손을 바라보니, 그가 준 손수건이 꼬깃꼬깃 구겨진 채 보였다. 눈가로 가져가는 순간, 손수건에서는 익숙하던 그의 향기가 났다. 섬유유연제와 무어라 표현하기 어려운 그가 살던 집의 내음이 배어 있는 그것. 눈가로 가져가자 얼굴을 덮는 그 향기는 온전히 그를 내 앞에 마주한 채 그가 내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는 것만 같았다.
‘아, 이 향기도 이제 더 이상 맡지 못하겠구나.’
연신 흐르는 눈물을 손등으로 훔치며, ‘향기와의 이별’을 떠올렸다. 내가 가장 좋아했던 향기. 곁에만 있어도 마음이 따뜻해지는 그 향기를 내가 기억할 수 있을까? 내 손에 들어온 순간부터 점차 흐려지고 옅어져 끝내는 내 향기만 남을 이 손수건이 무척이나 원망스러웠다. 내 스스로는 절대로 다시 만들어 낼 수 없는 향기인 것을 알았기에.
집에 돌아오는 길은 내내 어두웠다. 늦은 밤이기도 했지만, 시각적으로만 어두운 것은 아니었다. 그보다도 더 어두운 것은 내 마음이었으니까. 마치 한밤중에 선글라스를 끼고 세상을 본 것처럼 모든 것이 온통 무채색으로만 보였다. 그날 난 진기한 경험을 했다. 불 꺼진 시내버스를 타 본 경험이 있는지? 친구에게 말했을 때는 “야 무슨 둘리 얼음별대모험에 나오는 유령버스냐? 불이 왜 꺼져 있어.”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 취급을 당했지만, 놀랍게도 그날 나는 그 불 꺼진 시내버스를 만났다.
그의 집 앞 벤치에서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기를 한 시간 정도. 그가 준 손수건을 손에 쥔 채 불 버스를 타러 갔다. 이윽고 내가 그의 집앞에서 탈 마지막 버스가 도착했고, 지친 몸을 겨우겨우 이끌어 그 위에 얹었다. 너무 많이 울어 체력을 소진한 나머지 당장 집으로 돌아가 눕고 싶었다. 올라서자마자 가장 앞 쪽에 있는, 흔히들 앉기 어려워하는 높은 자리(?)에 무너지듯 쓰러져 앉았다.
‘이 버스를 타는 일도 마지막이겠구나.’
또 다시 눈물은 솟구쳐 올랐다. 심적 고통이 심하면 사람이 눈물로도 탈수가 올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며, 그렇게 버스 안에서도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그가 준 손수건은 쓸 수 없었다. 하찮은 내 눈물을 닦자고 내 향기를 묻히면, 그의 흔적이 점차 사라지는 것만 같았다. 우리의 추억에서 나만의 추억으로 바뀌어 갈 이 손수건은 이제 나에겐 그를 상기시켜 줄 수 있는 너무나도 소중한 물건이자 추억의 한 자락이었고 지켜야만 할 무엇인가가 되어 있었다.
공공장소라 목 놓아 꺼이꺼이 울지도 못 한 채, 맨 앞자리에 앉아 코를 훌쩍거리고 눈물만 떨구는 나를 본 기사님은, 배려인지 모르겠지만 시내버스 앞 쪽의 불을 껐다. 그렇게까지 서글픈 모습을 버스를 타는 승객들에게 일일이 보여주고 싶지 않으리라는 추측에서였을까? 아니면 기사님 역시 청춘의 한 자락에 이와 같은 아픔을 남긴 기억이 있어서였을지도. 그 늦은 시각의 버스는 참으로 조용하기도 했으며 참으로 아늑하기도 했다. 그렇게 한 시간여를 달려, 내가 내려야 하는 종점에 다다랐다. 이윽고 완성된 나의 이별이었다.
흘러간 인연을 뒤로한 채, 아직도 그 향기가 기억이 나느냐 누군가 물으면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는다고 말할 것이다. 만약 지금 그 향기가 내 코끝을 스쳐간다고 하면 알 수 있겠냐 물으면 그것도 사실 장담하지는 못하겠다. 이제는 기억하고 싶어도 정말 멀어졌던 그 향기이기 때문에 아마 기억하지 못할 것만 같다. 차라리 무슨 명품 브랜드의 향수였다면 그나마 ‘어, 이거….’ 하고 기억할 수도 있었겠지만, 내가 선택한 향기는 그런 단순한 향기가 아니라 어느 한 사람의 성향이 녹아있고, 개인의 추억이 스며있으며, 그에 더해 그 때의 내 복잡한 감정이 뒤섞인 바로 ‘그 순간’ 에 남은 향기었기에 내가 더 이상 구별하지 못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때와 같은 감정의 동요가 지금은 없기 때문에.
누군가를 기억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사진도 그 예시가 될 수 있고, 주고받은 글들도 그러한 것이 될 수 있다. 하물며 함께 즐겨듣던 노래도 그러하니까. 나는 그 수많은 방법 중 향기를 선택해 한 추억을 고스란히 간직하려 했으나, 기어이 실패하고 말았다. 어떻게 보면 잘한 선택인 것 같다. 지금은 정말 기억나지 않으니까. 그 향기는 이제 내 감성 속에만 존재하고 이 세상에서는 더 이상 꺼내 맡을 수 없는 것이 되었다. 다시는 맡을 수 없는 향기라 더 다행일지도. 그만큼 소중하게 기억될 수 있으니까. 글을 적고 있는 지금도 열심히 노력해 보았으나, 내 코끝은 간지럽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