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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커피를주세요 Mar 05. 2022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복한 시지프

사뮈엘 베케트, <이름 붙일 수 없는 자>(1953)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우리는 침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존재론에 관하여 이야기하는 <논리철학논고>(1922)에서 비트겐슈타인은 이렇게 말한다. 이 유명한 명제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질문이 선행되어야 한다. ‘말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인간은 오감을 통해 존재를 느끼고, 이성적이며 논리적인 사고를 통해 감각을 해석하여 비로소 그에 의미를 부여한다. 존재를 느낄 수 있는 것, 그것을 해체하고 분석하여 인간의 언어로 재정립할 수 있는 것. 이것이 바로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전지전능하지 않기에 우리의 감각과 이성에는 근본적으로 한계가 존재한다. 그렇다면 오감으로 느낄 수 없는 존재는 어떠한가. 우리는 자신 있게 그것이 존재하거나 혹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는가? 예를 들어 신(神)과 같은 존재. 오감으로 느낄 수도 없고, 논리적 사고를 통해 그 존재의 범위가 확정될 수도 없는 존재. 이에 대한 답은 아마도 ‘모른다’일 것이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의 존재를 자신 있게 긍정하거나 반대로 부정하는 행위는 존재에 대한 기만이며 거짓말이다. 정직한 자들은 거짓말하지 않고 기만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정직하기 위해서 그에 대해 침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게 내가 이해한 <논고>의 7번 명제에 대한 나름의 해석이다.


        하지만, 하지만. 이 해석을 앞에 두고 이 말이 입에 맴도는 것은 왜일까. 모르는 것을 말하지 않는 것은 가능하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말하지 않는 것은 가능하다. 인간의 감각과 이성의 한계는 명확하다. 따라서 정직한 인간에게 저 명제는 틀렸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는 과연 그래야만 하는 것일까. 자신의 한계 앞에서 뒤돌아서는 것, 그것이 인간이 정직하기 위하여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일까. 알베르 카뮈는 1943년 출간한 에세이 <시지프 신화 Le mythe de Sisyphe >에서 이러한 질문에 대해 답한다. 그리스 신화의 시지프는 신들을 기만한 죄로 거대한 바위를 언덕 꼭대기로 밀어 올려야 하는 형벌을 받는다. 끊임없이. 그러나 바위를 언덕 꼭대기에 올려놓는 순간, 바위는 자신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언덕 아래로 굴러 떨어진다. 그러면 시지프는 다시 언덕을 내려가 바위를 밀어 올린다. 끊임없이. 무익하고 희망 없는 이 일을 그는 영원토록 반복한다. 불가능을, 한계를 알면서도 계속해야 하는 자. 카뮈의 부조리 철학은 사실 이 책에서 이미 완성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실은 이런 것 같아, 만일 지금 이 상황에서 내가 여러 사건들에 대해 말할 수 있다면, 나는 내가 말할 수 없는 일들에 대해서도 바로 말해야만 할 뿐만 아니라, 그리고 또, 이게 훨씬 더 흥미로운 건데, 그러니까 내가, 이게 훨씬 더 흥미로운 건데, 그러니가 내가, 이런 기억이 안 나네, 뭐 상관없어. 그래도 나는 반드시 말해야만 해. 나는 절대로 입 다물고 있지는 않을 거야. 절대로.” (p.9~10) <이름 붙일 수 없는 자>의 화자(이하 ‘화자’)는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입을 다물지 않겠다고 말한다. 말할 수 없음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하는 것을 그만둘 수 없는 것. 그것은 글쓰는 자의 숙명이다. 인간의 불완전함에 따른 언어의 불완전함. 글을 쓰는 자는 무엇보다도 이 언어의 한계를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으며, 그래야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전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존재에 대해 말해야만 하는 존재가 바로 작가다. 작가는 불가능에 대한 글을 쓰는 과정에서 ‘말할 수 있는 것’의 범위를, 사고와 언어의 지평을 넓힌다. 몸을 꼬고 비틀며, 피를 흘리고 고통에 몸부림쳐가면서. 시인은 감각과 이미지를 통해, 소설가는 언어의 배열과 논리를 통해 그 일을 수행한다. 불가능한 것에 대한 도전, 그 일련의 과정이 바로 문학이다. <이름 붙일 수 없는 자>는 베케트라는 이름의 시지프가 희망 없이 바위를 밀어올리며 써 내려가는 처절한 자기고백이다.


        베케트는 그의 전작들인 <머피>(1938), <몰로이>(1951), <말론 죽다>(1951) 등에서 등장인물인 ‘머피’, ‘몰로이’, ‘말론’ 등의 대리인을 통해 언어의 실험을 계속한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모습을, 입을, 사건을, 개념을 통하여. 나의 외부에 있는 인물과 사물, 개념을 빌어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표현하기. 이것은 일반적인 소설의 이야기 방식이다. ‘화자’ 또한, 처음에는 ‘화자’의 생김새, ‘화자’가 있는 곳, ‘화자’를 지나치는 인물들을 통하여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러나 ‘화자’는 ‘머피’나 ‘몰로이’, ‘말론’과는 무언가 다르다. 그는 작중에서 전작들의 등장인물들이 자신을 지나치는 것을 ‘관찰’한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이곳에서 그것들을 반드시 몰아낼 거야. …. 일단은 더럽히고, 그 다음에 싹 청소하기.” (p.21) ‘화자’는 타자의 존재에 대해 이야기하며 자신의 존재를 설명하고자 하나, 이야기가 전개될수록 ‘화자’는 오로지 자기 자신을 이야기하는 데 집중한다. 수많은 등장인물과 사건들, 시대와 배경에 대한 묘사들, 인과관계에 대한 설명과 묘사, 개연성과 논리성, 현실에 대한 핍진한 묘사... 흔히 우리가 말하는 ‘잘 쓴 소설’의 조건들. 이것들은 사실주의 문학의 특성이다. 베케트는 이 모든 것들을 부정하고 파괴하는 것으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외부의 모든 것을 걷어내고 오로지 말하고자 하는 바에만 집중하기. 이것은 베케트가 쓴 모든 글들의 특징이기도 하다. (이는 그의 이후 작품인 <죽은-머리들>이나 <소멸자들>, 그에게 노벨상을 안겨준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두드러진다. 인과성과 개연성 따위 저 멀리 버려둔 작품들.)


