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부로 간증하지 말라

성경스럽지만 성경적이지 않은 #2

by 광규김

한국 개신교의 부흥사는 대한민국의 경제발전 시대와 궤를 함께한다. 그러나 교회를 확장하고 교인수를 증가시키는 종교의 양적 성장과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며 주의 겸손과 고난에 동참하는 영적 성숙은 궤를 함께하지 않았다.


경제와 교회가 함께 성장함에 따라 성공가도를 달리는 교인들의 간증이 쏟아져 나왔고, 이 목소리가 교계의 주류가 되었다. 그리고 맘몬의 반석 위에서 쌓아 올린 교회는 시대를 거듭할수록 세상의 조롱의 대상이 되었으며, 선교사들의 피로 세워진 교회는 이 땅 위에서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다.


그들이 했던 말은 비슷했다. 그전에 믿음이 없을 땐 방황하여 잘 되어도 탕진하고 실패했으나, 예수를 영접하고서 기도와 예배를 열심히 하고 헌금과 십일조를 잘 지켰더니 하나님이 은혜 위에 은혜를 더하사 지금처럼 사업이 번창하거나 자녀가 잘되거나 병에서 고침을 받아 건강해졌다는 둥 마치 약장수가 약을 팔듯 자신의 이야기와 사연을 전했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들의 말에 연신 “아멘”이라 외치며 자신도 이러한 복을 받게 해 달라는 희망 어린 기도를 올렸다.


“믿는 자는 아멘으로 화답하라.”


여러 교회의 설교를 듣다 보면 쉽게 들을 수 있는 이 말에 “예수를 믿어 당신도 이와 같은 복을 얻습니다.”란 문장이 함께 온다면 대중의 화답은 어떨 것 같은가? 놀랍게도 확신과 바람에 가득 찬 목소리가 우렁차게 예배당을 가득 메운다. 그리고 이런 모습을 보며 비기독교인과 안티 크리스천 그리고 개혁의 의지를 가진 젊은 신학도들은 비웃음과 조소를 날렸다. 생리적인 거부감이 드는 물질적 성공에 대한 추종은 이미 시대가 변하며 도태된 어긋난 열심을 대표하는 사례가 되었을 뿐이다.


은혜와 복과 사랑과 구원이란 희망찬 단어를 남발하는 간증이 오늘날은 쓰이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바로 그 간증으로부터 소외된 자들의 목소리를 지우며 가망 없는 희망고문을 하고 있어서가 아닐까?


복음서에서 말하는 ‘팔복’에 해당되는 이들은 당시 유대인이 이해하고 있던 ‘성경적인 복’으로부터 소외당한 부류의 사람들이었다. 가난하며, 애통하고, 의를 위하여 핍박받는 이들에게 복이 있다 말한 성자의 말씀은 그 시절 한국 교회에서 그토록 열창하던 복의 간증과는 달랐다. 이 괴리감을 보고서 누가 틀렸다 할 수 있겠는가? 예수인가? 아니면 그들의 기복주의인가.


당신이 받은 은혜가 타인에겐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감동받고 받지 않고는 간증의 화자가 될 그대가 정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오히려 그대가 고백하는바 경전이라 받아들인 복음서에서 서술하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라. 그는 가난했으며, 그는 병들고 가난한 이들과 함께했고, 민족적으로 소외당하고 비난받는 이들의 친구가 되었다.


“나는 세리와 창녀의 친구라.”


시간이 그토록 오래 흘렀음에도 교회가 하지 못했던 일은 그들의 하나님을 따라 이들의 친구가 되지 못했음이다. 함께 악행을 저지르며 살아가라는 뜻이 아니라 그대의 복에 해당되지 않는 이들을 찾아가 함께 살아가라는 의미가 아니었을까?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에겐 자랑스러운 간증이 누군가에겐 몹시 폭력적일 수 있다. 거부감이 들면서도 동의할 수 없는 반발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섣불리 간증하는 콘텐츠를 만들려 한다면, 고민해보라 자신으로 인하여 그리스도가 오해받을 수 있음을.


신은 죽었다 말하는 세상에서 그대가 전하고 싶은 게 무엇일까? 아끼고 사랑하는 것을 전하려면 그만큼 신중하고 정성스러운 과정을 거칠 필요가 있지 않을까.


가난한 이들에게 복이 있다는 예수의 설교는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 난제로 남겨진 구절 중 하나다. 간증을 하려는 많은 이들이 예수를 자랑하고 싶은 것인지, 자신의 성공과 회생을 전하고 싶은 것인지 구분이 쉽게 되지 않는다. 교회 안에서야 열광적인 반응을 기대할 수 있겠지만, 여전히 성경은 말한다. 공의가 결여된 말들은 얼마나 공허한 외침일 뿐인가.


당신은 예수를 믿으면 당신처럼 잘되고 잘 살 거라고 말하고 있지만, 세상의 부는 한정되어있고, 그것은 소수의 몇 퍼센트에게 집중되어있다. 당신은 예수를 믿는 극빈층을 설명할 수 없으며, 예수를 믿는 병자와 장애가 있는 이들을 설명할 수 없다. 정작 그대가 믿는 예수는 복음서의 여정 내내 병들고 가난한 이들을 찾아갔는데도 말이다.


그대의 언어와 글이 무엇을 닮고, 담을 수 있는지를 잘 생각해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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