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대충 살자

뭐가 뭔데

힘내며 살아가기

by 장병조

"Which is Which."

내가 가장 좋아하는 문장이다. "뭐가 뭔데?"

처음 문구를 접한 것은 2020년 봄이었다.

그날 나는 '거울나라의 앨리스'라는 영화를 보게 되었다.


*(스포 주의)*


책을 읽은 사람이라면 모두들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앨리스는 언제나 꿈에서 깨어난다는 사실을. 그리고 아주 흥미롭고 생생한 꿈에서 깨어나 본 사람이라면 알고 있을 것이다. 그 꿈에서 깨어나는 게 얼마나 아쉬운지를. 특히 꿈속에서 길게 느껴지는 시간을 보낼수록, 많은 사람들과 정을 나눌수록 그것에서부터 헤어 나오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를.


영화 거울나라의 앨리스에서 앨리스는 언제나처럼 꿈에서 깨어난다.


앨리스가 꿈에서 깨어나기 직전에 모자장수는 떠나기 싫어하는 앨리스에게 이런 말을 전한다.

"우리는 언제나 네 꿈속에서 존재할 거야."


하지만 앨리스는 현실세계로 돌아가길 아쉬워하며 모자장수에게 이렇게 대답한다.

"하지만 꿈은 꿈일 뿐이잖아."


이때 모자장수가 앨리스에게 의미심장한 마지막 위로를 건넨다.

그것이 바로 이 문장이다.

"Which is Which_뭐가 꿈이고 뭐가 현실인데."

common.jpg 거울나라의 앨리스 스틸컷 _ 출처 : 네이버 영화

모자장수가 이야기한 "Which is Which?"는 우리에게 너무나도 익숙한 말이다. 그것은 우리가 정답을 알 수 없는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인간이 정의하고 만든 '이론' 안에서는 인간들끼리 약속한 정답이라는 게 존재한다. 하지만 대자연, 우주, 초인간적인 관점에서 어떤 이야기를 나눈다면 우리는 그 무엇도 감히 정답이라고 확신할 수 없다. 우리가 모르는 영역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Which is Which?_뭐가 뭔데?"라는 말을 굉장히 좋아한다.


이 문장은 내가 어떤 고민 속에서 헤매고 있을 때 편하게 선택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이 문장은 내가 확실하지 않은 삶에 확신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준다.

아무도 모르며 아무도 설명할 수 없는 것으로 가득한 이 세상에서는 내가 믿는 것이 곧 답이라는 걸 알려준다.

때로는 내가 믿는 것만이 나의 삶에서 만큼은 진실이라는 점을 깨닫게 해준다.


나는 다음과 같은 상황들과 마주할 때 주로 "Which is Which"라는 말을 사용하곤 한다.


첫째, '꿈과 현실'을 구분할 때이다. 과연 무엇이 꿈이고 무엇이 현실일까?


나는 어릴 때부터 너무나도 생생한 꿈을 꾸곤 했다. 매번 꿈이 이어지는 자각몽 '루시드 드림(lucid dreaming)'과 같은 꿈을 꾼 적도 많았고,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지만 현실일 때도 있었다. 오늘까지도 여전히 꿈이 너무 생생해서 진짜일까 봐 꿈에서 깨어나 카톡과 노트북을 뒤져보는 날이 존재하고, 과연 이 정도 수준의 꿈이 진짜라고 할 수 없는 것인지 의문이 들기도 한다. 엄마랑 비슷한 꿈을 꾸고 같은 시간에 깨어나 같은 이야기를 나눈 적도 있었다.


그리고 이런 경험들 속에서 내가 분명히 느낀 것은, 꿈을 기억하는 한 결국 꿈은 나의 현실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정의한 현실은 말 그대로 우리의 약속일뿐, 그것이 현실인지 아닌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둘째, '삶과 죽음'을 구분할 때이다. 과연 무엇이 삶이고 무엇이 죽음일까?


유명한 말 중에 이런 말이 있다.

"우리는 두 번 죽는다. 영혼이 육신을 떠날 때 처음으로 죽고, 그를 기억하는 마지막 사람이 죽을 때 다시 죽는다."


그렇다. 우리가 가진 '상식'이라는 것에 의하면, 육체의 영면이 곧 첫 번째 죽음을 의미한다. 이런 면에서 동시대에 살아가는 사람 중 이미 죽은 사람은 없다. 하지만 두 번째 죽음의 관점에서는 그 결론이 다르다. 한 사람의 육체는 이미 죽음에 이르렀다. 하지만 그들은 다른 사람들의 기록에, 기억에, 추억에 남아 현실에 영향을 미친다. 즉, 죽었지만 살아있다. 이런 시각에서 보았을 때, 우리가 생각하는 죽음이 과연 진짜 죽음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리고 육체적 죽음 뒤에는 정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을까.


