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르시시스트 무릎 꿇다.
엄마는 아이의 탄생 순간부터 숭고한 모성애가 발동하여 아이의 작은 뒤척임에도 반응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아이의 아빠는 아기의 울음소리에 짜증을 내고 집에서 조차 자신의 개인시간이 있길 원했다. 밤낮없이 육아하는 아내와 가장의 역할로 종일 일하고 온 남편. 둘 사이의 묘한 신경전은 드라마나 부부상담 예능에서도 종종 보았다. 우리 부부도 여느 부부와 같구나. 남일이라고만 생각했었는데 처음 나에게 호감을 표시하던 그 남자는 이제 없다.
내 입장을 말해봤자 돌아오는 말이 무엇일지 알아 그저 내가 할 일에만 몰두했다. 아빠가 되기 위해 남편은 나보다는 더 시간이 필요하겠구나. 그렇게 생각했었다. 하지만 나만 아는 나의 배려에도 불구하고 남편은 무엇이 불만인지 불평을 자주 하고 나를 못마땅해했다. 남편은 이따금 밤낮으로 아이를 돌보느라 육체적, 정식적 피로가 섞인 나의 힘든 표정이나 말투에 짜증을 냈다. 그게 자신의 향한 칼날처럼 느껴졌나 보다. 그렇게 그의 말 한마디에 나는 또 무너진다.
“아, 좀. 그렇게 힘들어할 거면 그냥 대충 봐. 유난 떨고 있네. 그러니까 맘충소리 듣는 거야.”
날카로운 남편의 말에 대응하지 못하고 눈물만 쏟아냈다. 내가 울면 남편은 더 화를 냈다.
“아, 씨*, 또 질질 짜고 있네.”
그때 머리가 정지되었다. 그제야 정신 차렸다. 이미 아이는 태어났고 이 아이는 모든 감각으로부터 엄마를 느낀다. 나는 남편으로부터 무시와 폭언을 받고 있었고 나의 아이에게 이 모습을 절대 보일순 없었다. 이젠 내가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나의 아이가 내가 무시받는 모습을 듣고 보고서 아빠보다 무능한 엄마를 미워하지 않을까. 그건 정말 견딜 수 없는 일이었다. 이젠 남편을 버려서라도 아이에 대한 나의 사랑을 지키고 싶었다.
“우리 이혼하자.”
“이혼?”
그 뒤로 남편의 나를 무시하는 폭언이 계속 이어졌다. 정신 차리고 나니 그의 말을 무시하게 됐다. 그저 머릿속으로 양육권 문제와 이혼 후 거처를 생각하기 바빴다. 남편은 다른 방에, 나와 아기는 안방에 있었다. 내가 무시하니 그도 방에서 나오지 않고 우린 서로 말이 없었다.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해 변호사를 알아보고 전화 문의까지 마쳤다. 아이가 어려 양육권은 내가 가져올 확률이 높았다. 안심은 되었으나 다른 문제들도 얽혀있어 계속해서 절차를 알아보았다. 하루가 지나고 변함없는 나의 소신에 남편은 합의이혼을 어떻게 할 것인지 이야기하자며 말 걸어왔다. 나는 평정심을 유지하고 말했다.
“그래, 이렇게 됐으니 아이를 위해서도 우리가 잘 마무리하면 좋겠어.”
“원하는 걸 말해봐.”
“양육권은 내가 가져갈게. 아직 어려서 엄마가 필요해. 어차피 소송해 봤자 엄마한테 더 유리해. 양육비는 당신 수입의 퍼센트로 줬으면 좋겠어. 당신이 수입이 없다면 안 줘도 된다는 말이야. 내가 결혼할 때 줬던 돈은 다시 돌려줘. 고향으로 돌아갈 건데 나도 집을 구해야 되니까.”
“그래, 뭐. 나도 부모님한테 상의해서 그 돈은 주도록 할게.”
