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적으로 글 쓰지 마라.

성경스럽지만 성경적이지 않은

by 광규김

사역. 쉽게 말해 전도사의 일을 하다가 보면 글을 써야 할 때가 많다. 그렇기 때문에 대학교 교육 과정에서부터 교수님들과 선배 사역자들은 작문의 중요성을 늘 강조해왔다. 그런 사람은 많지 않지만, 만약 당신이 신학 학사 과정에 있었다면 작문 능력과 경험을 강조하는 말을 한 번쯤은 들어봤을 것이다.


실제로 인스타그램이나 페이스북 같은 sns를 찾아보면 자신의 계정과 페이지에 글을 올리는 크리스천들을 찾아보기 쉽다. 학위나 경력에 상관하지 않고 자신의 간증 등을 책으로 펴내는 이들도 많다. 특별한 경우가 아닌 이상 기독교인이라면 반드시 성경을 읽어야 하기 때문에 독서를 싫어하더라도 익숙한 구절이 몇 가지 있을 것이다.


생각보다 기독교인들은 읽고 쓰는 것에 익숙해질 기회가 많았다.


신학과 신앙은 이성과 감성의 영역을 아우른다. 무엇보다 체계적이고 구조를 갖추고 논리적으로 연구하고 전개해야 하는 신학은 무엇보다 세상을 사랑하고 세상의 아픔에 공감할 수 있어야 했다. 무엇이 그렇기 때문에 이성과 감성에 있어 무엇이 더 옳고 그르며, 무엇이 더 우월하고 열등한 지를 나누는 것은 접근 자체가 잘못된 방식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얘기를 한 것은 당신이 만약 기독교인으로서 글을 쓰고 싶은 사람이라면 꼭 해두고 싶은 말이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 신학 즉 기독교에서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을 하려면 비판적인 고찰과 논리적인 도출이 필요하지만 반드시 세상의 아픔과 주변의 사람들의 마음에 공감할 수 있어야 한다.

신앙을 한다는 건 나름대로의 신 이해와 각종 종교적 언어에 대한 정의를 하고 있다는 말이다. 즉 신앙인의 신앙과 신학은 분리하는 건 올바른 구분이 아니다. 그리고 그런 당신의 신앙을 글로 남기는 건 당신의 신학적 고찰과 성찰을 지면에 쓰겠다는 의미가 된다.

그 글이 신앙인들만을 독자층으로 삼는 글이라면 큰 상관이 없겠지만, 복음 전파를 목적으로 하는 기독교의 특성상 비기독교인에게도 영향을 미치고 싶은 글이라면 나는 신경 써야 할 것이 있다고 말하고 싶다.


바로 기독교적인 글을 쓰기 위해선 기독교적인 글을 쓰지 말라는 것이다.


종교적 색채가 짙은 어휘 사용은 가독성도 떨어질뿐더러 반발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다. 그대가 좋아하고 읽고 배운 성경의 가르침과 복음은 그 단어 사용이 성경에만 나오는 아주 오래된 단어라서가 아니라 그 내용이 아름다워 그랬을 것이다. 그래서 전하고 싶었지 않았을까?


그렇지 않고서 현대 사회에서는 거의 쓰이지도 않으며, 대부분의 독자들에겐 생소할 언어를 사용할 수밖에 없는 건 쓰는 이의 능력이 부족해서일 수 있다. 어떤 방식으로라도 그 단어는 교체하거나 풀어서 쓸 수 있기 때문에 스스로의 어휘력을 신장시키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심지어 성경에 나오는 여러 단어를 사용하더라도 전혀 성경적이지 않은 글이 나올 수 있다. 중요한 건 겉으로 드러나는 비본질적인 영역이 아니라 그 본질적인 것임을 그대도 알고 있지 않은가? 기독교인이라면 외모보다 중심이 중요하다는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성경을 가장 많이 인용하나 가장 성경적이지 않은 설교와 교리가 난무하는 곳이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여러 이단과 사이비가 그렇다. 그들은 성경을 자신의 근거로 삼으며, 성경에서 나온 여러 구절 특히 예언서와 계시록의 문장을 가지고 교리를 설파하지만 그것은 성경이 추구하는 정의와 공의라는 가치와 어긋난 개인의 자기 영달과 여러 잘못된 종말론에 치중되어 있는 경향이 강하다.


