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귀여운 투슬리스 한 마리 키우고 싶었을 뿐
요즘 우리 회사에서는 분기마다 조직력 강화 행사를 한다. 조직의 결속력을 높이고 동료들과 업무에서 벗어나 긴장감을 낮추며 친밀도를 쌓는 것이 목적이다. 이번에는 오전 근무를 하고 퇴근해서 점심 식사 후 도자기 그릇과 고블렛컵을 만들러 갔다. 고블렛컵은 처음 들어봤지만, 사장님이 올려두신 인스타 예시들이 너무 귀여워서 혹 해버렸다. 귀여운 건 못 참지.
예랑이랑 한창 밖에서 데이트를 많이 하던 시절 우리는 도자기 조각을 제외하고 각종 만들기를 섭렵했다. 베이킹, 유리 공예, 그릇 만들기 등 말이다. 항상 예랑이에 비해 나는 시간이 부족했던 기억이 있어서 오늘도 원활한 진행을 위해 아침 출근길에 졸음을 참고 잠깐 구상했다. 혼자 늦게 만들어서 모두의 퇴근을 늦추는 불상사가 발생하면 안 되니까. 그렇게 머릿속에 표정은 귀엽지만 늠름한 드래곤이 반지를 지키고 있는 새까만 색의 고블렛잔 도안을 생각해 뒀다. 예랑이가 설거지나 운동할 때 항상 결혼반지를 빼두기 때문에 음료 대신 반지를 담을 작은 컵을 만들 계획이었다. 웨딩링을 귀여운 드래곤이 지키고 있다는 스토리라인까지, 구상에 대해 스스로 아주 만족하며 출근을 했다.
맛있는 점심 식사 후 드디어 고블렛컵을 만드는 시간이 다가왔다. 그렇게 도자기를 주무르기 시작했고, 투슬리스 레퍼런스를 휴대폰에 하나 띄웠다. 도안 구상까지 했으니 순조롭게 흘러갈 거라는 예상과 다르게 2D를 3D로 만드는 난이도는 상당했다. 이거야 말로 당황스러웠다. 아무리 손으로 만지고 도구로 다듬어도 투슬리스의 멋스러운 귀를 만들기가 어려웠다. 영화에서 본 그대로 멋있게 착지했을 때 바람에 휘날리는 투슬리스의 귀를 구현해내고 싶었는데 말이다. 선생님께 "큰일 났는데요? 아무도 투슬리스라고 생각 못할 것 같은데요?" 말씀드렸더니, 용기를 북돋아주시려고 "아닌데요? 누가 봐도 투슬리스인데요? 이건 드래곤 앞발이죠?"라고 하셨다. "앗, 발이 아니라 귀예요(머쓱)" 그리고 모두가 빵 터졌다.
멘붕에 빠졌다. 강사님께서 캐릭터 만들기 다음으로 위에 올릴 컵 만드는 방법을 설명해 주셨다. 이때부터 이미 나는 진도를 못 따라가고 있었다. 나 스스로 영화 <드래곤 길들이기 1>의 대기만성형 성장캐인 히컵이라고 세뇌하며 조급해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역시 나이트 퓨리를 친구로 만드는 건 어려워^^ 겨우 얼굴을 완성했지만 꼬리와 발도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갈 길이 멀었다. 아직도 도자기의 질감이 익숙하지 않았지만 빠르게 작은 도자기 공을 굴리며 발톱까지 만들었다. 그래, 드래곤인데 발톱도 필요하지 않겠나. 그 와중에도 '급하지만 디테일을 놓치면 안 되지'라며 약간의 욕심을 냈다.
사실 고블렛컵을 만드는 우리 테이블의 동료분들은 모두 진행 상황이 제각각이었다. 마음처럼 쉽지 않은 3D 캐릭터에 다들 초집중 모드였다. 앞에서 나의 갈팡질팡하는 투슬리스를 보며 동료분께서 여기 앉아서 위안이 된다고 하셨다. 제가 꼴찌니까 걱정 말고 맘 편하게 만드시죠. 또, 옆에서 난이도 최상의 캐릭터를 선택하신 다른 동료분께서 농담으로 지금 예민하니까 도자기 만들 때 책상을 치지 말아 달라고 했다. 완전 시험기간 독서실 같았다. "저기요, 키보드 타자 소리가 너무 커요"
이제는 강사님께서 앞에서 색을 칠하는 방법에 대해 설명해 주셨다. 아직 그 단계까지 못했지만 열심히 따라잡고 있었다. 이미 그릇을 만드는 옆 테이블 동료분들은 서서히 마무리 단계였다. 서로의 작품을 감상하며 이야기하고 계셨지만, 다른 분들의 작품을 감상할 여력이 없었다. 눈앞의 투슬리스 심폐소생이 너무 급했다. 업무보다 더 집중하느라, 조직 강화력 행사의 목적을 잊었다. 목표의식이 이렇게 무섭구나. 그리고 드디어 지금까지 빚은 투슬리스를 검은색으로 도색하기 시작했다.
수채화 물감이었기 때문에 한 번 도색으로는 도저히 투슬리스의 새까만 블랙이 나올 것 같지 않았다. 강사님께서 일차적으로 물감을 말려주셨고, 그 과정에서 대충 붙여놓은 꼬리가 떨어졌다. 강사님께서 다시 정석 방법대로 꼬리를 붙여주셨고, 다시 도색을 계속했다. 이미 절반 정도의 동료분들은 작품을 완성해서 옆에서 방해 공작을 펼치셨다. 이게 발톱인지 발가락인지 진지하게 대화하시며 말이다. 너무 웃겼지만 정작 반응을 해드리진 못했다. 모두의 퇴근을 늦추면 안 된다는 생각과 동시에 내 투슬리스를 살려내고 퇴근해야 한다는 마음으로, 대학교 때 시험 직전 벼락치기를 방불케 하는 집중력을 발휘했다.
일찍 끝내신 동료 분들께서 고블렛컵을 만드는 동료들을 거의 40~50분 이상을 더 기다려주셨다. 그 사이에 내가 만든 병명인 급성 수전증이 도져서 강사님께 눈동자 마무리를 부탁드렸다. 눈 덕분에 그나마 검은 덩어리에서 투슬리스로 진화했다. 아직도 듬성듬성 도색이 잘 되지 않은 부분이 많았지만, 여기서 만족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게 최선이다. 강사님께서 두 번 가마에 굽기 때문에 4주 뒤에 받을 수 있다고 하셨다. 과연 그 뜨거운 가마에서 투슬리스가 멀쩡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아마 신혼여행을 갔다 오면 받을 수 있겠구나. 홀가분한 마음으로 즐거웠던 시간을 뒤로하고 모두 집으로 돌아갔다. 행사 목적을 잊고 일할 때만큼 열심히 투슬리스를 빚었더니 거의 야근한 정도로 힘든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