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움

욥의 이야기

by 광규
나라면 하나님을 찾겠고 내 일을 하나님께 의탁하리라
욥기 5:8


[미안하다]

지금으로부터 수년전. 학생들이 수학여행을 가고 있던 배가 침몰하여 수많은 인명을 잃었던 참사가 일어났던 적이 있습니다. 그 학생들은 선생님과 동갑인 친구들이었고, 그 뉴스를 접했던 이후로 사람들은 그 시대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국가적인 우울증에 걸렸었다.” 온 나라가 무기력하고 침울함에 빠져있었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그때 사람들은 그렇게도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하나님 어디 계시냐고. 지금 어디에 계시냐고. 저 죽어가는 아이들과 저 아파하는 가족들을 보며 신의 존재와 선함에 대해서 많은 이들이 질문을 던졌습니다. 여러분은 그때. 이들에게 어떤 위로를 전해줄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쉽게 떠오르지 않습니다.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습니까. 그래야 정상입니다. 고민을 하게 되어야 정상이라는 말입니다.


그 시대에 어른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미안하다.” 그들이 만든 세상과 사회의 부조리함이 만들어낸 인명피해를 보며 그때의 어른들은 미안하다 했습니다.

어떤 어른도 “반드시 우리가 너희를 지켜줄게. 다신 이런일이 일어나게 하지 않을게.”이런 말은 해주지 않았어요. 그리고 선생님이 이제 어른이 되어 그때의 제 나이와 같던 여러분 앞에 서있습니다. 이 욥기의 본문을 가지고서, 많은 고민을 했어요. 어떤 말을 전해야할지. 너무 쉬운 말을 전하게 될지.


지금부터는 조금 불편한 얘기를 하게 될지도 몰라요. 기분이 조금 안좋을수도 있습니다.


[상상력 없는 동정심]

신학자 캠퍼 플러튼은 엘리바스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자신들의 가정들이 신적 계시라고 생각하는 교리적 신학자의 전형적인 모습” 그리고 “이런자들의 문제점은 무의식적으로 잔인하다는데 있다. 그들의 교리는 상상력을 둔탁하게하는 끔찍한 힘이며, 상상력 없는 동정심은 결코 도움을 줄 수 없다.”


엘리바스는 전통적인 신앙에 정통해있습니다. 그는 많은 격언와 시편의 찬송시의 형태로 욥을 훈계하고 격려하려고 하였죠. 그는 이런식으로 말합니다. “악인이라 심판받고 악인이라 망한다. 하나님을 찾으라. 결국 그가 너가 잃은걸 회복시키실것이다.”


엘리바스는 어설픈 시도로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나았겠다 말하는 욥에게 하나님의 정의를 변호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4장 7절에서 11절에서 말하듯 엘리바스는 인과응보적 신앙으로 욥의 고통을 설명하려고 했고, 이는 그의 위로와 변증이 정말로 어설픈 시도였음이 드러나게 합니다.


[능력주의]

신학자 권지성씨는 엘리바스의 가르침은 욥이 가지고 있는 딜레마와 상처에 대해서 어떠한 해답도 제공해주지 못하는 전형적인 인과 응보의 신학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는 자신의 경험과 계시와 여러 격언 등 전통적인 신학적 지식과 연구를 통해서 욥을 격려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 그의 신앙은 자신의 친구의 아픔에 어떠한 해답도 제시하지 못하는 아주 오래되고 전통적인 신앙일 뿐이었어요.


인과 응보. 악하면 망한다. 선하니 잘된다라는 신앙은 능력주의를 정당화하고 가진자와 잘된자의 도덕성을 추켜세움과 동시에 개인의 아픔을 개인의 윤리적 문제로 소급시켜 그의 책임이라 말하게되는 오류를 범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욥기는 아주 적나라하게 이런 이스라엘의 기복주의적 신앙 즉 자신의 복을 바라는 신앙에 대해 고발하고 있습니다.


어떤 어른은 말합니다, “너네가 안된건 공부를 열심히 안해서 그래.” 그러나 이미 공부를 통해 계층 이동의 사다리를 오를 수 있는 시대는 지나갔습니다. 성공과 부는 대물림 되는 것이며 여러분이 공부할 수 있다는 환경 조차 물고 태어난 숫가락의 재질에 따라 달라지게 되어있어요. 이는 오늘날 마이클 센델이 자신의 저서 ‘공정하다는 착각’에서 밝히고 있는 바와 같습니다. 성경은 그런 운명론적 사고와 기복주의적 신앙을 꼬집고 있는겁니다. 전형적인 신학자. 전통적인 신앙에 정통한자. 엘리바스의 이야기를 통해서 말이죠. 그의 신학은 결코 고난 받는 이들을 살리는 신학이 아니었던거죠. 오히려 그의 신앙은 현실에 아무런 선한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죽은 신앙이라 말할 수 있었습니다.


