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주의의 낭만시

"낭만적"이라는 수식어에 대하여

by seoho

흔히 낭만주의 하면 문예운동이나 그것의 한 종류로 인지되며 특히나 '사랑'에 관련하여 '낭만적' '로맨틱'이라는 수식어가 사용되는 경향이 강하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낭만주의에 대한 기만이다. 낭만주의의 화두는 문화와 예술에 국한하여 해석한다면 그것의 근원지인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화두를 간과할 경향성이 크기 때문이다.

먼저 낭만주의에 대해 살펴보기 위해 몇 가지 구분해야 할 것들이 있다. 먼저 초기 낭만주의와 후기 낭만주의를 구분해야 한다. 초기와 후기를 관통하여 존재하는 공통적 화두는 '공동체의 복권'이다. 초기 낭만주의학파는 이 공동체를 '바로 여기'라는 지상에서 실현시키려 했다면 후기 낭만주의의 공동체 복권의 목적성은 피안으로 넘어가게 된다. 예컨대 후기 낭만주의는 초기 낭만주의의 공동체 복권의 문제 의식에 경도되어 보수주의의 가장 큰 흐름으로 넘어가게 되기도 하였으며, 후에 나치에 의해 파시즘의 프로파간다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더 나아가 낭만주의를 당시 또 다른 조류였던 계몽주의와 명확한 대립상에 두는 것은 심각한 오류이다. 예컨대 계몽이 이성을 강조했다면 낭만주의가 감성을 강조했다는 식의 단순화된 설명은 초기 낭만주의자들이 대거 계몽의 영향에 있었다는 점을 간과할 위험이 있다. 낭만주의자들은 이성의 계몽의 결실이라고 믿었던 '프랑스혁명'의 굳건한 옹호자들이었으며 결코 이성을 져버리지 않고 이성과 감성의 적절한 조화를 요구했다. 또한 초기 낭만주의자들이 칸트와 피히테의 계몽주의적 교설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는 점 또한 눈여겨 볼만한 요소이다.

낭만주의자들이 강조했던 것은 분명히 예술과 사랑의 아이러니가 맞다. 그들은 가장 이상적인 국가는 예술적 국가라고 했으며, 사랑의 이로니(아이러니)가 경도된 이성의 규율을 간파할 막강한 힘을 지닌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낭만적 국가의 근본이 되는 것은 시민 개개인들이 자신의 유적 능력을 온전히 사용하여 자족적인 문화Bildung를 형성할 힘이 근저에 자리한다.(Bildung은 한국어로 여러 개념어로 번역된다. 도야, 교양, 문화, 고양 등의 단어로 번역되지만 전반적으로 '수준을 향상시키다'라는 뜻을 포함하고 있고 이 개념이 헤겔에게로 넘어가면 '지양하다aufheben'라는 의미를 지니는 변증법적 개념어로 사용된다.)

