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lla

1부 2장

by GivemeL

인천공항 새벽. 세혁은 출국 수속 줄 끝에 서 있었다. 새벽 세 시에 집을 나섰는데, 공항은 이미 사람들로 가득했다. 어디론가 떠나는 사람들, 어디선가 돌아오는 사람들. 세혁은 그 사이에 서있었다. 카운터 직원이 짐이 규정보다 2킬로 초과라고 했다. 세혁은 캐리어를 열어 뭔가를 꺼내려다 그냥 닫았다. 초과 요금을 냈다.


인천에서 시카고까지 열네 시간이 걸렸다. 대부분 자지 못했다. 창밖은 어두웠고 구름이 없었다. 영화 두 편을 틀었다가 둘 다 껐다. AI가 뭔지 설명한다는 기내 잡지를 펼쳤다가 덮었다.


세인트루이스 람버트 공항. 터미널이 넓고 천장이 높았다. 한국 공항처럼 사람이 빽빽하지 않았다. 어딘가 텅 빈 것 같은데 소음은 있었다. 짐을 찾고 픽업존으로 나왔다.


"세혁 씨?"


피켓이 보였다. '미주리과기대' 흰 셔츠, 단정한 머리. 얼굴이 반듯했다. 세혁보다 어려 보였다.


"강목석입니다. 수연 선배한테 얘기 들었어요."


"고맙습니다. 생각보다 젊으시네요."


목석은 웃으며 캐리어를 들었다. 자연스러운 동작이었다. 세혁은 그 자연스러움이 어색했다. 도움을 받는 게 익숙하지 않았다. 출구로 나가면서 공항 직원이 뭔가를 물어왔다. 목석이 영어로 대답했다. 유창했다. 세혁은 그 옆에 서 있었다.


주차장에 차가 있었다. 낮고 날렵한 차였다. 세혁이 한국에서 본 적 없는 디자인이었다.


"혼다 S2000이에요. 오래됐는데 잘 달려요."


조수석에 탔다. 시트가 낮았다. 문을 닫자 차 안이 조용해졌다.

목석이 시동을 걸면서 오디오를 켰다. 피아노 소리가 흘러나왔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았다.


"재즈 좋아하세요?"


"네... 에."


"누구 좋아하세요?"


"아.... 그냥 즐겨 들어요."


목석은 고개를 끄덕이며 핸들을 잡았다.


"이건 빌 에반스예요."


피아노가 계속 흘렀다. 목석은 핸들을 가볍게 두드리며 리듬을 탔다. 몸에 밴 동작이었다. 영어도, 공부도, 음악도... 이 사람한테는 전부 그냥 일상이었다. 세혁은 창밖만 봤다. 서른두 살, 바둑 하나. 그게 전부였다.


I-44로 접어들었다. 처음엔 세인트루이스 외곽의 넓은 도로였다. 한 시간쯤 지나자 풍경이 바뀌었다. 완만한 구릉이 이어지고, 도로 양옆으로 참나무 숲이 끝없이 펼쳐졌다. 이름 모를 강이 가끔 도로 옆으로 스쳤다. 하늘이 넓었다. 서울에서는 5분만 달려도 건물이 바뀌는데, 여기는 30분을 달려도 같은 풍경이었다.


"형은 바둑 얼마나 두셨어요?"


"오래됐어요."


"몇 단이예요? 설마 9단?"


늘 듣던 질문이었다. 대답하기가 쉽지 않았다. 프로기사 단이랑 아마추어 단은 다르고, 기원 급이랑 인터넷 단도 다르다. 어디서 어떻게 두었느냐가 다르다. 세혁은 그냥 인터넷 8단이라고 했다.


"와, 그럼 바둑클럽 꼭 오세요. 우리 대학에 있어요. 조금 두는 친구들도 있고요."


"이 중부 시골에 바둑클럽이 있어요?"


"여기선 저를 T라고 불러요. 형도 그렇게 부르세요."


빌 에반스가 끝나고 다른 연주가 나왔다. 목석은 이름을 말해줬다. 세혁은 들어본 적 없는 이름이었다. 고개를 끄덕였다.


Rolla mo. https://www.facebook.com/groups/historicroute66/posts/2610385365830972/




"롤라 다 왔어요."


롤라는 작은 도시였다. I-44에서 빠져나오자 메인 스트리트가 나왔다. 피자집, 중국 식당, 드럭스토어. 사람은 거의 없었다. 저녁이었는데 도시 전체가 이미 잠든 것 같았다. 서울이었다면 이 시간에 골목마다 사람이 넘쳤을 텐데. 세혁은 차창에 이마를 기댔다.


숙소는 대학 근처의 게스트하우스였다. 키 큰 나무 몇 그루가 마당에 서 있었다. 싱글 침대, 작은 창문, 천장에 팬 하나. 캐리어를 내려놓고 침대에 앉자 스프링이 삐걱거렸다.


목석이 나갔다. 방이 조용해졌다. 창밖으로 어둠이 내려앉고 있었다. 가방에서 책을 꺼내 펼쳤다. 글자들이 눈에 들어왔다가 나갔다. 덮었다. 내일 마르쿠스교수를 만나야 했다. 영어로, 바둑 얘기를.


천장 팬이 돌아가며 낮고 규칙적인 소리를 냈다. 눈을 감자 흑돌 하나가 떠올랐다. 어느 판의 돌인지 알 수 없었다.


멀리서 기차 소리가 들렸다가 기찻길을 따라 멀어져 갔다.

잠이 오지 않았다.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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