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삼개월간의 홈스쿨링을 돌아보며.....
2016년 임신 소식과 함께 시작된 입덧으로 인해 다니던 직장을 과감히 때려치우고 2017년 1월부터 이 대표와 함께 집에서 홈스쿨링을 시작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홈 방목? 내지는 홈 플레잉이란 말이 더 어울리겠지만, 어찌 됐던 아이가 학교를 다니지 않는 시간을 집에서 지내는 것으로 대체한다는 의미에서 홈스쿨이란 말을 쓰기로 한다. 돌아보면 보람도 많이 느끼고 즐겁고 행복한 순간도 많았지만 참을 수 없는 이 녀석의 존재의 무거움을 느낀 순간도 많았다. 이렇게 저렇게 삼 개월이 흘렀고 이 시점에서 아이와 오롯이 둘만 이서 겪어낸 (아.. 남편 미안.. ) 이 시간에 대한 성찰이 필요할 것 같아 이 글을 적는다. 우선 이 대표가 학교를 그만둔 이유부터 찬찬히 살펴보아야 할 것 같다.
내가 아이의 교육을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한 순간부터 보내고 싶었던, 그리고 꿈궈왔던 학교는 아이의 아이다움을 지켜주는 학교였다. 물론 그런 학교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거리적, 경제적 여건이 우리의 형편과 맞지 않았다. 현재 미국의 공교육 시스템을 살펴보면 한국의 그것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 아이의 장점과 특성 그리고 기질에 맞게 배움이 이루어지기보다는 평가와 경쟁을 통해 어른들의 기준에 맞춰진 시간표대로 정해진 학습을 강요한다. 배움의 방법과 속도가 제각기 다른 아이들을 한 공간 안에 몰아넣고 아이마다 고유하게 가지고 있던 호기심과 배움에 대한 욕구를 천천히 몰살시켜가고 있는 현대 교육에 의해 아이들은 그야말로 자유를 빼앗기고 아이다울 시기를 빼앗기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아이들은… 정해진 방법대로 정해진 것들을 정해진 시간 안에 배우는 학교의 노예(거친 표현이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대체할 단어가 없다)로 자란다. 그 아이들이 대학에 들어가서 노예 신분에서 벗어나는 시기가 왔을 때 스스로 학습하는 방법을 잃어버리고 당황하고 방황하는 모습은 심각한 사회적 문제라고 생각한다. 다만… 사회에서 그 사실을 인정하기를 꺼리던지 아님 알고 있음에도 무기력한 대응을 하고 있을 뿐…
교육 문제를 비판하기 시작하자면 끝이 없기에 여기서 거두절미하고 이어가자면 내가 이 엄청난 교육 현실 앞에 느낀 것은 두려움이다. 나 또한 한 아이의 엄마로서 (이제 곧 두 아이의..) 피해갈 수 없는 현실이기에, 그리고 끊임없는 비판과 뒷담화 외에 딱히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기에 나는 곧 입문하게 될 이 거대한 골리앗 앞에 지혜롭고 믿음 있는 다윗이 아닌 그저 힘없는 양치기일 뿐이었다. 그 두려움이 찾아온 시점은 아이가 프리스쿨 4반에 올라가기 시작하면서 본격적으로 연필을 쥐고 알파벳과 phonics를 배우기 시작할 때였다. 아이는 학교에 가자마자 worksheet을 해야 했고 글씨를 따라 쓰고 선 안에 색칠을 하는 숙제를 받아오기 시작했으며 서클 타임에 집중하지 않으면 지적을 받고 학교에서 정해진 시간표대로 움직여야 하는 것에 부정적으로 반응하기 시작했다. 그중에서 제일 힘들어했던 것이 바로 낮잠을 자는 시간이었다. 평소에도 낮잠을 꼭 잤던 아이임에도 불구하고 신기하게도 아이는 낮잠 자는 시간이 너무 힘들다며 칭얼대기 시작했고 급기야는 왜 coloringinside the line을 해야 하는지 이해하기 힘들어했다. 아이가 가위질이 서툴다며 가위 연습을 시키라는 선생님의 말씀에 뜨뜻미지근하게 반응하는 나에게 선생님은 ‘유치원에 올라가면 가위질도 점수와 연결된다’라는 말씀을 하셨고 이런저런 비슷한 상황들이 이어지면서 나는 점점 아이만큼 나도 힘들어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자잘한 스트레스는 있었지만 큰 문제없이 적응하고 있던 아이를 유난스러운 내가 학교에서 빼내는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도 있었지만 결론적으로 학교를 가지 않으면서 지난 삼 개월 동안 이 대표는 조금 더 행복하고 조금 더 자유롭고 조금 더 수다스러우며 결과적으로는 글자와 숫자, 그리고 언어에 대한 개념도 그만큼 더 많이 자라게 되었다. 그리고 생각지도 못했던 아이의 기질과 장점, 부족한 점 그리고 무엇보다 참을 수없는 존재의 사랑스러움을 만끽하게 되었다. 이것은 절대 특정 학교에 대한 비난이 아님을 그리고 다음 단계로 올라갈 아이들을 상황에 맞게 준비시키고자 하는 유아교육기관들에 대한 평가가 아님을 미리 얘기해 두는 바이다.
