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황기영 Jan 04. 2018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 영화 <1987>

스포일러가 "거의" 없는 리뷰

1961년 5월 16일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는 1972년 유신헌법을 통해 종신 독재를 위한 발판을 마련한다. 국민이 대통령을 선출하던 직접선거가 관제 기구에 의한 간접선거로 바뀐 것도 이때이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는 중앙 정보부장 김재규에 의해 암살되고, 국무총리였던 최규하가 대통령 대행을 하게 된다.

국민들은 유신독재 체제가 막을 내리고 민주화가 이루어질 것이라 기대했다. 하지만 대통령의 죽음으로 비상계엄 중이던 1979년 12월 12일, 전두환에 의해 또다시 군사쿠데타가 일어난다. 당시 최규하 정부는 대통령 직선제를 포함한 개헌을 준비 중이었다. 군부를 장악한 전두환은 개헌을 막기 위해 1980년 5월 17일 비상계엄 확대를 실시한다. 광주에서 일어난 5.18 민주화 운동을 유혈 진압한 그는 그해 9월 1일 체육관 선거를 통해 제 11대 대통령에 취임한다. 이후 개헌을 요구하는 민주화 운동을 지속적으로 탄압하였다.

1987년 1월 14일 참고인으로 경찰에 소환된 박종철이 물고문을 받다가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으로 시위가 격렬해지던 같은 해 4월 13일 전두환은 개헌을 하지 않고 간접선거제를 유지하겠다는 호헌조치를 단행한다.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외치는 시위는 더욱 격렬해졌고 6월 9일 이한열이 경찰이 쏜 최루탄을 맞고 쓰러진다. 이는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되었고 다음날인 6월 10일부터 약 20여 일간 수백만명의 국민이 전국에서 시위에 참여한다. 더이상 버티기 힘들어진 전두환 정권은 대통령 직선제와 민주화 요구를 담은 개헌을 실시하겠다는 약속을 한다. 이것이 6.29 선언이다. 비로소 우리는 대통령을 직접 뽑을 수 있게 되었고, 이때에 개정된 헌법이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수배 중이던 학교 선배 박종운의 소재를 밝히라는 경찰의 추궁에 박종철(여진구)은 모른다고 답한다. 물고문이 이어지고 끝내 박종철은 사망한다. 경찰 대공수사처 박 처장(김윤석)은 사건을 은폐하기 위해 시신을 바로 화장시키려 한다. 하지만 서울지검 공안부장 최 검사(하정우)가 이를 용인하지 않고 부검을 명령한다. 경찰의 압력을 받았지만 담당 부검의는 자신이 확인한 대로 부검 소견서를 작성하고,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동아일보 기자들은 정부의 보도지침을 어기고 진실을 알리기 시작한다. 경찰은 "책상을 탁! 하고 치니 억! 하고 죽었다"며 쇼크사로 위장하려 시도한다. 위험을 무릅쓰고 재야인사의 옥중서신을 바깥으로 전달한 교도관과 경찰의 사건 조작을 폭로한 천주교 정의구현 사제단 등 여러 사람들의 노력으로 사건의 진실은 세상에 알려지게 되고... 박종철 고문살인을 규탄하는 결의대회에서 이한열(강동원)이 최루탄 직격탄을 맞고 쓰러지자 수십만의 시민과 학생이 시위에 참여한다. "그런다고 세상이 바뀌냐"며 자조 섞인 말을 내뱉던 연희(김태리)도 6월 항쟁의 뜨거움 속으로 한 발 내딛는다.


영화 <1987>은 박종철의 죽음으로부터 시작해서 이한열의 죽음으로 끝이 난다. 그리고 광장으로 나온 시민들에 의해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된다.

영화가 끝이 났는데 자리에서 일어날 수가 없었다. 불과 30년 전만 해도 고문이 빈번하게 자행되었음을 실감 나게 지켜보고 나니 가슴이 콱 막혔다. 사건을 조작하고 은폐하려는 정부의 모습은 어쩐지 익숙하다. 이에 분노해 광장으로 나온 시민들의 모습도 낯설지가 않다. 역사는 반복된다고 했던가. 2016년 겨울, 30년 만에 우리는 또 광장에 나가야 했다. 영화 속의 그들과 묘한 동질감을 느꼈다.

