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7 모든 것을 부수다
어린 시절 나쁜 악당을 쳐부수는 만화를 누구나 보게 됩니다. 저 역시 만화에 빠져서 세계 정복을 꿈꾸는 나쁜 악당을 욕하고, 주인공을 응원하기 위해 시간이 되면 텔레비전 앞에 붙어있곤 했습니다. 조금 크면서 더 현실적인 전쟁 영화를 보게 되었습니다. 박진감 넘치는 전투신을 기대하며 보기 시작한 영화의 참전한 용사의 와이프가 베트남 사람을 잘 죽이고 무사히 돌아올 수 있도록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는 장면이 있었습니다. 갑자기 의문이 들었습니다. 베트남 사람들도 똑같은 사람인데 신은 저 기도를 들어줘야 하는 건지, 분명 미국이 베트남으로 침략을 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왜 베트남 사람들을 나쁜 악당으로 묘사를 하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이후 본 모든 전쟁영화에서 동일한 의문이 들면서 몰입이 잘 되지 않아 전쟁영화를 기피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구시대적인 현상에 직면하면 "21세기에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라고 말하곤 합니다. 하지만 제가 볼 때 21세기라고 사람의 두뇌 자체는 크게 발전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여전히 전쟁은 일어나고 있고, 정치는 비논리가 판을 치고 있습니다. 그토록 큰 홍역을 치렀지만 시간이 조금 지나자 사회는 점차 파시즘으로 가려는 경향을 보이고 있습니다. 21세기의 삶은 방식이 조금 변화했을 뿐, 발전했다고 보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진화적으로 봐도 몇천 년 전 인류에서 변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합니다.
하지만 과거와 눈에 띄게 달라진 점은 보입니다. 시대를 관통하는 사상이 사라진 것입니다. 주위를 둘러보면 무교인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과거 거의 모든 사람들이 자의로, 혹은 타의로 종교를 가지고 열심히 믿던 시대는 끝난 듯 보입니다. 뿐만 아니라 같은 종교를 믿는 사람들 사이에도 생각의 차이가 큰 것 같습니다. 소위 많이 배운 지식인에 대한 대우도 박해졌습니다. 많이 공부한 사람들의 의견을 받아들이고 생각해 보기보다는 당장 기를 쓰고 반박하고 자신의 생각만을 고집하는 사람들이 많이 보입니다. 철학자들은 이런 세상을 미리 알고 있었던 듯 포스트 모더니즘이니, 다원주의니 하는 용어를 이미 개발해놓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혼란스러운 세상을 한탄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경향은 어쩌면 사람들이 "삶은 의미가 없다"는 진리를 은연중에 인지하게 되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종교적 가치에 집중하면 신의 분노가 두려워 이런 불경한 생각을 하기 어렵습니다. 철학자들의 생각을 따라가다 보면 너무 어려워서 간신히 해석하기에 급급하게 됩니다. 현실의 생활이 너무 힘들면 삶의 의미를 생각하는 것이 사치에 불과합니다. 특정 이념에 매몰되어 다양한 생각은 불가능합니다. 모든 사상에서 자유로워진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모든 권위에서 벗어나 각자가 각자의 생각을 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넘치는 정보로 인해 과거처럼 전문가의 의견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가치관에 따라 가공하여 생각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런 현상으로 긍정적인 면도, 부정적인 면도 드러나게 됩니다.
"삶의 의미가 없다."는 진리의 이면에는 그 외에 어떤 것도 영원불멸의 진리가 될 수 없다는 의미를 포함합니다. 당신이 어떤 신념을 가지고 있던 그건 틀릴 수 있습니다. 나에게 옳은 건 누군가에게 틀릴 수 있습니다. 지금 틀렸다고 생각하는 것이 과거에 옳았을 수 있습니다. 옳고 그름은 시대의 프레임 속에서 평가할 수 있을 뿐이지, 어느 시대에나 통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위대한 철학자인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이 싫어했던 소피스트의 생각과 비슷해지는 듯합니다. "삶은 의미가 없다."는 진리는 반박이 어렵지만,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혼란만을 야기할 뿐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가 문제입니다. 삶의 의미가 없다는 진리에서 논리적으로 도출되는 결론인 "인간은 생존은 갈망한다."를 통해 다시 현실의 삶의 논리와 당위성을 쌓을 수 있습니다. 인류는 분명 생존을 갈망하는 존재이며, 생존은 인류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입니다. 종교, 이념, 사상에 의한 선입견을 버리고 생존의 측면에서 현재의 세상을 바라보고 토론하면 새로운 장이 열릴 수 있습니다.
표지 그림 : Red panda AI, Prompt : Draw a picture satirizing the lonely modern society where everyone is trapped in their own frame of thought, conversations are cut off and people are scatter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