횔덜린, 노발리스, 슐레겔 형제, 청년 헤겔은 이러한 문제 의식을 공유하였으며, 그 중 낭만주의의 근간을 쌓아올린 낭만주의 학파의 대가인 프리드리히 슐레겔은 독자적으로 살펴볼 만 하다. 그러나 해당 글에서는 개개인이 지니고 있는 낭만주의적 특징을 서술하지는 않으며, 전반적으로 낭만주의 학파의 문제 의식과 방법론을 설명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한 시대를 주름잡던 이들은 흔히 '낭만주의' '낭만파'라고 불린다. 그러나 그것은 1805년 후기 낭만주의 그룹에 적용되어 불렸으며 오늘날의 낭만주의라는 의미가 굳혀진 것은 1820년대에 이르러서이다. 또한 '낭만주의' '낭만파'라고 지칭될 때는 오히려 풍자적인 의미가 강했다. 1700년대 후반 초기 낭만주의자들은 자신들을 '낭만주의' '낭만파'라고 지칭하지 않았다. 이러한 후대의 해석에 의해 바라본 낭만주의는 앞서 기술했듯이 본질적으로 문학 비평 운동, 문예 운동 이었으며 기존의 조류와 반작용하는 하나의 낭만시Poesie를 제출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낭만시는 명백히 정치적이고 윤리적이며 도덕적인 개념을 포함하고 있다. 이 단어의 기원이 되는 '시적인 것poietikos'은 원래 무언가를 만들고 창조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근원지는 고대 아테네로 거슬러 올라가며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조우할 수 밖에 없게 된다. 특히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학문을 세 가지의 부류로 나눴는데, 이론(관조), 창조(시적인 것), 실천(정치)이 바로 그것이다. 포에지(낭만시)의 개념을 이렇게 바라본다면 낭만시는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재생산하고 창조하는 것으로 '자기-비판'의 능력을 포함한다. 왜냐하면 무언가를 창조하거나 생산할 때는 끊임없이 대상과 나의 의식을 바라보며 그것의 비판점을 찾아 더 나은 것으로 도야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낭만시 개념은 슐레겔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1800년 『포에지에 대한 대화』에서 [...] 분명하게 문학의 어떤 장르나 형식으로 낭만적인 것을 기술할 수 없다고 결론 내린다. 대신 그는 일반적인 미학적 성격으로 그것을 설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가 말하듯이 낭만적인 것은 문학의 "한 종류"가 아니라 "한 요소"이다. 보다 중요하게는, 명시적으로 시적인 것the poetic을 인간 존재 안의 창조적 힘 그리고 사실상 자연 그 자체 안의 생산적 원리와 동일시함으로써 슐레겔은 의도적으로 포에지의 좁은 문학적 의미를 깨뜨린다.

F. Beiser, 김주휘 옮김, 『낭만주의의 명령, 세계를 낭만화하라』, 44p.

바이저의 해석에 따르면 슐레겔은 낭만시를 문학의 한 종류로 제한하지 않았으며, 그러한 문학을 창조할 힘을 인간의 내재적 요소들에 깃들어 있는 것으로 바라보았다. 그렇다면, 낭만주의자들의 목표는 개개인에게 깃들어 있는 낭만시를 충분히 도야Bildung하여 사회와 국가, 그리고 모두가 하나의 예술 작품이 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이며 각 인간의 개별적인 능력들을 하나의 문화로 형성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여기서 니체나 라깡을 접한 사람은 그들의 '위버멘쉬'나 '쥬이상스'의 개념과 낭만주의자들이 추구하고자 하는 화두가 비슷하다는 것을 명확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쉽게 말해, 낭만주의자들은 인간 본성에 깃들어 있는 낭만시의 힘을 통해 경도된 세계의 제도들과 규율들을 바꿀 수 있는 막강한 힘을 생산하고자 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살았던 시대상을 잠깐 살펴보아야 한다.

1790년대 그들은 계몽의 결실인 '프랑스혁명'을 목격했다. 그러나 동시에 계몽의 비극을 바라보게 된다.

1790년대 후반에 낭만주의자들이 직면하고 있는 일반적인 문제는 이제 분명해져야 한다. 이성을 배신하지 않은 채 어떻게 계몽이 남긴 공백을 메울 수 있을까? 비판의 자율성을 버리지 않고서 어떻게 자연과 사회의 통합을 회복할 수 있을까?

F. Beiser, 심철민 옮김, 『계몽, 혁명, 낭만주의』, 407p.

프랑스혁명과 근대국가의 탄생은 개인에게 평등과 자유의 가치를 일깨워줬지만 동시에 공동체로부터 개인은 소외되는 현상이 발생했다. 이성을 통한 계몽은 자연을 합리적이고 계산적이게 바라보게 했으며, 이로부터 자연의 신비, 아름다움, 그 가치를 잃어버렸다. 인간은 더 이상 자연과 유기적 전체를 이루고 있지 않으며 자연으로부터 소외되어 존재하게 된다.

