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이야기
뜻 없이 맑은 하늘이 원망스런 적 있던가.
교회를 떠난 목회자 집안의 청년과 주기적으로 만나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다.
그는 하나부터 열까지 자신이 교회에 품었던 의문과 불만 그리고 상처를 내게 성토했다.
나는 그와 만나기 전날부터 기도에 몰입했다. 그의 연락을 받은 순간부터 만남이 끝날 때까지 지혜를 구해야만 했다. 그러지 않으면 나는 그의 오해와 상처를 덧나게 할 뿐일 테니까...
왜 헌금을 내는지, 왜 십일조를 내는지, 왜 교회에 나와야 하는, 술, 담배, 혼전순결과 동성애. 그리고 언론의 조롱을 받는 정치에 물든 목회자와 교회들...
먼저 죄송하다고 했고, 후에는 원래 성경적 의미는 그렇지 않다고 했고, 마지막으로는 나는 교회가 이렇게 해야 한다고 호소했다.
그가 아픈 만큼 나에게도 애통하는 마음이 있었으니까.
그런 교회라면 본인도 한 번쯤은 가보겠다 하셨다. 그런 교회라면... 그도 그 신앙을 인정하고 존중해주겠다고 하셨다.
내가 잘나서 그런가? 결코 아니다. 내가 더 잘해서 그런 것도 아니다. 나는 아팠을 뿐이다. 나는 병들었을 뿐이며, 병든 심령은 가난했을 뿐이다. 나는 비천했고, 나는 비루했다.
오늘 다시 실망한 이 일들을 그가 물어본다면 또 어떻게 대답할까. 그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계절이 참 좋고, 바람이 너무나 맑았다.
누군가에겐 낙오자에 지나지 않을 나는 실패보다 큰 커리어란 없다. 이 가을에 하늘은 나로부터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다. 너무나 높아 감히 말을 걸지도 못했다.
그래서 그런 걸까 나는 가로등 조차 없는 이슬 맞은 벤치에 앉아 노을을 보는 걸인의 눈빛에서 예수를 보았다. 누구보다 가난한 눈으로 그는 세상을 바라볼 뿐이었다.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면 길바닥에 구부러져 마디가 굳어 펴지지 않는 손을 하늘을 향해 펼칠 뿐일 테다.
그 모습이 나와 다를게 무언가? 적어도 그는 자신의 비참한 가난을 숨기려 하지 않았다. 그는 때 묻은 모습 그대로 땅 아래로 고개를 처박고 하늘을 향해 손바닥을 펼쳤다.
적어도 나보다는 솔직하게 바란 거다. 난 저렇게 기도할 용기를 못 냈으니까.
깊은 통한과 회의를 느꼈다. 돌아가기 무섭다. 다시 뛰어들기 싫다. 겁이 먼저 난다.
딱 신학을 시작하기 전 그때와 같다. 다시 눈두덩이 헐도록 구부려 눈물을 쏟고 나면 주님은 그때처럼 나를 불러주실까.
하루 나를 위로할 술한병 살 돈 벌려는 걸인의 구걸처럼 그 날을 위로할 감격을 내 손이 던져주실까.
그 시절 주님은 내손을 끌어올려 날 품에 안으셨고, 잃었던 아들을 기뻐하며 눈물을 흘리셨다.
너무나 작고 더러워 그 못난 모습에 눈물을 흘리셨다. 존귀하게 무엇보다 아름답게 지으셨건만 스스로 진장에 삼켜진 아들의 한을 보며 그는 통곡하셨다.
돌아갈 엄두가 나지 않는데 그 집을 향하고 싶다. 이런 분을 위해 살아가겠다가 아니다. 죽더라도 이런 분을 위해 죽고 싶다. 병든 내 영혼을 다시 살게 한 결심은 이것뿐이었다.
죽지 못해 살지 않는다. 죽기 위해 산다. 저들처럼 살지 않기 위해 죽는다. 예수를 위해 이제껏 많은 걸인들이 십자가에서 찢겨 죽었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