셋째, '현실과 비현실'을 구분할 때이다. 과연 무엇이 현실이고 무엇이 비현실일까?


이때 "Which is Which"는 굉장히 좋은 답변이 된다. 비교적 최근에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이 시뮬레이션일 수도 있다는 가설이 등장했다. 현재까지 과학이 밝힌 바에 근거할 때 그 가능성은 굉장히 낮은 수준이라고 하지만(카더라), 어떤 사람들은 되려 그 반대라고 주장한다. 시뮬레이션이 아닐 가능성이 굉장히 낮다고 한다. 그리고 이런 이야기를 덧붙이곤 한다.


"당신이 보는 것 외에 다른 것이 존재한다는(혹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가?"

"게임에서 우리가 캐릭터를 조종할 때, 캐릭터가 컴퓨터 밖에 있는 세상을 볼 수 있는가?"


즉, 현재까지 우리는 오감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확실히 알 수 없다. 그러니까 우리는 현실이 비현실이라도 그것을 인지하지 못한다. 물론 이 단어 자체도 인간이 정의한 것이라는 게 흠이지만.


이런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는 나는 "Which is Which"라는 말이 마음에 들었다. 뭐가 뭔지 모른다고 말해버리고 나면,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삶이 편안해지곤 했다. 그 말을 해버린 뒤로는 그저 내가 믿는 것만이 진실이고 진짜였다. 설령 그렇지 않더라고 해도 별 일 일어나지 않았고, 지금까지 잘 살아왔다.


이런 나를 보고 남들은 정신병자라고 말하며 미친 사람이라고 할지언정,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결국 그들도 자신이 믿는 게 진짜라고 생각하니까. 그것이 진실이라고 믿으니까. 내가 정신병자라는 걸 과연 그들이 알 수 있을까? 그 사람들은 그냥 그렇게 믿고 싶으니까 믿는 것일 뿐이다. 그건 그들 사이에 존재하는 하나의 약속일뿐, 진짜가 아닐 수 있다.


오늘 글은 제법 주저리주저리 길게 여기까지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까지 철학적인 이야기를 길게 이어가며 이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

빅뱅 당시에 계산했을 때, 내가 지구 상에 태어나서 지금까지 존재할 수 있을 확률은 얼마나 됐을까?

(그나저나 빅뱅이 과거의 일이라고 확신할 수는 있을까? 당연히 없다.)


그것은 아마 인간의 계산법으로는 '0.0000000···············1%' 아니면 '100%'였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니까, 애초부터 내가 태어나 지금까지 존재할 운명이었다면 그 확률을 100%가 된다.

말 그대로 나는 태어날 운명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굉장한 우연에 의해서 내가 태어났다면 그 확률은 0%로 수렴한다.

어쩌다가 빅뱅이 터졌고, 어쩌다가 우리 은하가 생겼고, 어쩌다가 태양계가 생겼고, 어쩌다가 지구가 생겼고, 어쩌다가 지구에 생명체가 생겼고, 어쩌다가 인간이라는 종족이 생겼고, 어쩌다가 우리 조상님들께서 살아남았고, 어쩌다가 수십억 인구 중에 부모님이 대한민국이라는 땅에서 만나셨고, 어쩌다가 결혼하셨고, 어쩌다가 수많은 정자 중에 하나가 생존했고, 어쩌다가 그때 그 시간에 내가 태어났고, 어쩌다 보니 아직까지 살아 있다. 그게 우연히 이루어질 확률을 우주의 시작부터 지금까지 존재하는 모든 경우의 수를 따져가며 계산한다면, 결국 그것은 0으로 수렴한다.


그러니까 결국 모든 것은 "Which is Which"이다.


'0.0000000···············1%'와 '100%'중 무엇을 믿든지 말든지, 그 무엇을 선택하든지 말든지 그것은 결국 나의 마음이다. 그리고 뭐가 뭐든 상관없다. 결국 중요한 것은 내가 지금 이 글을 쓰고 있고, 당신께서 나의 글을 읽고 계시단 사실이다. 그리고 그것마저 실존하지 않는 것일 수 있으며, 그것에 대해서 어떻게 믿든지 말든지는 본인의 자유이다.


결국은 내가 믿는 것만이 진실이 된다.

"Which is Which"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