[욥의 질문]

욥의 질문이 시사하는 바는 이것입니다. “지혜의 가르침은 현재의 고통을 해결할 수 없다.” 엘리바스가 사용했던 시편적인 찬송과 엘리바스가 사용했던 전해져 내려오는 지혜로은 격언들은 결코 욥의 아픔을 위로할 수 없었고, 오히려 그에게 훈계를 하며 가르치려 들었습니다.


이는 오늘날 “어설픈”신앙 생활을 하고 있는 이들의 모습을 통해서 잘 확인할 수 있습니다. 타인의 고통에 가르치려 들고, 어설프게 복음을 드러내면서 마치 기만하듯이 이들의 아픔을 별거 아닌양 치부합니다. 흔히 말하는 꼰대의 시선이죠.


위로가 그렇습니다. 쉬운 너무 위로가 그렇습니다. 우리가 그동안 해왔던 수많은 동정과 위로가 그렇습니다.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이 말씀을 가지고 가서 고통 속에 있는 이들에게 하나님의 위로를 전하려했지만, 하나님과는 전혀 동떨어진 위로를 하게 될때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런 경험 없습니까. 너무 쉽게 위로가 술술 나왔을 때요. 친구의 아픔을 보고서 쉽고 뻔한 문장들로 그 아픔을 공감하려 했을 때 말입니다.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욥의 친구들의 역할은 사실 여기서 끝난건지도 모릅니다. 그 이후 그 친구들과 욥의 대화는 논쟁으로 이어졌고 결코 욥을 위로하고 고치지 못했으니까요.


엘리바스는 하나님을 찬양하며 하나님이 선한 이를 결국 회복 시키실 것이라고 말하시만, 모두가 욥의 이야기 처럼 해피앤딩으로 끝나진 않습니다. 아픔에서, 그저 그 자리에서 끝나게 될지도 몰라요.


[로마의 평화]

현실은 그렇습니다. 무력한 신앙만으로 쉽게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실천적인 노력이 그들이 가진 신앙적 고민과 결부되어 있을 때라야 비로소 신앙은 세상을 바꿀 수 있습니다. 복음은 다스림을 말합니다. 로마 황제가 다스리던 힘에 의한 평화를 당시 복음이라 말했었고, 이를 다른말로 로마의 평화 곧 ‘팍스 로마나’ 라고 불렀습니다.


복음. 곧 유앙겔리온이라는 말은 그런 시대적 배경을 가지고 쓰여졌던 말입니다. 평강의 왕이라 불렸던 그리스도 예수. 그는 항상 사람들을 만날 때 ‘너희에게 평안 있으라.’ 라는 말을 전했습니다. 로마 황제와 원로원에 의한 평화가 아닌 하나님의 다스림에 의한 평안을 이야기 하는 것이 복음이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세상의 온갖 안락함으로 전해지는 평안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엘리바스가 회복될 것이라 말했던 그런 것들의 회복으로 말해지는 평강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복음은 다분히 실천적인 것이었습니다. 예수는 많은 이들에게 말씀을 가르쳤으나 고치시고 먹이시며 함께하심을 통해서 그 가르침의 본질을 전하셨습니다. 오늘날 많은 이들이 예수를 본받자 말하는 것은 그 처럼 설교하고 가르치자는 말 보다 그와 같은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자 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여러분의 복음의 논리가 현실을 바꾸지 못한다면 그것은 힘에의한 팍스 로마나 보다 못한 평안을 갖고 있다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실제 복음의 본질과는 거리가 떨어진 그런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여러분은 로마의 평화를 원하십니까 아니면 그리스도의 평화를 원하십니까. 여러분의 마음이 진정 원하는 것이 우리는 전하고 있는 겁니다.


[나라면 하나님을 찾겠고]

때문에 엘리바스의 ‘나라면 하나님을 찾겠고’라는 말은 기만으로 밖에 보일 수 없었습니다. 그의 말은 당장 욥에게 줄 수 있는 평안과 위로가 없었습니다. 단지 아파서 눈물 흘리는 이 앞에서 하나님의 정의를 변호하려 했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생각해볼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런식의 정의가 정말 하나님의 정의가 맞을까?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찾겠다라는 말은 엘리바스가 아니라 욥 본인에게서 나와야할 고백이어야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디에 계실 것 같습니까. 어느날 한 스데반이라는 선교사님이 비행기에 올라타 신문을 봤습니다. 그 신문에는 참사가 일어나 여러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는 뉴스가 적혀있었습니다. 선교사님은 말합니다. ‘도대체 하나님은 이럴 때 어디에 계신가?’ 그말을 듣고 옆에 있던 사람이 이런 말을 전했습니다. ‘하나님은 그 장소에. 그 고통 받는 사람들과 함께 있습니다.’


울고 있는 이가 있다면 하나님은 여러분이 찾으십쇼. 그리고 그에게 다가가 함께 울며 그 아픔을 위로해야합니다. 여러분의 모습에서 하나님을 볼 수 있다면 그것이 복음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의 위로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면 그것이라야 복음일 수 있지 않겠습니까?