나의 교육 현실에 대한 두려움은 고백하건대 조금 과장된 부분이 없지 않아 있다. 개떡 같은 교육 현실에도 찰떡같이 적응하고 건강하고 행복하게 그리고 스스로 좋아하는 것들을 찾아 자라는 아이들도 많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 교육 현실의 최대 피해자는 사실, 불안과 열등감으로 인해 올바르고 정확한 기준을 갖지 못한 부모 혹은 양육자 밑에서 자라나는 아이들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내가 올바른 기준을 지켜간다면, 사실 우리 아이들이 특별히 유난스럽지 않은 이상 적당히 잘 자라줄 것이라고 혹은 행복을 찾아가는 여정을 잘 걸어갈 것이라고 믿고 있다. 어차피 이 대표는 올해 9월부터 미국의 공교육의 노예로 등록될 예정임으로 나는 현실로부터 완벽하게 도피할 수 없다. 하지만 지난 삼개월간 이 대표와 껌딱지 같은 시간을 보내면서 내가 느낀 배움이라는 것은 나에게 너무나 신선하고 놀라운 깨달음을 선물했다. 특히나 여러 가지 교육서적과 양육 서적을 찾아 읽고, 나의 생각을 지지하는 전문가들의 글을 읽으며, ‘배움’이라는 것에 대한 나의 이해와 관점의 폭이 넓어지고 깊어 짐을 느꼈다. 그 생각들을 정리하고자 시작된 글인데 서론이 너무 길어졌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배움에 대한 본능을 가지고 태어난다. 배우고자 하는 본능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로 태어나서 스스로 먹고 자고 기고 걷고 말하는 것을 배워가는 아이를 보며 알 수 있을 뿐 아니라 본격적으로 언어를 사용하기 시작하며 자신의 주변과 사회 그리고 세상을 탐색해 가고 이해해 가는 유아기 아이들을 보면 의심할 수가 없다. 하지만 학교라는 작은 사회에 들어가면서 그토록 배움으로 가득 차 있던 아이들의 세상이 점점 꺾이기 시작하는 불편한 진실을 보게 된다. 이것에 대해 대부분의 교육학자들이 동의하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바로 공교육 시스템의 오류다. 배움의 가장 기본적인 요소들로 이미 인간에게 탑재되어 오는 것들이 바로 curiosity (the drive to explore andunderstand), playfulness (the driveto practice and create), humansociability (the natural drive to share information and ideas) 들이 다(2013, Grey). Free to Learn의 저자인 Dr.Grey에 의하면 학교에서는 아이들이 1. 자유롭게 자신의 호기심을 충족할 수 없고2. 평가에 대한 두려움이 아이들의 호기심을 오히려 저하시키며, 3.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 한 가지로 통일되어 있고 4. 나이로 나눈 학급 시스템으로 인해 서로 가지고 있는 지식과 능력을 나눌 수 있는 기회가 제한된다.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학교에 들어가면서 배움은 더 이상 놀이가 아닌 강요된 학습이 된다는 것이다. 놀이라는 것 자체가 가지고 있는 엄청난 학습효과는 그것이 자기주도적이고 (self-directedand self-chosen), 정해진 목표가 없으며 깨어있지만 스트레스가 없는 정신 상태에서 스스로 정한 규칙(하지만 언제든 변경될 가능성이 있는)을 만들어가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중 어느 것 하나 학교라는 배움의 공간에서 온전히 허용되는 것이 있을까? 내가 이 대표와 집에서 그리고 우리가 그날 그날 정한 공간에서 시간을 보내며 확인했던 가장 중요한 배움에 대한 사실 하나는 바로 ‘자기 주도성’이 배움의 역량에 미치는 영향력이었다. 스스로 결정한 그날 그날의 놀이들은 어떠한 목표나 정해진 스케줄 혹은 나의 강요에 의한 것이 아니었기에 아이는 온전히 자신의 열정과 에너지를 쏟아 그 시간을 그리고 그 공간과 놀잇감을 즐겼다. 겉으로 보기엔 의미 없는 단순한 놀이 같았지만 아이는 그 속에서 호기심을 발동시켰고 열심히 탐색했고 그것을 즐거움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나와 그 즐거움을 나누기도 했다.