이 영화에는 주인공이 따로 없다. 다른 영화에서 처럼 선과 악이 일대일로 대결하는 구도가 아니다. 등장인물들이 서로 바통 터치하듯 꼬리에 꼬리를 물며 이야기를 전개한다. 많은 인물이 등장하지만 어수선하지는 않다. 그들이 모두 하나의 목표를 향해 움직이기 때문이다.


극 중 인물은 대부분 실제로 존재했던 이들이다. 실존했던 인물과 실재했던 사건을 소재로 영화적 상상력이 더해져 재미있게 그려졌다.

다들 어느 정도의 비중을 가지고 있지만 '나쁜 놈'인 김윤석이 원탑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가장 비중 있게 영화에 등장한다. 김윤석은 <1987>에서 소름 끼치는 연기를 선보였다. 무게감 느껴지는 행동과 이글거리는 눈빛. 그리고 진짜 이북 사람인 듯 착각하게 만드는 북한 사투리는 단연 압권이었다. 보고 있자면 모골이 송연하다. 원래 연기 잘하는 줄은 알고 있었지만 김윤석을 다시 보게 되었다.

보통 악역은 그냥 악마로 설정해 놓고 이야기를 풀어가게 마련인데  <1987>은 그렇지 않다. 왜 박처장이 '빨갱이'를 그리 증오하게 되었는지를 짧지만 납득이 가게 설명해 준다. 그 개연성에 힘입은 박 처장은 "빨갱이 잡는 일에 반대하는 간나들은 다 빨갱이로 간주하갔어"라고 외치며 빨갱이 잡기에 몰두한다. 진짜 빨갱이 인지 아닌지는 중요치 않다. 그야말로 '반공 괴물'이다. 실제 인물인 박처언 전 치안감도 영화 속 박처장과 비슷한 사연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영화를 보는 내내 수려한 영상미가 눈에 들어왔다. 현장에서 내가 직접 상황을 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카메라 워크로 시각적 흥미를 돋운다. 이야기가 주는 무거움과는 달리 정감 있는 화면과 아름다운 장면이 자주 보인다. 중간 이후부터는 강동원이 등장하면서 그 세련된 영상미에 화룡정점을 찍는다.

엔딩은 어딘지 모르게 낯익다. 영화 <레미제라블>의 그것과 많이 닮아서 일까. 차이가 있다면 <1987>의 엔딩은 30년 뒤 그 역사가 되풀이되었다는 것이겠다. 이한열 역을 맡은 강동원이 등장할 때 객석에서는 낮은 탄식 소리가 터져 나왔다. 어떤 역을 맡아도 뿜어져 나오는 그의 잘생김 때문이리라. 나는 모르고 보다가 그의 등장에 한번 놀랐고 후반부에서 그의 역할이 이한열인걸 알고 두 번 놀랐다. 강동원이 포카리스웨트 광고를 찍는 것 같은 모습으로 나오기도 하는데, 이 영화의 유일한 옥에 티라고 하겠다. 강동원을 시기해서 하는 말은 절대 아니다.


역사적인 사건을 잘 짜인 구도와 세련된 연출로 맛깔나게 담아냈다.

<1987>은 짜임새 있게 잘 만든 영화이다. 많은 주인공들이 등장함에도 스토리 전개가 부드럽게 이어지고 맥락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사실에 대한 고증을 철저히 하고 이를 극화하는 부분에 있어서 세심하게 신경을 쓴 흔적이 보인다. 역사적으로 실재했던 이야기가 아니고 모든 것이 허구라고 해도 재미있을 영화이다. 실제 사건들에 대해 전혀 모르는 지인이 매우 재미있게 영화를 봤다고 하는 말을 듣기도 했다.




사족

1. 그렇게 총명하던 동아일보 기자들은 다 어디로 갔는가?
2. 박종철을 죽음에 이르게 한 선배 박종운은 후에 한나라당에서 여러 당직을 거쳤고 공천을 받아 국회의원 선거에 세 번 출마했다.
3. 엔딩 크레디트 중 이한열 열사의 장례식에서 열사들의 이름을 목 놓아 부르는 이는 안기부장 장세동 역을 맡은 문성근의 아버지 문익환 목사이다.
4. 치안본부장 역을 맡은 배우 우현은 1987년 연세대 총학생회 집행부로서 이한열의 장례식을 이끌었다. 아래 사진에서 태극기를 든 이가 배우 우현이다. 이한열의 영정을 들고 있는 이는 우상호 민주당 의원이다.

외신에 소개된 이한열 열사의 장례식


*all still images from movie.daum.net

매거진의 이전글 상상과 현실의 경계 <강철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