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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기영 Feb 19. 2017

옥수수와 외할머니

보따리를 머리에 이고 종종걸음으로 대문을 지나는 외할머니를 따라나선다.


페인트가 벗겨지고 녹이 슬어 있는 오래된 철대문은 턱이 꽤나 높다. 장난스럽게 폴짝 뛰어넘어 외할머니 손을 잡았다. 좁은 골목을 지나 신작로에 다다르면 덜덜 거리며 버스가 도착한다. 창 밖으로 지나가는 풍경을 감상하는 잠깐의 시간 후에 한적한 시골마을 앞에서 내린다. 길을 건너 산 쪽으로 구불구불하게 난 길을 조금 올라가면 지푸라기로 지붕을 엮은 원두막이 나타나고 그 옆으로 넓은 밭이 펼쳐져 있다.


외할머니가 각종 채소와 옥수수를 따는 동안 나는 원두막에 앉아 보따리에서 꺼낸 복숭아를 한 입 베어 문다. 달고 시원하다. 땡볕 아래에서 할머니는 한번 제대로 쉬지도 않고 일을 한다. 난 외할머니 옆을 서성이기도 하고 메뚜기를 쫓아다니기도 하고 시원한 그늘에 누워 파란 하늘을 바라보기도 한다. 가지고 왔던 보따리의 몇 배로 커져버린 짐을 머리에 이고 각종 채소로 가득 찬 장바구니를 들고, 다시 구불구불한 산길을 내려와 버스를 타고 집에 오면, 외할머니는 갓 따온 옥수수를 큰 솥에 가득 쪄서 내오셨다. 나는 종종 맛있는 옥수수를 양껏 먹기 위해 밥을 남기곤 하였다. 먹고 또 먹어도 질리지 않았다.


여름내 먹고 남은 옥수수는 처마에 걸어서 말려 두셨다. 이렇게 말린 옥수수는 겨울에 또 유용한 먹거리가 되었다. 말린 옥수수알로 동네 뻥튀기 아저씨한테 맡겨서 튀겨낸 옥수수 강냉이도 도란도란한 겨울밤에 좋은 군것질거리였다. 여름에 가던 겨울에 가던 외갓집에는 늘 먹을 것이 넘쳐났다.

  

어린 시절의 외갓집은 구식 한옥이었다. 대청마루가 있었고 마당에는 재래식 펌프가 있는 수돗가와 재래식 화장실이 있었다. 외갓집에서는 늘 화장실 가는 게 고역이었다. 나무판으로 만들어 놓은 발판 아래로 보이는 적나라함은 나를 변비에 걸리게 하기에 충분했다. 대청마루 오른쪽으로는 부엌이 있었다. 부엌에는 부뚜막이 있었고 밥을 짓는 큰 솥이 아궁이에 걸려 있었다. 아궁이를 때서 밥을 짓고 요리를 하고 그리고 그 열기로 구들장을 달구어서 방을 따뜻하게 데웠다. 고구마를 캐 오신 날에는 아궁이에 고구마를 넣어 두셨다가 간식으로 꺼내어 주곤 하셨다. 시커멓게 타 버린 껍질에 붙어 있는 촉촉하고 달콤한 고구마 속살은 그 어떤 과자와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맛있었다.


외할머니는 이미 오래전에 돌아가셨지만 가끔씩 외할머니랑 갔던 옥수수 밭이 생각이 날 때가 있다.  어머니와 외할머니가 수다를 떠시는 동안 옆에서 먹던 옥수수맛과 그 겨울밤의 도란도란함도 생각난다.


며칠 전 부모님 댁에 갔더니 어머니가 옥수수를 삶고 계셨다. 아이가 말했다. 할머니가 옥수수를 엄청 좋아하시니까 아빠도 좋아할 거라고, 그러니 옥수수를 많이 삶아 달라고. 저녁 먹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배가 불렀지만 옥수수를 한입 베어 물었다. 서너 줄을 하모니카 불듯이 먹고 손으로 알알이 떼어서 아이 입에 넣어 줬다. 그렇게 한 통의 옥수수를 나누어 먹었다.


찰지고 구수한 옥수수에서 외할머니 냄새가 가득 배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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