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멍에> #1 - 도축된 복음

본업

by 광규김

*본 글은 김규광 전도사의 설교 나눔 원고입니다.


<멍에>


마태복음 11:25 - 30

25.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26.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27.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원죄>

1945년. 마침내 인류사의 가장 큰 비극. 제 2차 세계대전이 종언을 고함과 함께 한반도는 제국주의의 광기로부터 빛을 되찾는듯했습니다. 하지만 이 땅의 비극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몇년이 지나지 않아 대한의 강산 위에는 다시한번 피로 역사가 쓰여졌기 때문입니다.


형제가 형제를 이웃이 이웃을 향해 총과 칼을 겨누며 이념이 불러온 광풍으로 인하여 끔찍한 살육이 온 강산 위를 휩쓸고 지나갔습니다. 무수한 목숨이 땅 위에서 허무하게 끊어졌지만 여전히 진정한 평화는 임하지 못했습니다. 참혹한 역사는 민족의 가슴에 깊은 상흔으로 남았고, 땅에서는 여전히 인권의 존엄함을 지키기 위한 싸움이 이어져나갔습니다.


이처럼 바람 잘 날 없는 역사 속에서도 우리 이전의 세대는 “한강의 기적”. 역사적으로도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눈부신 경제 발전을 이룩하는데 성공합니다. 국가의 경제 형편이 나아짐에 따라 교회 안에서도 셀 수 없이 많은 성도들의 간증이 들려오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 잘 믿고, 새벽기도 잘 나오고, 십일조 잘 내시고, 예배 잘드리면, 사업이 잘되고, 중한 병이 낫고, 자녀들이 좋은 대학으로 진학하시며, 허다한 가정과 교회에 기쁨의 물결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이렇듯 경제 발전 시기의 파도를 타고서 성공한 신앙인의 무용담은 교회의 급격한 양적 부흥과 함께 무리 없이 순항하는 듯 보였습니다.


그리고 이때부터였습니다. 오래전 선교사님들과 믿음의 조상들이 흘린 피로 세워진 이 땅의 교회는 서서히 그리고 가파르게 죽임을 당합니다.


예수를 믿으면 복을 받는다. 너 역시 그렇다. 신앙은 복을 불신은 저주를 불러일으킨다. 마치 무지한 이들을 향한 무속인들의 겁박과도 같이 이 끔찍하게 변질된 신앙고백은 교회의 성장세에 힘입어 전염병 처럼 급속도로 성도의 신앙 안으로 파고들어 충만해졌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많은 이들이 목소리를 높여 지적하고 있는 기성 한국 교회의 원죄입니다.


여러분. 그래서 기도하면 다 이뤄집니까?


그런 복음이 이야기하는 예수님을 믿어서 당신은 행복하셨습니까?

그런 예수께서 쉼을 주셨습니까?


[99%의 기독교인]

오늘날 한국의 기독교 서적의 베스트 셀러는 간증서입니다. 이 말은 조금전 말씀드린 그 성공한 1퍼센트의 간증이 기독교인들이 가장 많이 찾는 책의 주제가 되었다는 소리입니다.


초대교회의 시대부터 교회의 신학의 기틀을 닦은 인물들을 사람들은 “교부”라고 일컬었습니다. 교회가 자리를 잡아가며, 기독교가 공인된 이후에도 초기교회는 이들을 중심으로 신학과 신앙이 발전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이 교부라는 이들은 대부분 당시 로마인들 중에서도 상위 1%에 속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즉, 금수저거나 수완이 좋아서 자금을 지원해줄 스폰서가 많은 이들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들이 신학이 과연 99%의 평범한 로마시민들의 신앙을 대변할 수 있었을까요?


아무리 대단한 사람이라도 인생은 지역적입니다. 인생은 딱 한번 살 수 있어요. 그래서 우리는 모든 사람을 다 공감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생각보다 사람들은 타인의 아픔에 큰 관심이 없습니다.


여러분이 스스로 생각하는 것보다 당신은 타인의 아픔과 고통에 큰 관심과 공감을 못합니다. 아무리 좋은 사람, 좋은 공동체인척 해도 숨길 수 없는 사실이 있다면, 지금까지 약해 빠진 사람들을 필요로했던 교회가 얼마나 있었냐는겁니다.


약할 때의 강함이란 말은 아주 이상적인 얘기에요.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닙니다.

약함이 한국 교회의 베스트셀러가 된적은 없습니다.

약함은 우리가 찾는 이야기가 아니에요.


참 신기한게 그런 사람들이, 예수님은 좋아합니다. 예수님 왜 찾으십니까?


