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산을 앞두고
결혼과 다르게 임신은 나의 생물학적 가족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이니 신기하면서도 설레었다. 다시없을 이 순간을 기록하고 생명을 느꼈어야 했는데 나는 늘 불안에 살았다. 남편과 싸울 때면 임신으로 배가 불러 뛰지도 못하고 신발끈도 못 묶는 내 몸이 초라해 보였다. 내가 지켜야 할 아이는 뱃속에서 점점 자라는데 나는 스스로 하지 못하는 일이 점점 늘어났다. 그럴수록 불안하고 초조함도 커져갔다. 호르몬 때문인지 출산의 압박 때문인지 감정이 요동쳤다. 사소한 말다툼에도 눈물은 멈추지 않았고 울 때마다 남편은 질린다는 듯이 나를 쳐다보았다. 그의 싸늘한 눈빛이 나의 자존감을 좀먹었다.
결혼 전 어쩌다 임신부를 보게 되면 화장기 없는 얼굴이 너무나 아름다웠다. 한 생명을 잉태한 여인은 성모 마리아만큼이나 성스럽고 인자해 보였으며 나 또한 그럴 줄 알았다. 그런데 거울 속 나의 모습은 여성으로서의 매력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숨이 찰 정도로 솟아오른 배와 사라진 허리선, 색소로 인해 거뭇거뭇해진 피부, 퉁퉁 부은 발목은 최악이었다. 행복하지 않으니 몸도 마음도 엉망이었다. 감정이 생각을 집어삼켰고 우울하거나 불안한 감정이 들면 그 뒤에 뒷받침할만한 생각들이 떠올랐다.
냉정함을 잃지 않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특히나 나에게 가장 영향을 주는 사람 앞에서는 더욱이. 내가 기대고 싶은 남편은 여전히 자존심 내세우며 배부른 임신부를 두고 먼저 가버리거나 화를 낼 때면 결혼을 후회한다고 말했다. 임신한 게 벼슬이냐며 무조건 공평해야 된다고 외치는 남편에게 배려를 원하는 순간 이 전쟁에서 나는 항상 불리해진다. 정서가 불안한 아내와 나르시시스트인 남편은 태아의 상태는 생각하지도 못한 채 매일 끝나지 않는 전쟁을 치렀다.
[출산 전날]
“여보, 무선청소기 잘 산거 같지 않아? 그때 고민했었는데 사길 잘했지?”
낮아진 자존감을 채우고자 자주 남편에게 내가 해낸 일을 상기시키는 말을 했다. 그럴 때마다 남편은 거북해했다. 나르시시스트는 상대의 노고를 인정하고 칭찬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말했다.
“그거 다 네가 원해서 한 거잖아. 나한텐 다 필요 없는 거야.”
가전과 가구는 내가 혼수 품목으로 해온 것이었고 나머지 결혼자금은 모두 반반이었다. 나는 그저 청소기에 대한 얘기 었지만 남편은 자신의 무능력함을 은연중에 표현했다고 생각한 것이다. 남편의 속내를 알 수 없었기에 문자 그대로만 받아들여 나의 수고와 노력이 그에겐 필요 없구나 생각했다. 이런 식의 대화가 반복되어 점점 지쳐갔다. 출산 예정일이 다가올수록 출산에 대한 공포도 더 해졌고 그간의 일들이 겹쳐져 그날은 냉정함을 완전히 잃게 되었다.
“필요 없으면 다 가져다 버려.”
“에휴, 그러던지. 근데 네가 버려. 네가 사다 놓은 거잖아.”
“꼭 그렇게 말해야 돼? 이게 날 위해서 산거야? 그냥 잘 샀다고 말할 순 없어? 출산 앞두고 내가 얼마나 무섭고 불안 한지는 알아? 나 너무 힘들어.”
쏘아대는 나의 말에 그는 더욱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
“피해자 코스프레 좀 그만해. 너만 힘드냐? 나도 지쳐. 회사 일도 바쁜데 너까지 왜 그러냐. 집에 오면 마음이 편해야 하는데 스트레스만 받아.”
출산휴가로 집에 있는 나와 있는 시간이 스트레스받는다는 남편의 말에 심장이 내려앉았다. 나의 성격이 이상하고 예민해서 남편은 괴롭다고 말했다. 힘들고 상처받았다고 말하면 그게 나의 잘못이 되어 더 이상 말을 이어갈 수 없었다. 만삭의 배를 부여잡고 계속 눈물만 흘렸다.
그때 오래 알고 지낸 지인이 걷기도 힘든 나를 대신해 내가 세탁소에 맡긴 옷가지를 가져다주러 왔다. 그녀가 오는 것은 예정되어 있었지만 우리의 싸움은 예상 못했다. 멈추지 않는 눈물을 채 삼키지도 못하고 문을 열었다. 울고 있는 만삭의 임신부를 보고 그녀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무슨 일이야? 집에 남편 있어? 싸웠어?”
차마 남편에게 들은 말을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었다. 남편의 말은 삼키기에도 버거웠기에 내뱉기는 더욱 힘들었기 때문이다. 내가 걱정된 지인은 집안에 들어와 나를 달래주었고 안방에 있던 남편은 이 상황을 모른 체 하였다. 진정되지 않은 나를 보고 어떻게 벌어진 상황인지 몰랐던 그녀는 안방 문을 두드렸다.
“안녕하세요. 저는 로로 지인이에요. 안에 계시죠? 로로가 계속 울고 있는데 잠시 나와서 얘기 좀 할 수 있을까요?”
돌아오지 않는 대답에 그녀는 방문을 열었다. 남편은 그 순간 수치스러움을 느꼈으리라. 제3자에게 자신의 나쁜 모습을 보이는 것은 나르시시스트에게 매우 치욕스러운 일이다. 어떻게 된 상황이냐고 묻는 지인의 말에 남편은 집안일이니 돌아가지 않으면 경찰에 주거침입죄로 신고하겠다고 경고했다. 출산을 곧 앞둔 남편의 언행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는 행동에 그녀는 나를 지키기 위해 남편의 경고를 무시했다. 남편은 끝내 경찰서에 신고를 했고 경찰관이 와서야 침대에서 일어났다.
울고 있는 아내와 신고자 남편, 주거침입죄로 신고당한 아내의 친구가 있는 집에서 경찰관들은 매우 난감해했다. 남편이 진술서를 쓰면 나의 지인은 연행되어야 했다. 말도 안 되는 상황에 결국 나는 마음을 진정시키고 남편에게 진술서를 쓰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다. 지인은 끝까지 나를 걱정해주었으나 그녀 또한 남편으로 인해 상처받았기에 나는 괜찮다고 남편과 잘 해결하겠다고 말하고 돌려보냈다. 남편은 진술서를 쓰지 않은 것에 끝까지 아쉬워하였고 한발 물러난 나에게 다가와 의미 없는 사과를 하였다.
“내가 좀 심했지. 너무 스트레스받아서 그랬어. 그냥 화나서 그런 거야.”
시체 같은 눈빛으로 알았으니 이만하고 잠들자고 말했다.
그날 새벽, 나는 진통이 시작되었고 아침에 사랑스러운 나의 아이와 만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