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로울 때
"괴로울 때 주님의 얼굴 보라"
한 찬양 가사는 이렇게 말한다. 평안의 주님을 바라 보아라..
힘들다 말하는 이들에겐 믿음으로 이겨내라 말한다.
우리가 바라본 주님의 얼굴은 어떨까? 나와 함께 괴로워하시는 얼굴일까? 아니면 내 아픔은 그분께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것인듯 평안하게 웃고 계신 얼굴일까?
그리스도의 평안한 얼굴을 봐서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보며 나의 얼굴이 평안해지라는 말을 해주기란 쉽지 않다.
사람들은 더이상 너무 멀리 있는 신에게 기대려 하지 않는 걸까? 젊은층일수록 자연스럽게 교회와 공동체를 떠나는 작태가 보이고 있다.
그러나 문제의 본질은 교계는 이 문제를 제대로 파악하려 하고 있지도 않거니와 꺼낸다는 해결방안 역시 젊은 성도와 사역자를 배제한 탁상공론에 지나지 않을 구시대적 사고 방식으로만 밀어붙이고 있다는 것이다.
눈물로 기도하면 알아서 해결되리라는 책임감 없는 기도문이 가득한 이때에 청년을 위해 눈물을 흘리지 않으면서 주님 그 소원을 이뤄주시길 바란다.
그 주님은 어디에 계실까? 지금은 홀로 외로이 세상의 풍파와 맞서고 있는 청년들의 곁에 남에 끝까지 지켜주고 계시지 않을까?
사랑과 용서의 하나님을 찬미하며 죄사함 받음의 은혜를 찬양하지만 교회의 죄악은 끊이지 않고 죄인에 대한 태도 역시 성경의 정신을 거듭 역행하고 있다.
나는 사함 받아 기쁘고 너는 돌에 맞아 죽어야한다. 마치 칠칠절 속죄제를 마치고 바로 간음한 여인과 예수를 돌로 쳐 죽이려 했던 유대인들이 떠오르는 이기적인 추함이다.
눈물을 흘린다. 여전히 모르겠다. 저들이 누구를 위하여 감히 어디서 눈물을 흘리는지 그러는 저들이 누구인지 도무지 모르겠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대상에 대한 태도도 닮아갈 수 밖에 없어야한다. 그들이 사랑스러워 도저히 견딜수가 없어야한다.
그와 같이 하나님이 마음 아파하시는 그 곳에 주님의 공의의 목소리를 내지 못한다면 입 안에 가시가 돋고 혀타 불타는듯 견딜 수 없이 괴롭고 애가 타야한다.
그러지 않으면서, 말씀대로 말씀에 의지하여 실컷 나부렁거린다. 그 말씀의 진정성이 없으니 그 말씀에 능력이 있겠는가? 그러나 그들은 있다고 믿는다. 누구도 살릴 수 없는 죽어버린 믿음을 가지고 권능과 권세를 열창한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하늘이 붙잡는 하늘 나라의 위대한 권력을 말이다.
그래서 그들은 내세을 상속이라 말하며 그곳에서의 끊임 없는 쾌락과 안주를 향한 열광에 사로잡혀있다. 오리라했던 정의롭고 공의로운 다스림은 온데간데 없고, "믿습니다 아멘"했던 이들만 참혹한 심판의 면죄부를 받은 채로 신앙 고백을 같이 읊조리지 않은 모든 이들을 조롱한다.
형제를 사랑하라 하지 않았던가? 그들은 구원에 안심하지 않고, 가슴 아파 무너지듯 애통했어야한다. 형제가 지옥불에 떨어지는걸 보고 할렐루야 아멘하는 이들이 도대체 어딜 봐서 그리스도 예수와 닮았다는걸까?
도대체 어떻게 사랑의 하나님의 자식된 이들로 보인다는 말인가? 형제가 영멸하는 유황불에 영헌이 타들어가는데 그놈의 황금의 궁전이 다 무슨 소용인가?
그래서 현세의 가난을 위로하는 기복주의적 내세관은 아가페와 상관 없다 감히 나는 말하는 것이다.
아버지 하나님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그런식의 믿음의 고백이 어디가 선하고 아름다운가? 그런 찬양이 어떻게 그리스도 예수의 영광이 되는가?
사랑과 정의 그리고 공의가 바로서야만 살아있는 믿음이요 성경과 계명의 제정 정신에 입각한 고백이 아닌가?
회복해야함은 진정 하나님을 안다고 착각하는 무지한 우리로부터 일어나야함을, 우리가 먼저 여호와께 돌이켜야할지도 모른다. 그래야만한다. 돌아가자 힘써 여호와께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