대한민국의 교회의 발흥은 중산층 이상이었어요. 정말로 쉽게 말해서 저소득층에 있는 사람들은 별로 교회안에서 목소리를 얻지 못했습니다. 나름 규모가 생기는 교회 중에서 주일 예배 때 장로님들의 평균적인 사회적 지위가 보이신다면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실 수 있을겁니다.


그리고 아주 불행한 청년의 세대가 있습니다. 이들은 한국 역사상 처음으로 부모보다 가난한 자녀 세대가 될 운명을 목전에 두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여러분이 알고있는 거의 대부분의 청년들의 입술에서는 그 1%의 간증이 나올 일이 없다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생각보다 많은 교회는 당신의 이야기에 별 관심이 없었을겁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어느 순간부터인가 약함을 드러내는 기독교가 아닌, 강함을 자랑하는 교회가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사실 이런 정치적인 선동에 아멘을 외치는 곳은 교회라기보다는 맹신과 광기에 집어삼켜진 사이비 집단이라고 말하는게 더 옳습니다. 예수님 없어도 되거든요.


하나님이 주신 생명은 더이상 신앙 간증의 주제가 되지 않았으며, 1%들의 스토리텔링은 결국 복주심으로 그럴싸하게 포장된 성도 개인의 윤리적인 차원으로 소급되고야 말았습니다.


혹시 이 말을 들으시며 불편함을 느끼십니까?


물론 저는 그런 종류의 간증을 인정합니다. 꿈도 있고, 희망도 있어요. 그들의 삶은 분명 하나님의 복을 받은 인생이고, 그들의 고백은 분명 귀하고 영광스러운 말들로 채워져있습니다. 근데요. 주변을 둘러보세요. 하나님이 버리셔서 아프고, 하나님이 버리셔서 가난하고, 하나님이 버리셔서 가정에 불화가 있고, 하나님이 버리셔서 살려고 발버둥을 치고 있습니까?


물어보겠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에게 최고가 되라고 하십니까? 아니면 하나님은 당신에게 최선을 다하라고 하십니까?

1%의 간증이 당신을 쉬게했습니까? 아니요. 그 1%가 되기 위해 삶을 갈아 넣으라고 말할 뿐입니다.


지금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있는 당신의 처지를 더욱 초라하게 만들뿐입니다. 당신 자신이 얼마나 존귀한 사람인지. 그 모든 것을 망각하고서 되도 않는 희망고문을 하고 있습니다.


크리스천의 성공신화, 복주심의 간증. 정말 좋아요. 하지만 저는 결코 그것이 전부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성경을 읽다보면, 복음은 듣기 편한 말은 아니었습니다.


[도축된 복음]

자고로 음식은 원형에서 멀어져야 먹기 쉽습니다.

우리의 식탁 위에 오르는 먹는 고기는 대부분 가공을 해야합니다. 돼지를 산채로 뜯어 먹고 싶진 안잖아요?


그 생명을 어떤 시설에서 키우고, 어떻게 죽여서 장기를 제거하고의 모든 과정은 먹을 사람에겐 보기 불편할 따름입니다.

생명의 모습을 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아무런 불편함이나 죄책감 없이 음식을 먹을 수 있습니다.


복음도 이와 같습니다.

말씀도 이와 같아요.


양심에 가책이 느껴지지 않는 것.

먹기에 불편하지 않아 보이는 것은

원래의 모습이 거의 남아있지 않아야 합니다. 가공을 해야합니다.


우리는 불편한걸 자연스럽게 피하려고 하기 때문에, 예수가 없는 복음이 편합니다.

불편한건 빼버리고, 달콤한 것만 남긴 설교와 간증. 잘 팔리거든요. 사실 그게 장사가 잘되요.


사실 베스트셀러가된 대부분의 1%의 간증들은 예수 말고 다른걸 끼워 넣어도 그럴싸하게 맞아들어갑니다. 그래도 말이 됩니다.


예수 믿으면 복받고, 잘되고 잘되며 잘되는 고백, 번영신학, 은사주의에 도취되고 기복주의에 침착된 설교. 예수의 이름을 팔아서 장사를 하는 그들의 예수 없는 복음이 듣기 좋은 이유가 뭡니까? 누구나 그러고 싶기 때문입니다.


먹기 편한 복음은 죽은 복음이에요.


그게 전부는 아니겠지만 우리가 지금껏 아무런 불편함 없이 먹을 수 있었던 복음들은 생명을 빼앗은 복음일지도 모릅니다. 도축된 복음일지도 모른다고요.


생명이 없는 말씀은 마음에 평안을 줄거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그저 자기 마음이 편하고자 선택한 비겁한 도피처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당신의 이야기에 예수님을 모셔놓았습니까?

생명이 있냐는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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