난해한 문장을 이해하기 위한 악전고투의 흔적들. (출처 : 본인)


         “(…)그런데 말이지, 모르겠어, 내 입이 있는지 느껴지지가 않아, 내 입안에서 뒤죽박죽으로 맴도는 말들이 느껴지지가 않는다고, (중략) 정적 가운데 방울져 뚝뚝 떨어지는 침묵, 나는 그게 느껴지지가 않아, 내 입도 느껴지지가 않고, 내 머리도 느껴지지가 않아, 그러면 귀는 내가 느끼고 있을까, (중략) 나는 내가 느끼는 게 뭔지 모르겠어, 내가 뭘 느끼는지 말 좀 해봐, 그럼 내가 누구인지 당신들에게 말해줄 테니까, …” (p. 147)  ‘나’는 어떻게 ‘나’의 존재를 구분하는가. ‘나’는 어떻게 ‘나’라는 존재를 인식할 수 있는가. ‘나’를 ‘나’로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나’라는 존재의 경계는 점점 희미해진다. ‘나’는 희미해지고, 사라지고, 언어만이 남는다.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화자’와 베케트 본인의 경계가 희미해진다. “마치 내가 그자인 양, 아니다, 마치 내가 그자가 아닌 양, 사실 그자는 멀리 있지 않으니가, 그자는 여기에 있거든, 말하는 자가 바로 그 사람이잖아, 그가 그 사람은 나라고 말하고 나서, 아니라고 바로 부정하네,’ (p.180) 이건 흡사 베케트 그 자신의 목소리가 아닌가.


        “(…) 여하간 늘 아무 말이나, 그렇게 늘 똑같은 소리를, 시간을 보내려고, 지껄여댔던 거야, 그러고 나니, 아무 이유 없이는, 흘러가지 않는 시간에, 갈증을 느껴서, 그만두고 싶은데, 그만둘 수가 없어서, 이유를, 말하고 싶은 그 욕구에 대한, 그만두고 싶은 그 욕구에 대한, 그럼에도 그만둘 수 없는 그 불가능한 상황에 대한, 그 이유를 찾아보려고 애를 쓰다가, 이유를 발견하고는, 다시 잃어버리고, 다시 찾아내고, 또다시 잃어버리고서는, 더 이상 찾아보려고 하지 않다가, 또 찾으러 다니고, 그러다 또 발견하고는, 다시 잃어버리고, 더 이상 찾아보려고 하지 않다가, 또 찾으러 다니고, 그러다 또 발견하고는, 다시 잃어버리고, 더 이상 찾아보려고 하지 않다가, (중략) 야 이거야 소리치고는, 에이 아니잖아 한숨짓고, 할 만큼 했어 울먹이다가, 아직은 아니야 부르짖고는, 계속해서 찾으러 다니다가, 정신줄을 놓아버리고는, 그 줄을 다시 잡으려 애쓰며, 계속해서 지껄이고., (…)” (p. 151) 이다지도 처절한 실패와 좌절과 몰락의 연속이라니. 일련의 실패를 반복하며 베케트는 끊임없이 언어의 실험을 통해 ‘말할 수 있는 것’을 찾는다. “내가 더 이상 말하지 않게 될 때 나는 비로소 나에 대해 말하게 될 것이다.” (p.162) 끊임없는 반복을 통해 언어의 순수성에 도달하기. 한계까지 자신을 소진했을 때 비로소 ‘나’라는 존재에 가 닿을 수 있다는 역설. 이건 이미 이길 수 없는 싸움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태도. 이런 부조리한 인간의 마음 속은 얼마나 황폐할 것인가.


        그러나 ‘화자’는 멈추지 않는다. “(…) 어쩌면 이미 다 끝난 일일지도 몰라, 그 단어들이 어쩌면 진작에 나한테 말을 걸었을 수도 있어, 그 단어들이 어쩌면 내 이야기의 문턱까지, 내 이야기로 통하는 문 앞까지 나를 데려갔을 수도 있고, 에이 설마, 만일 문이 열리면, 내가 있을 거야, 침묵이 있겠지, 내가 있는 그곳에, 나는 모르겠다, 나는 그걸 영원히 모를 거야, 침묵 속에서는 누구도 알지 못해, 계속해야만 해, 나는 곧 계속할 거야.” (p.198~199) 카뮈는 <시지프 신화>에서 말한다. “산꼭대기를 향한 투쟁, 그 자체가 인간의 마음을 가득 채우기에 충분하다. 행복한 시지프를 마음속에 그려보지 않으면 안 된다.” 베케트는 <몰로이>, <말론 죽다>, <이름 붙일 수 없는 자>의 3부작 소설에서 투쟁했고, 패배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을 때까지 투쟁을 계속했다. 그는 행복했을까? 사실 나는 모르지.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하자면, 아마도. 그는 행복했을 것이다.


- 2018.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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