부조리하고 아픈 현실 속에서 하나님을 전한다는 일은 그 세상에 정면으로 맞서며 정의과 공의를 관철하겠다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즉 쉬운 일이 아니라,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서 싸우는 선한 싸움과 같다는 것입니다.


[사망의 골짜기]

그러나 현실은 그렇게 쉽게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시편의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아니함은.”

하나님을 믿더라도 그가 지나야할 사망의 골짜기가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그런 것입니다. 여러분 앞에 있는 고난과 아픔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다만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신다’라는 고백만이 우리에게 남아있을 뿐입니다.


자 이제 어려운 숙제가 남겨졌습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짝을 걸어야하는 이들에게 당신은 어떻게 하나님을 전할 것입니까? 그 가시밭길을 걸어야하는 이들을 어떻게 위로하겠습니까? 그것이 우리에게 남겨진 커다란 질문입니다. 어떻게 그 상황에서 복음을 전할 것인가.


복음이 다스림을 말한다면, 곧 복음이 세상 돌아가는 논리를 이야기하려한다면, 여러분의 세상을 바라보는 눈은 심판대 위에 오를 것입니다. 그렇게 여러분이 바라보는 세상이 어떤 세상인지에 대해서 사람들은 묻기 시작할 것이고 여러분은 대답을 준비해야할 것입니다.


그곳에서 여러분의 복음의 진정성은 바로 여러분이 바꾼 당신과 그 주변의 삶을 통해서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실천에 의한 선한 영향력이야말로 그 복음이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도구이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바꿀 수 있습니까. 무엇을 바꿀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의 믿음이 엘리바스 처럼 죽은 신학이 되어있을지 아니면 아픈 욥을 살릴 살아있는 믿음이 되어 있을지 우리는 세상의 여러 문제 앞에서 답을 해야할 것입니다.


때문에 믿는다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이 될 수 있습니다. 쉬운 믿음이란 죽은 믿음입니다. 쉽게 말할 수 있는 믿음이란 것은 그만큼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 생각하기 때문이라 그럴 수 있습니다. 여러분. 이런 얘기를 해서 미안하지만, 우리는 이제 어려운 믿음을 가져야합니다. 다루기도 어렵고 실천하기도 어려운 그 불편한 복음을 받아들여야합니다.


[불편한 이야기]

지금까지의 제 이야기가 어렵고 듣기 편하지 않았다면, 저는 그 불협화음을 유도 했음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지금까지의 믿음이 틀렸다라는 식의 말이 듣기 좋을리가 없습니다. 지금까지 듣고 의지해온 격언들과 신앙과 찬양들을 부정하는 듯한 말을 쉽게 듣긴 어려울겁니다.


때문에 제 말에 귀를 막고 마음을 닫고 있었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저는 여러분에게 평화를 주기 위해 온 것이 아닙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싸움을 주기 위해 왔습니다. 여러분에게 선한 싸움을 마칠 때까지 힘써 살아가라는 말을 전해드리기 위해 온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복음이란 현실을 바꾸는 힘이 있어야한다는 다소 귀찮은 말을 해드리기 위해 온 것입니다. 지금까지 편하게 이야기 해왔던 ‘믿는다’라는 말과 ‘위로한다’라는 말에 돌을 전져 파문을 일으키기 위해 제가 이곳에 있습니다.


기독교의 복음이란 때문에 이토록 무례하며 불편하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변화를 촉구하고 실천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행하지 않은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말이 지금까지도 잊혀지지 않고 정금고 같은 말씀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바로 지금. 이순간. 쉬운 위로를 던지지 말라는 말씀을 드리고 있습니다. 여러분. 세상이 그렇게 녹록하지 않음은 여러분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믿음에 어떤 상상력이 있는지에 따라 여러분이 만나는 아픔들에 공감할 수 있고, 그 공감으로부터 시작한 위로가 여러분이 살아가는 세상을 바꿔나갈 것입니다.


[그들이 바꾼 세상은 어디에도 없었다]

한 어르신께서 지하철에 오르셨습니다. 아무도 그분에게 관심을 갖지 않았지만 그분은 입을 열어 복음을 전하려 하셨어요.


“제가 간증을 한가지 하러 왔습니다….”


지하철칸에 있던 어떤 이들은 얼굴을 찌푸습니다. 저도 그들중 하나였어요. 그 복음을 듣는 내내 마음이 불편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사람들에게 민폐를 준다고 생각해서였을까요? 아니면 그분의 종교적 열심에 거부반응을 보인것일까요?

더이상 듣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을 때에 저는 ‘복음이 무엇일까?’하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죽어서 천국에 가고 그렇지 않으면 지옥불에 떨어진다.”


이게 복음의 본질일까요? 여러분은 그게 복음의 전부라 생각하십니까? 그렇다면 이 말 하나를 전하기 위해 예수님이 이땅에 왔던거라 생각하실까요?

이 말 한마디 때문에 그동안 많은 순교자의 피가 땅 위에 뿌려졌을까요?


그분은 예수를 믿어서 바뀌었다 하였지만 예수를 믿는 이들이 바꾼 세상은 어디에도 없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