성경스러운 말을 쓴다고 해서 성경적인 말이라고는 할 수 없다.


만약 당신이 선한 영향력을 주는 기독교적인 글을 쓰고 싶다면, 기독교적으로 쓰지 말 것을 권한다. 그대의 경전 성경 역시 그 가르침과 복음을 전하기 위해 많은 비유와 이야기를 사용했으며, 방대한 분량의 글을 통해 그들의 철학과 교리를 전하고자 했다. 또한 이미 어려운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서 쉽게 번역한 한국어 성경이 나오고 있다.


아무리 그 의도가 좋더라도 좋은 방식으로 전하지 않으면 목적에 이를 수 없다.


4권의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 조차 당시 사람들이 알아듣기 쉬운 비유를 통해 자신의 말을 전했다. 그들에게 친숙했으며, 그렇기 때문에 글자와 율법에 통달하지 못한 일반적인 사람들에게도 그의 가르침이 전달되었다.


오늘날 성경스럽지만 전혀 성경적이지 않은 것들을 양산하는 어긋한 한국 교회의 모습을 돌아보자. 우리에게 당연하고 자랑스러웠던 것들이 사실은 우리의 욕심과 오해에서 비롯된 것들이라면, 우리는 과감히 돌이킬 필요가 있다.


현대적인 언어로, 친숙한 언어로도 그 아름답고 거룩한 것들을 전할 수 있다.



채플과 수업 중에 교수님과 선배 목사님들께 자주 듣던 말이 있다. 이 말은 이후로 내가 강단에 서기 위한 원고를 집필할 일이 있을 때 일종의 지침 중 하나로 삼는 문장이다. 짧고 간결한 말이지만 곱씹다 보면 설교자로서 시사할 것이 참 많은 금언이었다.


“설교를 잘 써라. 잘 쓰기 힘들다면 재미있게 써라.
재미있게 쓸 수 없다면 짧게 써라.”


사실 정말 어려운 작업은 길고 장황한 설교를 간결하고 듣기 쉽게 쓰는 작업이다. 시인은 짧은 시 한 편을 위해 엄청난 체력과 노력을 소진한다. 종교적 색채가 짙은 글은 당신의 편의에 맞췄을 뿐이다. 하지만 타인에게 영향을 주려는 목적이 있는 글은 그보다 더 수고를 더해야 할 것이다.


그대가 타인이나 예수를 사랑해서, 너무도 사랑하여 전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을 수 있다. 연인이나 자녀를 자랑하고 싶은 사람들의 마음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듯이 말이다. 더군다나 크리스천의 글이라면 당연히 사랑으로 시작하여 사랑으로 끝나야 함이 마땅하다. 그리고 사랑한다면 청자의 입장을 헤아리며, 자신의 편의를 위한 곧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서 글의 가독성과 접근성을 높이기 위한 노력을 들일 필요가 있다.


내가 잘하고 있어서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내가 제일 못하고 있음을 실감하기 때문에 각오처럼 글을 남긴다.


내가 잘해서, 내가 잘하고 있어서 이런 글을 적는 것이 아니다. 언제나 그랬듯, 내 설교에서도 항상 말했듯 내가 제일 못하고 내가 정말 자신 없고 부족하게 느끼기 때문에 이런 말을 전하는 것이다. 내가 그렇게 하고 있어서가 아니라 그렇게 해야 하는 게 맞기 때문에 이런 글을 남기려 한다. 꽤나 자전적인 이 글이 불편하다면 그대도 나와 같은 부족함을 어느새인가 스스로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요지는 이렇다. 기독교적인 어투가 아니라 기독교다운 메시지를 담자.
성경스러운 언어를 사용하는 게 아니라 성경적인 가치관을 전하자.
복음이 그랬듯 사랑이 그러했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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