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베, 능력주의에 대한 오랜 고민. 그리고 경제성장과 양극화.
한국사회에서 소위 '일베'가 등장하고 문제로 드러나기 시작한 때가 아마 2010년대 초반이었을 것 같다. 시사IN에서 일베를 주목하고 그들의 논리인 '공정'에 대해서 분석하는 특집 기사를 냈다. 한겨레에서는 시급 4천 원을 받고 일하는 열악한 노동환경에 처한 노동현장에 기자들이 직접 취업해서 취재한 '4천 원 인생'이 나왔다. 몇 년 뒤에는 '능력주의와 불평등 -능력에 따른 차별은 공정하다는 믿음에 대하여-'라는 책도 나왔다. 나 또한 한국사회, 특히 젊은 세대들을 중심으로 나타나고 있는 '능력주의'에 대한 문제의식이 있었다.
나도 노동조합 활동을 하면서, 처음에는 설명되지 않았던 이런 '능력주의'를 맞닥뜨리면서 문제의식이 생겼다. 사무직 정규직 중심인 기업별 노조의 위원장이 되었을 때, 조합원들은 '비정규직의 정규직화'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관심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반대했다. 노동조합은 '사회적 약자'들의 연대와 투쟁이어야 한다는 당위를 말했다. 다수의 약자를 포용하는 것이 오히려 노동조합이 강력해지는 길이라고 말했다. 결국 모두에게 더욱 이익이라고 설득했다. 소용없었다. 2017년 비정규직, 용역직 등 노동약자들을 위한 제2의 노동조합을 설립하면서, 더 극렬한 저항과 비난, 공격에 시달려야 했다. 그때 나는, '자신이 기득권인 줄 인식하지 못하는 기득권자들의 저급한 욕심과 무지'라고 그들을 생각했다. 트럼프를 지지하는 미국의 백인들을 '무식한 인종차별주의자'로 생각했듯.
변해가는 사회도 보이기 시작했다. 2018년 초 평창 동계올림픽이 열렸다. 당시 남북한 화해무드에 맞춰 아이스하키팀이 남북한 단일팀으로 결성되었다. 그런데, 국민들의 여론이 좋지 않았다. 평생 피땀 흘려 노력해서 국가대표로 출전하게 된 기존의 국가대표와 그 가족들의 기회를 뺐는 '역차별', '불공정'이라는 것이었다. 예전 같으면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남북통일, 평화'라는 대의는 개인의 이해를 넘어서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인천공항공사, 도로공사 등의 비정규직이나 용역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하겠다는 문재인 대통령의 시도 또한 노사 양쪽에서 비난받았고, 더욱이 '능력주의'에 빠져있는 다수의 국민, 특히 젊은 층들에게 공격받았다. 민주노총이 등장하는 기사에는 엄청난 양의 극렬한 비난 댓글이 넘쳐났다. 난 '그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노동약자들을 위해 조직한 제2의 노동조합 내에서도 같은 문제가 있었다. 정규직 전환이나 호봉 인정 등에 대해 조합원들 사이에 균열이 있었다. '사측'이라는 단일한 적보다, 내부의 분열과 이기심이 날 훨씬 지치게 했다. 나 자신을 희생하지만 그래도 '옳은 일이다'라고 믿던 가치와 의미를 부수었다. 6년간의 지부장을 마친 후, 명예퇴직까지 이르게 된, 작지만 숨은 이유였을지 모른다.
요즘 밀라노 동계올림픽이 한창이다. 스노보드에서 한 어린 선수가 사고에 가까운 실패를 했지만 포기하지 않고 도전해 금메달을 딴 감동적인 이야기가 있다. 동네 주민들이 축하의 플래카드를 달았다. '래미안 원펜타스의 자랑, 최가온 선수! 대한민국 최초 설상 금메달을 축하합니다! -래미안 원펜타스 입주민 일동-'이라는 평범한 플래카드. 무엇이 문제였을까? 네이버 부동산에 검색을 해 보니, 이 아파트 매매가가 89억 9,000~200억 사이다. 뭐, 그럴 수 있지. 부자 동네에 사는 게 문제인가? 금수저인 게 문제인가? 아무 문제도 없는데, 가진 것 없는 열등감 쩌는 루저들이 민원을 넣은 게 문제 아닌가?
