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 이런 것도 있었네.”
오래된 내 방 구석 책 더미들을 정리하며 발견한 것은 대학생 시절 들고 다니던 노란 속지의 옥스퍼드 노트 한 권이었다. 노란색 바탕에 4색 볼펜과 샤프기능을 더한 zebra 펜으로 형형색색 적어내려간 글귀들. 빼곡하게 차여진 글자 사이에서 그때의 내 열정이 살아 숨쉬는 것만 같았다.
당시 내 머릿속에 대단한 계획이나 원대한 미래가 있던 것은 아니었다. 그때도 지금 직장생활 하듯이 하루하루 본분에 충실해 학교 수업 듣고 과제 해 나가며 해치워 나가는 날들이었을 뿐이다. 흘러간 TV 속 악당들이 밥 먹듯 외쳐대던 세계 정복 같은 거창하고 원대한 목표들은 내 일상에서 1만 킬로미터도 넘게 떨어져 있었다. 나 하나 온전히 건사하기도 힘든데 무슨?
이러나저러나, 그때의 노트를 통해서 알 수 있었던 것은 그때고 지금이고 나는 ‘적어 내려가는 행위’ 자체를 참 좋아한다는 것이었다. 깜지에 버금갈 정도로 빼곡이 채워진 나의 노트. 한 줄을 반으로 나누어 두 줄을 적기도 하고, 온갖 그래프에 붉은색, 녹색 실선을 그려가며 적어둔 알 수 없는 공식과 원리들….
아이러니한 것은, 그렇게 열심히, 소중하게 적어두고 기록했음에도 불구하고 사후 관리가 전혀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내 방 책장 한 구석에 처박아둔 채로 거의 10년이 되도록 단 한 번도 읽어보지 않았으니까. 그러다 이렇게 ‘대청소’를 한답시고 온갖 물건을 꺼내어 푸닥거리를 하는 중에 발견된 것이다. 그 노트가 지금 당장 어떤 대단한 지식을 나한테 다시 전달해 주어 내 삶을 윤택하게 해 주는 것도 아니고 다시금 그때의 열정이 불타올라서 내 삶에 더욱 충실하게 해 주는 것도 아니었다. 단지 그때의 나는 어떤 생각과 마음으로 이렇게 열심히 살았는지 정도만 추측할 수 있게 하는 매개체. 단지 그 뿐이었다. 오롯이 그 시절의 향수를 불러오는 전유물.
뭔가 적어두고 저장하기를 좋아하는 나는 역시 일기를 쓰는 일에도 심취한 적이 있었다. 한창 심취했을 때는 술을 마셨든, 밤을 새웠든 작은 글귀라도 일기장에 조그맣게 끄적끄적 적어내려가기도 했었을 정도로. 그렇게 뭔가 적어내려가기를 몇 년. 일기가 어느 순간 나의 삶에 젖어들었을 때 즈음이 되자 먼저 써 내려갔던 오래된 일기장들은 지난 내 대학생활의 노트처럼 내 방 한 구석에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그때도 아마 같은 동기였을 것이다. ‘뭔가 집에 자꾸 쌓이니 청소 좀 하자.’ 라는 단순한 동기에서 시작된 기록물 정리(?)는 지난 몇 년간의 일기를 훑어볼 기회를 나에게 주었다. ‘이게 여기 있었구나.’ 그렇게 집어든 첫 일기. 내 청춘의 고민이 고스란히 녹아있는 그 결정체를 꼼꼼히 살펴보는 것은 퍽 재미있었다. ‘이 때는 이런 고민을 했었네….’, ‘이 때 이런 일이 있었지.’, ‘아, 이건 정말 적어두길 잘 했다.’ 하는 것들이 몇 번 반복되었을 무렵. 그 다음 일기장을 집어들고 읽어내려가던 나는 곧 데자뷰 현상에 빠지게 되었다. ‘어…. 이 얘기…. 봤던 얘긴데.’
맥락도 없이 당일의 감상에 젖어서 적어내려가는 일기는 항상 같은 고민과 같은 결론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같은 문제, 같은 상황, 같은 대처, 같은 후회. 이는 되풀이되는 상황 속에서 이를 개선하고자 하는 나의 의지가 얼마나 나약했던 것이었는지를 나타내주고 있었다. 하루를 반성하고자 적는 일기가 당시의 나에게는 그저 ‘나는 내 하루를 반추(反芻)하며 더 나아질 내 미래를 그리고 있다.’라는 스스로를 위로하는 행위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렇게 반복되는 내 모습의 기록들을 들춰보며 더는 일기를 쓰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진심으로 반성하였다면 내 자신이 그렇게 반복된 행동과 반복된 상처를 거듭할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았을 것이다.
일기를 쓰지 않은 지가 이제 족히 5년은 된 것 같다. 여전히 나는 3년 전의 내가 했던 고민에 괴로워하고 5년 전에 내가 답답해했던 나의 상처에 갇혀 살고 있으며, 10년 전의 대응방식을 고집하며 새로 떠오르는 문제들에 이를 필사적으로 끼워 맞추려고 하고 있다. 진심으로 반성한다고 나아질 수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어디까지나 사람의 성격은 정해져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다면 글로 적었다면 좀 더 나아질 방향을 찾을 수 있었을까? 그 또한 모르겠다. 그렇지만 과거의 내 모습에 다시금 괴로워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은 그나마 마음의 부담을 덜어준다. 적어둔 과거의 내가 나를 불편하게 할 일은 없어졌으니까. 그래서 나는 더 이상 일기를 적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