꽤나 자세한 요구사항을 듣고는 남편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돌아섰다. 나 또한 덤덤히 말하고 나니 아무렇지 않았다. 이젠 이 지옥 같은 상황에서 벗어나 아이와 나를 지키는 것만 집중하자고 다짐했다. 머리가 차가워지니 마음도 생각보다 힘들지 않았다. 그렇게 며칠을 남편과는 냉전도 아닌 그저 남인 것처럼 한 집에 있을 뿐이었다. 육아는 전부 나의 몫이었지만 남편에 대한 기대가 전혀 없다 보니 서운하거나 미운 감정도 들지 않았다.
“앞으로 어떻게 할 건지 얘기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아.”
순순히 나의 조건으로 이혼해 주겠다던 남편은 갑자기 얘기하자고 했다. 아무래도 주거문제나 양육문제에 대해 서로 디테일한 합의점을 갖추는 게 좋으니 아이가 잠든 틈에 얘기를 나누었다. 나의 냉소적인 행동과 반면 남편은 표정과 행동이 한결 부드러워 보였다. 남편은 괴물 같던 자기 모습을 또다시 가면으로 가린 채 아이를 볼모로 감정에 호소했다.
“00 이가 이혼 가정에 크도록 할 거야?”
“어. 폭력적인 아빠 밑에 크는 것보단 아이 정서에 더 좋은 결정이야.”
그러곤 서로 한동안 말이 없었다.
“내가 미안해… 내가 잘 못 했어. 너도 혼자 키우긴 힘들잖아.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 변명의 여지가 없다. 내 잘못이니까.”
“그래서? 이미 다 이혼하기로 했잖아. 사과도 필요 없어. “
“로로야. 내가 정말 반성하고 더 잘할게. 며칠 동안 많이 생각했어. 내가 스스로 생각해도 너무 부끄러워서 말도 못 꺼낼 정도로 잘못만 했더라. 아무리 생각해도 넌 아무 잘못 없는데 다 내가 이렇게 만든 거야.”
남편은 그 오만한 모습을 다 버리고 나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무릎을 꿇으며 우는 남편을 보고 그때 나는 진심인 줄 알았다. 한번도 보지 못한 남편의 모습에 또 속은 것이다. 그가 진정으로 가족의 소중함을 깨달은 것이라고 착각했다. 나르시시스트가 자기가 원하는 것 앞에서 어떤 가면을 쓰고 뱀의 혀를 놀리는지 알았더라면 흔들리지 않았을 텐데. 아는 것만큼 보인다는 말이 이제야 뼈저리게 느낀다. 자기반성을 넘어 자괴감까지 보이며 힘들어하는 남편을 일으켜 세우고 다시 한 번 진짜 ‘가족’이란 무엇인지 서로 느끼고 존중하자고 말했다. 난 결국 또 한 번 남편의 술수에 넘어갔다.
나르시시스트에게 여러 번 속는다고 절대 피해자의 잘못이 아니다. 나르시시스트는 피해자가 혼자되도록 주변을 차단하고 피해자의 약점을 쥐고 자신이 불리할 때면 피해자의 마음을 약하게 만들어 믿음을 주는 척할 테니까. 피해자는 이미 정신적으로 피폐해져 있기에 정상적인(이성적인) 판단을 할 수 없는 상태이다. 피해자의 세상은 나르시시스트의 중심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나르시시스트를 잃는 건 세상을 잃는 고통을 감당해야 하니까. 그 공포감을 그들은 자유로이 이용한다.
남편의 사과를 받아들이며 다음부터는 이러한 상황이 없길 바랐다. 하지만 나의 바람과 달리 이건 첫 번째에 불과했고 다음에도, 그다음에도 상황은 반복되었다. 더 끔찍한 건 이번 사건이 나의 발목을 잡게 된 것이다. 나는 [이혼]이란 말을 꺼낸 죄인이 되어 더 큰 벌을 받게 되었다.