자연과 인간의 조화, 그리고 공동체와 개별자의 조화는 바로 낭만주의자들이 문제시했던 중심적 화두이다. 여기서 낭만주의자들은 개인성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정언명령, 내재적 명령으로 도출되는 칸트와 피히테의 의무 윤리학과 충돌하게 된다. 여기서 '사랑'이라는 키워드가 등장한다. 슐레겔은 사랑을 감정으로, 즉 실체로 이해하는데, 이 사랑이야 말로 바로 진정한 공동체의 유대이며, 미적 즐거움의 가장 높은 형태라고 설명한다.

낭만주의자들이 사랑을 통한 유대를 제출하는 방식에서 그들은 고대 그리스를 또한 많이 참조한다. 헤겔에 의하면 고대 그리스는 "아름다운 인륜"이 만연한 곳으로 개별자의 영혼 모두가 공동체의 특성과 부합하지만 그럼에도 개별자의 자유가 소거되어 있다는 문제점을 안고 있다. 낭만주의자들과 청년 헤겔이 경도 되었던 것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공동체를 복권시키기 위함이었음을 알 수 있다.

세계는 낭만화되어야 한다. 그렇게 되어야만 인간은 본래의 감각을 재발견할 것이다. 낭만화는 다름 아닌 사물의 힘을 질적으로 끌어올리는 것을 말한다.

Novalis, Schriften II, 45p.
낭만주의적인 사랑의 윤리학이 기독교적인 것이 아니라 보다 고전적인 뿌리를 갖는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그것은 사도 바울의 아가페agape보다 플라톤의 에로스eros와 더 많은 유사점을 갖는다.

F. Beiser, 김주휘 옮김, 『낭만주의의 명령, 세계를 낭만화하라』, 69-70p.

낭만적 시적 국가를 만드는 일, 즉 세계를 낭만화 하는 일은 사랑의 자기-실현 적인 윤리학을 발견하는 것이다. 바로 이 사랑을 통해서만 공통의 인간성을 실현할 수 있으며 고유한 개인성을 개발할 수 있다. 또한 오직 이 사랑을 통해서만 우리는 대립하는 힘들을 통일시킬 수 있다.

사랑은 감정이지만, 그렇다고 개별적인 감정은 아니다. 개별적인 감정은 삶의 일부이기 때문에 이 개별 감정으로부터 전체적인 삶이 나오는 것이 아니다. [...] 사랑 속에서 삶은 자신을 발견하며, 그것도 이중화로서, 이 이중화의 통일로서 발견한다. 이렇듯 삶은 전개되지 않은 통일로부터 시작해서 도야를 통해 완벽한 통일에 이르기까지 원환을 그렸다.

G.W.F. Hegel, 「종교와 사랑에 대한 단편들」, 445p.

이렇듯 낭만주의의 사랑은 대립자들을 통일시키는 막강한 힘이자 공동체의 유기적 생을 불어넣어주는 공동체의 복권 원리이다. 이 낭만적 사랑은 무조건적이고 희생적인 사랑이 아니라 불완전한 현실에서 온전한 이상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그러한 사랑을 말한다. 그렇기에 우리가 '낭만적'이라고 할 때는 비단 무조건적인 자기희생을 의미하고 자신의 열정을 소훼하는 특성들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낭만적'은 불완전한 시대상에서 상호적 주고받음인 사랑을 통해 개인의 능력을 온전히 개발하는 것으로 이해하는게 합리적으로 보인다.

삶을 낭만화 하는 것은 내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삶의 환경과 시대상을 비판함과 동시에 자기 비판을 행하는 일이다. 왜냐하면 끊임없이 비판적인 자아만이 무언가를 새롭게 창조해내고 생산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잠정적 능력을 끌어올리기 위해 교육Bildung을 제공하고, 스스로 도야Bildung하는 것. 그것이 바로 낭만주의가 제출하고 있는 삶의 태도이다.


참고


F. Beiser, 김주휘 옮김, 『낭만주의의 명령, 세계를 낭만화하라』, 그린비, 2008년

F. Beiser, 심철민 옮김, 『계몽, 혁명, 낭만주의』, 도서출판b, 2020년

Novalis, Schriften II, no. 105

G.W.F. Hegel, 정대성 옮김, 「종교와 사랑에 대한 단편들」, 그린비, 2018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