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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서호 Jun 19. 2024

니체의 초인(Übermensch)은 정말 가능한가?

니체의 반도덕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내 본능과 욕망이 끌리는 대로 살아가는건 정말 그 누구든 원하는 삶이 아닐까요. 이게 정확히 니체가 주장했던 반도덕(anti-moral)적인 철학관입니다. 니체는 주체의 힘에의 의지를 긍정하고 강조해요. 인간은 자신의 힘과 본능을 표출하려는 의지가 자연스럽게 존재하고 그걸 표출하여 남을 굴복시키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라는거에요.

 하지만 도덕과 법은 인간의 이러한 자연적 권리이자 본능을 억압하는 금욕주의를 제창하죠. 이런 도덕의 양상을 니체는 ‘노예도덕이 승리했다’ 라고 서술해요.


 니체는 도덕을 이분화하여 나눠요. 중세의 기사계급과 성직자계급의 대립적 양상이 도덕에 그대로 흘러들어가 기사계급의 특징을 빼닮은 주인도덕과 성직자계급의 특징을 빼닮은 노예도덕을 산출했다는 것이에요. 주인도덕은 자신이 지닌 힘에의 의지을 긍정하며 자신에게 있어 좋음의 가치를 스스로 정초해내요. 하지만 노예도덕은 이러한 주인도덕을 악으로 규정하고 원한감정을 품으며 자신들이 절대적으로 선하다 논하며 힘에의 의지를 억압하기 위한 금욕주의를 강조하죠. 이들은 스스로 자신의 좋음의 가치들을 생산해내지 못하고 사회적 규범을 좋음으로 규정하고 순응하는 사람들이에요.

 도덕의 역사는 이런 노예도덕이 승리하여 우리에게 욕망과 정념을 절제하고 법과 사회적 규범에 따라 인간의 자연적 본능을 억압하려 한 역사라고 비판하는거죠. 니체는 이를 뛰어넘어 자신의 철학적 귀결점으로 위버멘쉬가 되라라고 지목해요.

 근데 여기서 주의해야 할게 있어요. 웨버멘쉬를 보통 초인이라고 번역하는데, 니체랑 칸트에게 있어서 초월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에 주의해야 해요. 둘 다 초월적 형이상학계로 나아가자라는게 아니라는 점에서 그러해서 요즘에는 그냥 원어를 살려 ‘위버멘쉬’라고 부르고 있어요.

 위버멘쉬는 영어로 번역하면 ‘over-man'이에요. 나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는 사람 정도로 번역하면 적절할 것 같고, 실로 니체가 위버멘쉬를 통해 전달하고자하는 것이 스스로 내 좋음의 가치를 능동적으로 창출해내는 인간이 되라는 거에요.

 즉 주인도덕을 다시 긍정하며 힘에의 의지를 표출하고 새로운 언표들의 행진을 창출하는 사람을 위버멘쉬라고 하는데, 전 항상 니체의 이런 귀결점에 의문을 가져요.


 개인적으로 저는 유물론적 척도들을 굉장히 강조하고 고려하는 편인데, 니체나 실존주의같은 경우 각각 위버멘쉬가 되어라 요청하고 실존적 존재가 되어라 요청하잖아요. 근데 이 요청이 유물론적 소여태들을 무시한 채 이론적으로만 가능하다는거죠.

 예컨대 미리 주어진 가족, 그로부터 나온 경제적 상황, 인종이나 성별, 그리고 민족 등의 요소들은 우리가 위버멘쉬가 되고자 하는 욕구를 가로막아요. 예컨대 고대 근대 사회라면 계급도 영향이 있죠. 하지만 니체의 주장대로라면 우리는 자연상태로 돌아가야 하는데 이건 또 불가능하다는 말이죠.

 그래서 항상 니체 철학을 마주할 때 아포리아에 빠져버려요. 니체가 개인의 파토스적 측면을 강조한 건 충분히 긍정적으로 수용되지만 그 귀결점에 도달해서는 위버멘쉬가 도대체 뭐를 의미하는지 모르겠어서 이에 대한 더욱 용이한 이해가 가능한 설명이 있다면 공유해주시면 너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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