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내 꿈은 법관이 되는 것이었다. 나쁜 사람은 엄벌에 처하고 착한 사람은 억울하게 벌을 받는 일이 없도록 하는 훌륭한 판사가 되고 싶었다. 어린 시절 그 꿈은 고등학교 1학년 때까지 계속해서 이어져 왔다. 고등학교 2학년이 되면서 이과나 문과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법관이 되려면 법대를 가야 하므로 당연히 문과를 선택해야 했지만 난 이과를 택했다. 당시에 친했던 친구들이 모조리 이과를 선택했기 때문이다. 훌륭한 법관이 되겠다던 꿈을 버리고 그렇게 친구 따라 강남을 갔다.
이과를 선택했으니 대학 전공도 당연히 이공계열을 선택하게 되었다. 재료공학을 전공했다. 법관의 꿈을 접고 난 이후에는 딱히 무엇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대학생활의 자유를, 낭만을 즐기기에 바빴다. 클래식 기타에 심취해 있어서 눈만 뜨면 기타를 쳤고 틈만 나면 동아리방에 가서 살았다. 군대를 다녀온 뒤에야 정신 차리고 공부를 좀 했고 계절학기까지 들어가며 형편없었던 학점을 조금 올려놓았다.
4학년말에 모 기업 그룹공채의 해외영업부서에 지원했다. 서류전형, 실무면접, 간부 면접을 통과하고 사장 및 임원진과의 최종면접을 보게 되었다. 대기실에 있는데 인사부 직원이 내게 오더니, "잠시 따라오시죠" 라며 따로 불러 냈다. "뭐지 쟤는? 낙하산인가?" 하는 듯한 다른 응시자들의 눈초리를 뒤로 하고 따라간 곳은 해외영업 총괄팀장 앞이었다. 해외영업 팀장은 내게 왜 해외영업을 지원했는지 물었고, 내가 마음에 들기 때문에 채용할 생각이 있다고 했다. 한 가지 단서가 붙었다. 입사하면 국내 영업을 2, 3년간 해야 한다고 했다. 영업에 대한 기본기를 닦은 후에 해외영업을 시켜주겠다는 논리였다. 지금 다시 그 시절로 간다면 그렇게 하겠노라고 답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시절에 나는 국내 영업을 시시하게 생각하고 있었으므로 조건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바로 거절을 했다. 그렇다면 해외영업이 아니고 기술파트로 지원하겠다며.
최종면접에서 지원부서를 바꾸는 해프닝을 벌였음에도 난 그 회사에 합격을 했다. 하지만 출근을 하지는 않았다. 첫 출근을 하기 전에 다른 회사에서도 입사 합격 통지를 받았고 이미지가 더 세련된 그 회사에 입사하기로 결정을 했기 때문이다. 첫회사는 딱 1년을 다녔다.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많이 다른 회사생활에 실망을 해서였다. 그 뒤 외국계 IT기업으로 이직을 했다. 대학전공과는 전혀 다른 분야였다.
그 회사는 워낙에 규모가 커서 한국지사에도 각종 부서들이 많이 있었다. 그 덕분에 엔지니어, 고객지원팀 리더, 콜센터 관리, 영업, 비즈니스 기획 등의 다양한 직종의 일을 경험해 볼 수 있었다. 물론 다른 일을 하고 싶다고 할때마다 호락호락 타 부서로의 이동을 허락해 주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한국기업에서보다는 수월했을 거라고 본다. 십여 년을 그 회사를 다닌후에 다시 다른 외국기업으로 이직을 했고 몇 년째 그 회사를 다니고 있다.
인생은 끝없는 선택의 연속이다. 그 선택에 따라 다른 결과물을 낳게 될 수도 있다. 친구들을 따라 이과를 선택하지 않고 원래 계획대로 문과로 가서 법대를 진학했다면, 처음 합격한 회사에서 국내영업을 거쳐 해외영업을 하게 되었더라면, 첫 직장을 일 년 만에 그만두지 않고 좀 더 다녔더라면 나는 지금쯤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두 번째 회사에서도 여러 업무를 경험하지 않고, 처음 맡게 된 일만을 계속했더라면 또 어떤 결과를 낳았을지 모른다.
선택을 할 그 당시에는 그 선택의 결과가 어찌 될지 아무도 모른다. 시간이 흘러 어떤 결과를 만들고 난 후에야 그 선택들이 이러저러하게 영향을 미쳐서 지금의 결과를 만들었구나 하고 느끼게 될 뿐이다. 스티브 잡스도 아래 사진에 있는 것과 같은 말을 남겼다.
대략적으로 풀이하면 이렇다. "인생은 점들의 연결인데, 그 점들을 예측해서 미래를 내다보면서 연결할 수는 없고 뒤를 돌아봐야만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 잇고 있는 점들 즉 지금 하고 있는 일 혹은 선택이 미래에 어떤 식으로든 연결이 될것이라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대학을 졸업하면서 해외영업을 지원했던 이유는 그냥 멋있어 보여서였다. 외국인들과 영어로 소통하며 글로벌하게 일을 하는 것이 그렇게 멋있어 보였고, 그런 일을 하려면 해외영업이 답이라는 나름의 논리에서였다. 돌이켜보니 법관의 꿈이 좌절된 후 내가 유일하게 생각해 본 장래희망이었던 것 같다.
재미있는 사실은 두 번째 꿈과 비슷한 일을 지금 하고 있다는 것이다. 주고받는 업무 이메일의 대부분이 영어로 되어있고, 내 직속 상사는 해외에 있으며, 내 동료(peer)들도 다 다른나라에 있는 외국인이다. 그 두 번째 꿈을 목표로 삼고 무엇인가를 하려고 노력한 적은 없다. 그냥 내가 좀 더 흥미를 느끼면서 좀 더 잘할 수 있는 일을 지속적으로 찾아다녔을 뿐이다. 돌아보니 그 점들이 연결되어 지금의 직업을 가질수 있게 된 것 같다.
어쨌든... 꿈은 이루어 진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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