때때로 나는 어떤 놀이들을 먼저 제안하기도 했는데, 그것에 대한 선택은 오롯이 이 대표의 것이었고 이 대표의 놀이에 대한 의견은 언제나 존중되었다. 물론 그 자유가 먹는 것, 자는 것 그 외에 일정 행동들까지 허용되지는 않았기에 지난 삼 개월이 이 대표와 나와 겪은 갈등이 전혀 없이 평화로운 나날들의 연속이었을 것이라는 오해는 없어야겠다. 여기에 대해서도 언젠가 한을 풀듯 글을 한번 쓰긴 해야 한다. 이 대표는 선 안에 색칠할 필요도 없고 적당히 위험한 것은 어느 정도 눈감아주는 환경에서 놀이 시간을 제한받을 필요도 없고 날씨의 영향 때문에 바깥에 못 나가는 일도 없이 자신의 놀 자유를 존중받았고 그때마다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충분히 즐기고 그 속에서 탐색하고 배운 것들을 자신만의 언어로 표현했다. 특정한 대상에 대한 호기심을 채워가는 과정에서 다른 영역까지 호기심이 확대되기도 했고 너무 넓은 범위의 호기심이 축소되는 대신 깊어지기도 했다. 대부분의 호기심 대상은 학교에서 발산하기엔 너무 하찮다고 여겨지거나 쓸데없다고 생각되는 것들이기도 했는데 예를 들면 이 대표는 전 세계 어딘지도 모르는 도시들의 이름을 찾아 그날 그날의 날씨와 온도를 체크하기에 바빴고 그것이 세계 지도를 들여다보는 것으로 이어지고 각각 대륙과 나라들을 찾아보는 것을 즐겨했으며 그로 인해 중국말과 일본말이 우리나라 말과 다르다는 것 그리고 다른 언어들에 대한 호기심으로 까지 이어졌다. 나는 이 대표와 지도를 들여다보며 대륙이나 나라 이름을 외우는 일은 하지 않았다. 그냥 지구에 큰 땅덩이가 몇 개 있고 이 땅덩이에서 저 땅덩이 사이에 바다가 있는 그 모양새를 들여다보았다. 그러니 이 행위로 인해 이 대표가 6 대륙 5대양의 이름을 줄줄 외울 리 만무하나 그는 자신이 살고 있는 곳이 아주 큰 세계 속에 한 부분임을 그리고 자신과 전혀 다른 언어를 쓰고 다른 음식을 먹으며 사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는 것 정도는 알게 되었을 것이다.
그가 동그라미 하나를 그려놓고 그것이 지하철 2호선이라 하면 지하철 2호선이 되고 로켓이라 하면 로켓이 되었다. 네모가 되어야 한다거나 바퀴가 있어야 한다는 조언 없이 지금 이 대표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들을 표현하는 데로 환영해주었다. 이 대표는 역시나 아직도 소근육 운동이 참으로 어설프고 목소리 조절이 불가능 수준이며 눈치코치 심히 부족하여 함께 다닐 때 내 아이가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 민망한 순간들이 참 많다. 이제 내 품을 떠나 다시 공교육 시스템 안으로 들어가게 되면 이 대표는 잘 적응할 수 있을까? 처음 학교를 관두면서 들었던 이 질문은 삼 개월 후에 반복되어나에게 돌아온다. 나는 감히 그럴 것이라고 답해본다. 학교에서 정한 시간표, 규칙, 학습내용들을 이 대표가 얼마나 긍정적으로 받아들일지 나는 알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대표에게 학교가 틀렸다고 말하더라도 그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고 사랑해주는 누군가가 있음을 아는 것이 그를 분명 학교 생활에서 버틸 수 있게 해 줄 것이라고 믿는다. 학교가 그를 평가하더라도, 그 기준대로 그를 평가하지 않는 누군가가 있음을 아는 것 그래서 그 누군가와는 세상 쓸모없는 호기심이라도 언제든지 함께 탐색하고 나눌 수 있음으로 분명 버틸 수 있을 것이다. 그게 언제나 내가 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자신이 없다. 그러나 나는 이 세상 모든 아이들을 그런 자세로 만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