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 : 오지랖, 관심과 무례 사이.
2009년에 1년 동안 육아에 도움을 받기 위해서 장모님이 사시는 수서에서 1년간 살았던 적이 있다. 알다시피 탄천은 자전거 도로가 잘 되어 있다. 직장까지 약 35km. 일주일에 한두 번쯤 미친 척하고 운동 삼아 자전거를 타고 출퇴근을 하곤 했다. 어느 저녁에 복정역 근처 자전거 도로를 달리고 있을 때였다. 얼핏 자전거 도로 옆에 한 아저씨가 쓰러져 있는 것이 보였다. ‘술 취한 사람인가?’ 대수롭지 않게 휙 하고 지나치다가, 마음에 걸려 되돌아왔다.
장애가 있는 아저씨였는데, 술에 취해 쓰러져 있었다. 부축해서 일으켜 보았지만, 아저씨는 중심을 잃고 쓰러졌다. 말씀을 잘 알아들을 수가 없어서, 휴대전화를 건네받아 통화기록에 있는 딸에게 전화를 했다. 고등학생인 딸은 나올 수 없는 상황이라며 가까운 곳에서 택시를 태워서 보내달라고 했다. 하지만 자전거 도로에서 큰길까지 부축해서 걸어가기도 쉽지 않았다. 민망한 쫄쫄이 자전거복에, 달그락거리는 자전거 전용 신발을 신은 채, 자전거 자물쇠도 없어서 내게는 나름 고가인 자전거를 어디에 세워놓을 수도 없던 상태였던 나는, 몹시 난감해졌다. 솔직히 후회했다. ‘아, 이놈의 오지랖. 어떻게 해야 하나.’ 수서역까지는 자전거 도로로만 3.5km를 가야 하는데, 진짜 아무런 방법도 떠오르지 않고, 정말 진심 막막했다.
그때였다. 영화처럼 뒤편 멀리에서 청년 두 명이 자전거 도로 옆 보행자 산책로를 걸어 나타났다. '어? 아는 얼굴이다.' 몇 년 동안 수서 한 교회에서 중고등부 주일학교에서 가르쳤던 학생이었다. 통통하고 여드름 있던 중3 소년이 나를 압도하는 거구의 청년이 되어 나타났다. 어디로 가는 길이냐고 물었다. 수서로 가는 길이란다. 이 아저씨 좀 부축해서 갈 수 있겠냐고 부탁을 하니, 문제없단다. 휴, 다행이다. 나는 그렇게 아저씨를 맡겨 놓고 집으로 되돌아올 수 있었다.
약주를 즐기시던 아버지를 둔 탓인지, 길 가다 술 취해 쓰러져 있는 사람들을 보면, 그냥 지나치기가 힘들다. 지하철 바닥에 쓰러져 있던 취객을 인터폰을 통해 역무원과 통화해서 안전한 곳으로 옮긴 적도 있고, 신림동의 뒷골목 큰길에 쓰러져 있던 어떤 사람을 혹여 차에 치이기라도 할까 두려워 조금이라도 안전한 곳으로 옮긴 적도 있다.
물론 나도 멋모르던 대학 새내기 시절, 양쪽 술자리를 왔다 갔다 하다 필름이 끊겨서, 만취상태로 회기동 어느 길바닥에 누웠던 적이 있다. 그때 길 가던 이름 모를 호텔전문대 예비역 선배가 사당동까지 동승해서 택시를 태워 보내주었다. 다음날 아침 잠자리에서 깨어났을 때, 아버지에게 욕과 함께 전해 들은 말이다. 그때 누군지도 모를 그분이 오지랖을 부리지 않았더라면, 오늘의 난 없었을지도 모른다.
사람은 잘 바뀌지 않는가 보다. 요즘도 난 여전하다. 원룸 ‘더불어숲’을 운영하며 살 때, 어느 밤에 으슥한 동네 골목에서 담배를 피우는 일련의 고등학생 무리들에게 어둠 속에 숨어 큰소리를 치거나, 폐가로 들어가는 어린 남녀학생 무리들을 보고 경찰에 신고했다. 대로변에서 자신의 아내에게 큰소리를 지르며 달려드는 어떤 아저씨를 신고하고 경찰이 올 때까지 따라다녔다. 학내에서는 무료로 승하차할 수 있게 하면서 학교부지 내 일부를 버스차고지로 쓰고 있는 버스 회사의 기사분들이, 가끔 학생들에게 어리다고 반말을 하거나 승차거부를 하면, 내 아들 딸에게 막 대하는 것 같이 화가 나서 말싸움을 한다. 가끔 학교 안 오솔길에 캐리어를 들고 가는 학생들이 보이면 들어준다.
다만, 그래도 요즘은 나이도 먹었겠다, 괜한 짓 하는 거 아닌가, 선을 넘는 것 아닌가, 뭐 달라지는 거 있나 싶어, 웬만하면 모른 척하고 오지랖을 참아보려고 노력한다. 성격이 못돼서, 쉽지는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