나도 민원은 과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 심리가 이해는 된다. 보통 이런 플래카드는 언제 붙었던가? '개천에서 용'이 났을 때 붙인다. 그런데, '용'은 맞는데, '개천'이 아닌 거다. 시도해 본 사람은 알겠지만, 스포츠 엘리트를 한 명 키워내는 데에는 돈이 참 많이 든다. 개인의 재능과 노력의 결과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 뒤에 '부모의 재력'이 있지 않으면 거의 불가능한 것 같다. 요즘 아이돌 중에는 소위 '금수저'들이 많다. 오랜 연습생 기간을 버텨내려면 집안이 받쳐주지 않으면 힘들기 때문이라는 말이 있다. SM에서 10년간 연습생이었지만 실패하고 30대가 되어 작곡을 하다가 '케이팝 데몬 헌터스'라는 넷플릭스 최고 흥행의 애니메이션에 작곡과 노래까지 부른 '이재'의 파란만장한 인생역전 성공 스토리가 감동적이다. 그런데, 10년간 아이돌 연습생으로 도전할 수 있었던 것도, 그 이후에 뉴욕대학을 졸업하고 작곡가가 될 있었던 건, 평범한 흙수저에게도 가능한 일이었을까? 국정농단으로 유명한 최순실의 딸 정유라가 “돈도 실력이야. 없으면 너네 부모 원망해”라고 SNS에 쓴 글이 공분을 샀던 일이나, 조국 사태나 유승민 딸의 인천대 교수임용 등에 대해서도 국민들, 특히 젊은 층이 분노했던 부분이 바로 이 '부모 찬스'가 '불공정하다'라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오랫동안 '능력주의'에 사로잡힌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능력에 따른 차별은 공정하다'는 그들을 향해 혀를 차고, '일베'는 인간 말종처럼 여기며 혐오했다. 답답해했다.
그런데, 이제 문득 이해가 된다. 30여 년 전에 성경공부하면서 배웠던 그 뻔한 이야기다. '베데스다 연못가'의 '병자들'이다. 갑자기 물이 움직일 때(stirred up) 연못에 뛰어든 단 한 사람만 나을 수 있는 무한경쟁의 연못. 그 연못 앞에서 서로 끊임없이 비교하며 조건과 상황을 시기, 질투, 원망, 비난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 하지만 안타깝게도, '공정한 룰 아래, 경쟁을 통해, 가장 능력 있는 소수의 개인이 성공한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아마, 우리는 계속 목마르고 스스로를 갈아 넣고 비교하고 비난하고 미워하게 될 거다. 문제는 최소한의 안전망과 여유를 주지 않는, 극단적인 경쟁과 양극화된 승자독식의 체제가 아닐까. 그걸 깨야 할 것 같다.
홍세화 선생님이 말씀하셨던 프랑스의 '똘레랑스'. 캐나다에 있는 동안 느꼈던, 작지만 기꺼이 기부하고 봉사하고 나누는 문화가 자리 잡을 수는 없을까. 그런데, 막상 우리가 동경해 왔던 소위 선진국들이 변해가고 있다. 노골적으로 차별하고 혐오하는 극우 보수 정권이 장악하지 않은 곳이 거의 없다. 결국 '곳간에서 인심 난다'는 말처럼 경제성장이 있어야 똘레랑스도 기대할 수 있는 것일까. 아니면, '양극화' 엄밀히는 부의 소수집중이 다수의 피해의식과 혐오와 배제를 낳는 원인일까. 지구를 망가뜨리지 않고 지속적으로 경제를 발전시키면서도, 모두가 잘 사는 그런 사회가 가능한 것일까.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