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브런치북 1살 일기 21화

힘들다

그리워서

by 평범한 직장인

휴가를 나올 때 와이프는 나에게 집안일할 생각 말고 애 하고 놀아주라고 당부했다. 사실 아기가 갓난아기였을 때는 나도 집안일을 많이 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와이프는 내가 손에 물을 묻히는 걸 허용하지 않았다. 이는 파견 가기 전이나 휴가 기간에 좀 더 아이와의 시간을 많이 보내라는 뜻도 있지만, 어떤 집안일보다 아기와 놀아주는 일이 가장 힘들기 때문이기도 하다.




육아는 늘 새롭다. 적응이 잘 되지도 않지만 어느 정도 적응하면 아이는 커서 새로운 과제가 생기기 때문이다. 갈수록 더 힘들어진다고만 하기는 힘든 것이, 잘 생각해 보면 예전에 엄청 힘들었던 일들이 하나, 둘씩 쉬워지기 때문이다. 과거에 늘 온도에 맞춰 분유를 타주고 설거지를 하는 힘듬은 이제 없어졌으나, 누워만 있던 아기가 걷고 뛰기 시작하면서 또 다른 어려움이 생긴다.


휴가 중 아기를 보면서 가장 곤혹스러웠던 점은 이제 안아준다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분명 파견 전에 아기를 안아줘야 울음이 그쳐서 허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하지만 이제 운다고 안아주면 뿌리치며 내려가려고 한다. 그리고 자기가 갖고 놀고 싶은 걸 달라하며 떼를 쓰면서 운다. 고집도 강해지고 말도 듣지 않는다. 과거에 인간과 AI의 가장 큰 차이점이 시킨 일을 하지 않고, 시키지 않은 일을 한다는 점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이제 확신이 생긴다. 인간은 말을 알아듣는 순간부터 반대로 행동하기 시작한다. AI도 더 발전하면 이런 행동을 보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아기처럼 적은 데이터만을 가지고 바로 반항을 하지는 못할 것이다. 숫제 알고리즘 자체가 반대로 하도록 짜여 있는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아기는 말을 알아듣는 족족 반대로 행동을 한다.


힘들지만 이 현상이 나쁘게 보이지는 않는다. 이 모든 것은 심심함에서 나오는 것 같다. 아직까지 영상이나 핸드폰을 보여주는 것을 금지하고 있기 때문에 아기는 늘 심심함을 느낀다. 심심해서 각종 장난감을 의도대로 사용하지 않고 창의적으로 다르게 쓰는 모습을 보면 참 기쁘다. 심심하니까 이것저것 해보는 것이다. 물론 안전하게 설계된 수많은 자신의 장난감보다 꼭 다치기 쉽거나 부서지기 쉬울 것 같은 어른의 물건을 가지고 놀고 싶어 해서 문제긴 하다. 이것 역시 반대로 하려 하는 인간의 놀라운 성장 알고리즘에 들어 있는 모양이다.




이번 휴가에 일부러 핸드폰을 보지도, 이어폰으로 듣지도 않고 한 시간 정도 버스를 타보았다. 아무런 자극 없는 주변 풍경, 계속해서 올라타고 내리는 사람들을 앉아서 멍하니 보며 잊었던 생각들이 샘솟는 것을 느끼고, 까먹었던 계획도 저절로 떠오르는 것을 경험했다. 아기가 심심해서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은 것 같아 보이지만, 아마 어른들도 핸드폰을 뺏으면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지금의 세대는 아마도 내 어린 시절보다 덜 심심한 어린 시절을 보냈을 것이다. 좋은 점도, 나쁜 점도 있을 것이다. 아직까지 영상을 보여주지 않다 보니 아기는 그림책을 하루에도 수십 권 읽어달라 하고, 계속해서 새로운 것을 시도하고 있다.


아기가 책을 좋아하고 새로운 일에 호기심을 가지는 것은 매우 바람직해 보이지만 영상 없이 아기를 보는 일은 힘든 것이 사실이다. 어디로 튈지 몰라 항상 지켜보고 있어야 함은 기본이고, 같은 책을 10번이고 읽어주는 일도, 잠투정을 받아주는 일도 어디 하나 쉬운 게 없다. 정말로 보고 싶었고, 봐서 너무나도 기쁘지만 30분만 놀아줘도 기가 다 빨리고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고 싶은 심정이다. 하지만 11주 만에 고작 2주 놀아주는 아빠로서 그럴 수는 없는 일이다. 또 놀아주다 보면 이 귀여운 모습과 행동에 힐링과 대미지를 동시에 받는 느낌이다. 그리고 그렇게 전쟁 같은 하루를 마치고 나면 신기한 감정이 생긴다. 하루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지 상관없이 아기와 함께한 모든 날은 좋은 기억만이 남게 된다는 것이다. 나는 잘 휘둘리지 않고, 객관성을 잘 유지하는 성격임에도, 아이와 힘든 시간을 보내고 돌아서자마자 너무 좋았다는 기억만 남는다. 마치 대를 이어가기 위해 DNA에 각인이라도 된 듯 나의 기억은 선택적으로 편향되어 남게 된다. 이 부분은 직접 아기를 키워보지 않고서는 절대 이해할 수 없을 것 같다.




다시 아이와 떨어지고 난 후 화상통화만 좀 오래 해도 다시 힘든 감정이 올라오지만, 통화가 끝나고 남는 것은 좋은 기억과 그리움뿐이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